이중섭 <춤추는 가족>
우연히 만난 (막내이모님 벌 될법한) 분에게서 얼마 전 결혼한 아들과 며느리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시는 걸 들었습니다. 그분 나름대로는 요즘 젊은이들에 맞춰 최대한 거리를 두고, 과한 호의를 베풀거나 요구하지 않고자 노력하고 계신 듯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아쉬움이나 불만들이 생기기 시작했나 봅니다. 그다지 가까운 사이는 아니라 그저 웃으며 듣고 있었는데, 문득 '아, 저 며느리도 참 피곤하겠다...' 하는 생각이 떠오르더라고요. 그러면서 동시에 나는 참 복 받은 사람이다 생각했습니다. 저는 시어머니가 참 좋으니 말입니다. (시어머니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남편도 살면서 위로나 지혜가 필요할 때 어머니를 찾고(사실 성인이 된 자식이 이렇게 부모를 찾는 일이 흔치 않아 보입니다.), 저도 만나 뵌 지 몇 년 되지는 않았지만 본받고 싶다는 생각을 여러 번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조금씩 성장하고자 노력하고 있고요. 소박한 삶에 만족하는 법을 배우고 익히는 것, 내 마음을 평온하고 기쁘게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도 다 시어머니와 남편의 영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차에, 문득 드라마나 소설은 물론이고 브런치에서도 '고부갈등'을 주제로 하는 이야기들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친구들 중에서도 고부갈등으로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고요. 그런데 꼭 그 '시어머니'들이 나빠서 며느리들을 힘들게 하는 걸까? 그래서 며느리들이 힘들어하는 걸까?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사실 얼마 전 만난 그분도 '사람이 나쁜가?' 하면 그건 아닐 듯하고, '(어쩌다 보니)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어떤 종류의 특성을 가지게 되었나?' 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다 '그저 이 시대의 (시) 어머니들이 참 많이 불행하거나 우울한 건 아닐까' 싶더군요. 보통 언급되는, 며느리들을(또는 자식들을) 힘들게 하는 수많은 행동들...
예를 들면)
'얘야, 나는 괜찮다. (그렇지만 이렇게 말했다고 해서 진짜 뭔가를 안 해도 된다는 건 아니란다.)'와 같은 에두른 표현들
'이 정도도 (전화나, 연락이나, 찾아뵙는 거나..) 못한다니, 서운하다. (우리를 무시하는 거냐)' 하는 감정적 표현들
'아니 옆집/앞집 누구네는 뭐를 해줬다던데....'와 같은 사회비교들
마음과 심리에 대해 공부를 하다 보니, 이렇게 '나를 위해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사실은 깊은 우울과 불안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무리에 포함되고, 인정받고,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는데 (어떤 이유로든) 그것이 충족되지 않을 때 우울과 불안을 느끼며 외부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외부의 관심을 바라게 된다고 합니다. 그것이 사회적 생존에 필수적이기도 하니까요.
사실 조금씩 사회문화적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고는 하지만, 우리네 시어머니들의 시대에는 여성이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것이 당연시됨은 물론, 미덕으로 강조되기도 했습니다. 요즘에야 출산/육아에 지원이 필요하다는 인식도 있고 실제로도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분들 시대에는 온전히 홀로 감당했어야 할 몫이기도 했던 게 사실이고요. 게다가 그분들 시대엔 '시어머니'의 존재가 더더욱 굳건하고 강력한 존재이기도 했다는 건 요즘 사람들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생각하면, 무엇인가를 바라고 원하는 마음을 이성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젊은 사람들이 감정적으로까지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수많은 갈등들이 시작되는 듯하고요.
지금 시대 시어머니들의 대다수는 가정에서 배경으로 존재하며 스스로의 자아실현을 내려놓은, 그저 자식과 가족이 잘되기를 바라며 일하며 스스로를 돌보지 못한 세대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들의 마음에 서운함, 자격지심, 슬픔, 화 등의 우울한 감정과 스스로의 흐린 정체성으로부터 발현되는 불안까지... 부정적인 감정이 꾹꾹 눌려 쌓이기 쉬웠을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언제나 세대를 거듭하며, 전통과 문화로부터 개인이 자유로워지는 방향으로의 진화(?)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본다면 이는 단순히 과거 세대의, 지금 세대의 문제라기보다는 앞으로 모든 세대가 겪을 문제라고 보아야 할듯 하기도 해요. 아직은 MZ며느리라고 할 수 있을 저나 요즘의 젊은이들도 언젠가는 비슷한 역할과 처지가 될 가능성도 높을 거고요.
이 문제에 답이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언제 시어머니를 본받고 싶다고 생각했나, 떠올려 봤습니다.
'-을 할 때 기쁘다/보람차다'라는 말을 들을 때
은퇴하신 지 몇 년이 지났지만, 시어머니의 일상은 매우 바쁩니다. 각종 봉사와 공부, 취미 클래스까지... 일정을 잡으려면 2-3주 전에는 미리 예약을 해야 해요. 그리고 때때로 그 일상과 관련해서 얘기하시는데, '이런 공부를 할 때 마음이 좋다.'거나 '봉사활동에서 이런 일이 있었는데 참 보람찼다'거나 하는 얘기를 많이 해주십니다. 그럴 때 말뿐만 아니라 표정에서도 즐거움이 느껴집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왠지 안심이 되고 편안해지면서 저도 덩달아 알 수 없는 따뜻함을 느끼곤 했던 것 같습니다. 반대로, 힘들고 부정적인 일들에 대해서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많지 않습니다. 하시더라도, 그런 일이 있었는데 이렇게 털었다... 정도의 뉘앙스였습니다.
그에 반해... 저는 누군가에게 '내가 이런 일로 기뻤어, 즐거웠어' 하기보다는 짜증 났던 일, 화났던 일, 어이없었던 일 등... 부정적인 일을 더 쉽게 말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이라도 하고 나면 풀리니까요. 이 지점에서 반성하며, 저 스스로도 좀 더 기쁨과 보람을 느끼는 긍정적인 일들에 대해 말하는 연습을 해야겠다 싶네요. (참 어색하고, 낯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만...)
'너희 둘이 잘 상의하고 고민해 보아라' 하실 때
결혼하고 시어머니께 가장 많이 들은 말이 이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나면, 결론은 '너희 둘이 잘 상의하고 고민해서 결정해라'였던 것 같습니다. 이런저런 측면에서 의견을 주시긴 하지만 '주장'하신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항상 '너희 둘이 함께 있으니 얼마나 든든하니, 나는 이제 정말 해방이다!' 하시며 해맑게 웃으십니다. (가족친지들의 수많은 레퍼토리들, 예를 들면 '애는, 집은, 직장은 등등....'은 정말 한 번도 얘기하신 적이 없는 듯하네요.)
사실, 요즘 '젊은 꼰대'라는 말이 많은 것처럼... 저 역시 회사생활을 할 때, 혹은 사회에서 어떤 일들로 더 젊은 사람들을 만났을 때 '이래라저래라' 하고 싶은 마음을 누르기 어려웠습니다. 얼마 차이가 나지도 않는데도, 내 경험과 생각으로는 이렇게 하는 게 맞을 것 같은데... 하는 답답증이 일었으니까요. 그런데 하물며 자식과 자식의 배우자라면... 왠지 그 마음을 참기가 더 어려울 거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참 감사한 일이다' 하실 때
지금까지 느끼기로, 시어머니는 타인에 대한 기대치를 낮게 가지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게 거리를 둔다거나 회의적이라는 의미는 아니고, 사소한 일들에 '감사하다'는 표현을 자주 하시거든요. 듣다 보면 '그 정도는 당연한 거 아니야...? 뭐가 감사한 거지?' 싶을 만한 일들도 많은데 말입니다. 여하튼, 그럼에도 타인의 사소한 호의나 행동에도 진심으로 감사함을 느끼시는 듯한 모습을 보면, 좀 더 편안하게 느껴집니다. 나에 대해서도 너그러우시지 않을까 하고 긴장이 풀어진다랄까요? (아닐지도 모르겠지만요.)
'내가 도와줄 건 없을까?' 하실 때
세상에는 두 종류의 부모님이 계신다고 합니다. '- 이런 도움을 줄래?' 하시는 분과 '-이런 도움을 줄 테니 받아라' 하시는 분들. 전자는 사회에서 고군분투하는 자식들의 어깨에 짐을 얹는 것이고, 후자는 어떤 면에서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무엇인가 종속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후자의 경우, 도움을 준 만큼 본인 뜻을 따르기를 바라시는 분들도 많은 듯하고요.)
사소한 거라도 이렇게 자주 물어보십니다. 그러면 어떤 때는 감사히 받고, 어떤 때는 정중히 사양하기도 하는데... 어쨌든 실제로 실행하기 어려운 지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걸 주고 싶은 마음, 또는 내가 필요한 걸 요청하고 싶은 마음보다는... 그저 순수하게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으로 바라본다는 게 어려운 일이니까요.
'이런 이유로 이게 좋다/실다' 명확하게 얘기하실 때
가족 간에 최소한으로 챙긴다고 해도, 매년 챙길 일이 많습니다. 명절 두 번, 생신, 어버이날, 크리스마스, 신정... 결혼 후 한 1년 정도는 나름 고민해서 이것저것 챙겼는데요. 시어머님은 실용적이고 효율적인 것을 좋아하시는데, 아무래도 제가 하는 모양이 번거로워 보이기도 하고, 부족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이렇게 얘기하셨어요.
맛있는 거 먹고, 좋은 거 쓰는 건 둘이서 하고.... 괜히 이런 거 고민하느라 귀한 시간 쓰지 말라고 내가 정했다. 우리는 이런 게 좋다. 이번 명절에는 요거요거요거, 아버님 생신에는 이거하고 여기서 밥 먹자. 내 생일에는 이게 필요하다.... 등등
이렇게 적당한 수준에서 다 정해주십니다. 저희도 부담스럽지도 않고, 외려 마음이 편합니다. 우리 입맛/취향과 부모님 입맛/취향이 다른 건 인정해야 할 부분이니, 괜히 눈치 보며 맘에 드셨으려나... 하지 않아도 되고요. 이게 좋을까, 저게 좋을까 고민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건 저도 정말 못하는 건데요. 심지어 남편이 '이번 생일에 뭐 가지고 싶어?' 하고 물어도 아직 우물쭈물하면서, '내가 뭘 원하는지 알아주기를, 그게 아니라면 내가 기대하는 것 이상으로 짠-해주기를' 기대하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올해는 (남편이 먼저 이걸 생일선물로 해줄까? 물어보긴 했지만...) 잠시 고민하는 척한 후 그걸 해달라고 얘기했습니다. 저에게는 큰 연습이 되었습니다...
여하튼, 내 욕구를 정확히 알고 상대방이 부담스러워하지 않을 수준으로 정하여 전달/요구할 수 있는 능력도 연습하면 연습할수록 관계가 편안해지는 기술이 아닐까 싶어요.
이렇게 쓰려고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스스로 감사하며 행복하게 사시는 모습, 자식내외를 독립적 가정으로 바라보시고 거리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시는 모습, 굉장히 명확하고 세련되게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을 표현하시는 모습... 을 본받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아직 다 잘 못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행동에는 마음 챙김이 필요한 듯하고요.
결국엔 자식이든 부모든, 모든 사람은 각자의 마음에서 행복을 찾아야 편안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겠다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손윗사람이 행복할 때, 손아랫사람이 더 쉽게 안정을 느낄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런 면에서... 소박하게 살기로 한 이상, 화려한 부나 권력, 명예는 없겠지만 마음에 행복과 여유를 많이 채워둘 수 있도록 노력해 보자 다시 한번 꾹꾹 눌러써 봅니다. 이건 노력으로 충분히 가능할 테니까요.
동시에, 이 시대의 모든 어머니들이 지금보다 행복해지실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