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어닝 쇼크가 아니었다. 이건 어닝 패배였다. 2024년 3분기 삼성전자의 DS 부문 영업 이익은 잠정적으로 5조 원을 밑돌 것으로 전망된다. 반면 2024년 3분기 SK 하이닉스의 영업 이익은 7조 원을 넘는 것으로 전망된다.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이 영업 이익에서 SK 하이닉스한테 역전 당하는 것은 사상 처음이다. 삼성전자는 창사 이래 언제나 넘사벽 1등이었다. 메모리 반도체 부문에선 한국 1등이 아니라 전세계 1등이었다. 그런데 SK 하이닉스한테 추월 당해버린 것이다.
표면적인 원인은 고대역폭 메모리인 HBM 대응 실패다. HBM은 메모리 반도체를 층층이 쌓고 연결해서 데이터 전송 속도를 높이는 기술이다. SK 하이닉스가 선도하고 있다. SK 하이닉스는 HBM3까지 만들고 있다. 주 고객은 인공지능 트렌드의 주인공인 엔비디아다. 엔비디아의 젠슨 황은 매 분기보다 초고성능 인공지능 반도체를 선보이면서 기술 주도권을 독점하고 있다. 엔비디아의 인공지능 반도체인 H100은 없어서 못 팔 정도다. H100에는 반드시 SK 하이닉스의 HBM이 필요하다.
반면 삼성전자는 엔비디아의 HBM3 품질 테스트에서 번번히 미끄러지고 있다. 최근에는 삼성전자의 최신 고대역폭 메모리 HBM3E가 엔비디아의 퀄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다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젠슨 황이 삼성전자의 HBM3E에 친필 싸인을 남긴 날짜는 2024년 3월 21일이었다. 젠슨 황은 JESEN APPROVED였다. 6개월 만에 삼성전자는 JESEN DISAPPROVED가 됐다.
표면적인 원인 뒤엔 구조적인 원인이 있다. 기술의 삼성전자가 엔비디아의 기술 승인에 목을 매야만 하는 처지가 된 근본적인 원인이 있는 것이다. 그 원인으로 지목되는 인물이 바로 정현호 삼성전자 사업지원TF장 부회장이다. 정현호 부회장은 삼성전자 안에선 HH라는 은어로 불린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JY라고 불리는 것처럼 말이다. 삼성전자 안에서 이렇게 은어로 불린다는 것은 곧 실세라는 뜻이다.
삼성전자 안에선 정현호 부회장이 이끄는 사업지원TF는 서초라고 불린다. 진짜 문제는 삼성전자 내부에서 사업지원TF가 사업지연TF라고 불린다는 점이다. 삼성전자가 파운드리 부문에서 TSMC한테 밀린 것을 넘어서서 안방인 메모리 부문에서까지 SK 하이닉스한테 추월 당한 이유는 삼성전자의 기술 혁신 속도를 지연시키는 내부 의사 결정 구조 때문이라는 뜻이다. 그 수장이 정현호 부회장이다.
게다가 삼성전자의 수장인 이재용 회장은 삼성전자 안에선 바지 회장님이라고 불린다. 선대 이건희 회장 시절엔 상상조차 못할 일이다. 이건희 회장의 카리스마는 유명했다. 임원들이 긴 회의 시간 동안 화장실에 가지 않기 위해 기저귀를 차고 들어갈 정도라는 뒷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이건희 회장이 주재하는 회의에선 화장실 가는 것조차도 눈치가 보일 정도로 압도적이었다는 뜻이다.
반면 이재용 회장은 대중적으로도 재드래곤이라는 애칭으로 불릴 정도로 이미지가 좋다. 이재용 회장의 인품에 대한 미담은 한 두가지가 아니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부잣집 아들인 것을 티를 내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국정농단 사태로 2차례에 걸쳐 560일 동안 투옥돼 있을 때조차 그랬다. 간수들이 이재용 회장을 신사라고 부를 정도였다.
정작 삼성전자 안에서 이재용 회장은 신뢰 받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두려움의 대상도 아니다. 오히려 2인자인 정현호 삼성전자 사업지원TF장이 더 어려운 대상이다. 이재용 회장의 지시는 일주일에 1건 정도라면 정현호 부회장의 지시는 거의 매일 내려온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지금 삼성전자의 실세는 분명 정현호 부회장이란 뜻이다. 적어도 삼성전자 조직 안에선 그렇게 느끼는 분위기가 팽배하다는 뜻이다.
사실 정현호 부회장에 대한 언론의 지적은 원데이 투데이의 문제도 아니다. 삼성전자의 실적이 아직 양호했던 2023년 초부터도 일부 언론들을 통해 꾸준히 제기돼 왔었다. 그런데도 정현호 부회장의 위상을 높아지기만 했다. 반면 삼성전자 DS 부문장은 실적에 따라 2년에 한번 꼴로 교체되고 있다. 바꿔 말하면 이재용 체제에서 정현호 부회장은 단순한 2인자 이상이라는 얘기다. 어쩌면 여기에 삼성전자 조직의 본질적 문제가 있다. 뱅가드 펀드의 창업자 존 보글은 “전략은 구조를 따른다”는 말을 남겼다. 삼성전자의 전략 미스들은 결국 HH라는 구조의 결과다.
정현호 부회장은 이재용 회장과는 8살 터울이다. 상고와 경영학과를 나와서 23세 때인 1983년 삼성전자 국제금융과에 입사했다. 한 마디로 정통 재무통이라는 뜻이다. 신입사원 정현호를 삼성그룹 심장부인 비서실로 발탁한 사람은 이건희 회장이었다. 1987년 11월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별세한 이듬해인 1988년 7월 정현호는 신임 회장 이건희 비서실의 재무팀으로 발령 받았다. 정현호 부회장은 1988년부터 지금까지 36년 동안 내내 비서실에서만 근무했다. 시대에 따라 비서실의 이름은 구조조정실과 미래전략실과 사업전략TF로 바뀌었지만 정현호 부회장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이재용 회장이 삼성전자에 입사한 연도는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입사 이후에 10년 가까이 유학을 다녀왔기 때문이다. 1991년 12월 삼성전자 경영기획팀에 부장으로 입사했지만 일본과 미국 유학을 다녀오라는 선친 이건희 회장의 조언에 따라 일본 게이오기주크 MBA와 하버드 MBA에서 잇따라 공부했다. 그런데 이재용 회장이 게이오기주크 MBA를 다닐 때 삼성그룹 비서실에서 사내 해외 연수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아서 하버드MBA에 먼저 입학한 인물이 바로 정현호 부회장이다. 이재용 부회장이 게이오기주크 MBA를 졸업한 1995년에 정현호 부회장도 하버드 MBA를 졸업했다.
이재용 회장은 1995년 하버드 케네디스쿨에서 1년 동안 공부했고 하버드 MBA 입학을 준비했다. 이때부터 삼성그룹 안엔 이건희 회장의 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경영기획팀 부장을 지원하는 비공식 조직이 구성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중에서도 하버드 MBA 졸업생인 정현호의 역할은 작을 수가 없었다. 이재용 회장과 정현호 부회장의 인연이 1997년 하버드 유학 시절부터라고 알려져 있는 이유다. 정확하게는 둘이 함께 학교를 다닌 것이 아니었다. 졸업생 정현호와 재학생 이재용의 관계로 처음 만났던 셈이다. 수재에 모범생인데 졸업생 선배까지 가까이 있었던 이재용 회장은 1997년 하버드 MBA를 최고 성적으로 졸업했다.
이재용 회장은 2001년 3월 말 삼성그룹 경영지원총괄 경영기획팀 상무보로 본격적으로 출근을 시작한다. 2001년 3월 말 정현호 부회장 역시 삼성그룹 경영지원총괄 IR그룹장으로 발령 받는다. 이재용 회장의 삼성 첫 출근날에도 정현호 부회장이 함께 했다는 뜻이다. 유학 시절부터 회사 생활까지 이재용 회장의 옆 자리는 언제나 정현호 부회장이 있었다. 정현호 부회장을 비서실에 발탁한 건 이건희 선대 회장이었다. 하버드 MBA로 보낸 것도 결국 이건희 회장이었다. 2001년 아들와 아들의 선배를 같은 부서에 발령한 것도 이건희 회장이었다. 2024년 현재 삼성그룹의 탑매니지먼트인 JY-HH 체제는 이건희 회장의 큰 그림이라는 의미다.
이재용 체제는 이건희 회장이 2014년 5월 10일 한남동 자택에서 심근 경색으로 쓰러지면서 갑작스럽게 시작됐다. 그런데 이건희 회장이 마지막으로 했던 비서실 인사 중 하나가 2014년 5월 1일 정현호 부회장을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경영진단팀장 겸 인사팀장으로 발령내는 것이었다.
미래전략실은 이건희 회장 체제를 상징하는 조직이다. 인사와 전략과 감사와 법률을 총괄한다. 각각의 권한이 워낙 막강해서 팀장 역시 겸직은 없다. 재무통인 정현호 부회장 역시 감사을 담당하는 경영진단팀장을 맡아왔다. 그런데 인사전문가가 아닌 정현호 부회장이 인사팀장까지 겸하게 된 것이었다. 정현호 부회장은 이때부터 이미 자타공인 이재용 회장의 오른팔이었다. 이건희 회장은 쓰러지기 전에 이미 이재용 체제의 주춧돌을 놓았던 셈이다.
그런데 이때부터 이재용 당시 부회장과 정현호 당시 인사팀장 겸 경영진단팀장은 삼성그룹의 사업구조를 공격적으로 재편하기 시작한다. 미래전략실 경영진단팀은 삼성그룹의 금융감독원으로 불린다. 사업의 성과 뿐만 아니라 사업의 합법성까지 들춰보기 때문이다. 여기에 인사팀장까지 겸하면 이젠 사업 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신상정보까지 파악하게 된다. 금융감독원 더하기 검찰이 되는 것이다.
이때 이재용 부회장과 정현호 겸임 팀장이 내린 중요한 결정이 방산과 화학 4개 계열사를 한화에 매각하는 것이었다. 이재용 체지 6개월 만인 2014년 11월 26일 전격 발표된 삼성테크윈과 삼성종합화학과 삼성토탈과 삼성탈레스의 매각은 이재용식 실용주의의 신호탄으로 평가 받았다.
사실 2011년부터 정현호 경영지원팀장을 중심으로 진행된 삼성테크윈 비리 감사의 파생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2010년 경영 일선에 복귀한 이건희 회장은 삼성테크윈 방산 비리를 보고 받고 진노했었다. 2011년 6월 정현호 팀장을 경영진단팀장으로 임명해서 삼성테크윈 비리를 파헤치게 했다. 정현호 팀장은 삼성테크윈을 넘어서 삼성생명과 삼성화재와 제일모직까지 전방위 감사를 벌였다. 이재용 회장의 방산 계열사 매각은 이른 맥락에서 보자면 썩은 가지를 아예 잘라버렸다고 설명할 수도 있다. 10년이 지난 지금 한화테크윈은 삼성테크윈과는 전혀 다른 회사가 돼 있지만 말이다.
중요한 점은 이재용 체제가 감사 전문가이자 인사권까지 장악한 정현호를 통한 냉정한 구조조정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이다. 썩으면 자르고 안 되면 접는 기조였다. 사실 정현호 부회장한텐 경력상의 약점이 있다. 정현호 부회장은 평생 비서실에서 근무해왔다. 현장 사업부장으로서의 성공 경험이 없다. 2010년 12월 삼성전자 디지털이미징사업부장으로 발령 받았을 때가 거의 유일했다. 디지털이미징사업부는 이건희 회장이 애지중지했던 부서다. 이건희 회장이 오디오와 카메라 마니아라는 건 유명하다. 삼성을 소니와 캐논을 능가하는 광학 기술 회사로 만들고 싶어했다. 그걸 정현호 부회장한테 맡겼다.
쉽진 않은 일이었다. 2010년은 이미 디지털 카메라 시장은 스마트폰 시장에 흡수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정현호 디지털이미징사업부장은 미러리스 카메라를 출시하면서 제품 라인업 확대에 힘을 쏟았지만 이미 경쟁 상대는 소니나 캐논이 아니라 애플이었다. 어쨌든 정현호 디지털이미징사업부장은 실적을 내지 못했다. 결국 2011년 다시 미래전략실 경영진단팀장으로 이동했다. 야전에서 사령부로 되돌아온 것이다. 어쩌면 유일한 실패 경험이다.
그런데 2011년부터 2024년까지 정현호 부회장이 내린 사업적 결정들은 한 마디로 실패 회피적이다. 2015년 삼성전자는 HBM 개발에 성공했다. 그렇지만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은 HBM 생기술과 생산에 투자를 하지 않았다. 당장 수요가 크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2024년 HBM 때문에 삼성전자가 SK 하이닉스한테 어닝 패배를 당한 현재 시점에서 보면 뼈아픈 실책이다. 2024년 3분기 SK 하이닉스의 HBM 매출은 전분기 대비해도 무려 70%나 증가했다. 한 마디로 HBM을 타고 날아가고 있는 것이다. 당시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의 결정권자는 이재용 부회장과 정현호 인사팀장 겸 경영진단팀장이었다. 삼성그룹은 2016년 초 디지털이미징사업에서 사실상 철수한다. 정현호 부회장 스스로 자신의 실패를 지운 격이었다.
물론 어쩌면 정현호 부회장한텐 이재용 체제의 완성이라는 더 큰 미션이 있었다. 2015년 내내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은 이재용 회장이 삼성제국의 왕좌에 앉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만 하는 고비였다. 결과적으로 이 과정에서 벌어진 여러 문제들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재용 회장은 상처 투성이가 된 채 왕좌에 앉게 됐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은 행동주의 펀드의 먹잇감이 됐다. 정현호 부회장은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사건의 증거 인멸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았다. 이재용 회장은 국정농단 사태에 연루되면서 2차례나 투옥됐고 560일을 감옥에서 보내야만 했다. 선대 회장대에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총수 구속 사태였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이재용 회장의 삼성 조직에 대한 그립감을 약화됐고 정현호 부회장에 대한 의존도가 과대해졌다는 점이었다. 2017년 2월 28일 이재용 회장이 구속되자 2017년 3월 31일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은 공식적으로 해체됐다. 200명의 미래전략실 직원들은 각자 계열사로 돌아갔다. 사실 삼성그룹의 미래전략실은 구조적으론 각 계열사로부터 파견된 직원들의 임시 집단에 가깝다. 그런 면에선 청와대 조직과 흡사하다.
이렇게 미래전략실이 강제 해체됐다고 해서 삼성그룹 계열사들이 정말로 독립경영이 가능한 건 아니었다. 독립할 준비가 안 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총수와 미래전략실의 결정을 기다려온 조직이 하루 아침에 독립운동시스템을 바뀌는 건 불가능하다. 결국 갑작스러운 권력 공백은 정현호 부회장의 역할이 비대해지는 원인이 됐다. 원래 삼성그룹은 미래전략실의 권한이 막강했어도 계열사의 기술 경영자들의 영향력도 상당했던 힘의 균형을 이룬 조직이었다. 이건희 시대를 상징하는 CEO들인 윤종용 회장과 진대제 장관이 대표적이다. 아무리 이학수 부회장의 입김이 막강했어도 결국 이건희 회장의 힘이 더 막강했고 덕분에 골디락스 균형을 이룰 수 있었다.
이재용 당시 부회장은 투옥되고 미래전략실은 해체되면서 결국 힘의 균형이 무너지고 말았다. 2017년 11월 삼성전자 사업지원TF가 신설된 것은 미래전략실의 부활이라는 비판을 비하기 위한 꼼수였지만 당시로선 시급한 당면 과제였다. 정현호 사업지원TF장은 전략과 인사로만 이뤄진 12명 정도의 임시 조직을 만들었고 이건 미래전략실보다도 더 실체가 없어졌다는 뜻이었다. 개혁이 개악이 돼 버린것이었다. 자연히 정현호 사업지원TF의 권한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삼성그룹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이병철 시대에도 이건희 시대에도 삼성그룹에는 늘 컨트롤타워가 있었고 21세기라고 해서 달라지긴 어려웠다. 문제는 균형이었다.
2021년 12월 7일 이재용 회장은 삼성전자를 김기남 체제에서 경계현 체제로 전환시켰다. 김기남 DS 부문장은 코로나 판데믹이 촉발한 메모리 특수의 호황 속에서 박수 칠 때 떠날 수 있었다. 반면 경계현 DS 부문장은 메모리 피크아웃 시점에서 수장이 됐다. 그렇지만 메모리 반도체 사이클은 압도적 1등 삼성전자한텐 언제나 기회였다. 올라갈 때는 잘 팔아서 좋았고 내려갈 때는 치킨 게임으로 경쟁사들을 초토화시켰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반도체 사이클이 내려가던 시점에서 이재용 회장은 다시 한번 치킨 게임을 벌이려고 했다. 인위적 감산이 없다면서 생산량을 유지했고 SK 하이닉스까지 다 죽자는 거냐며 아우성칠 정도였다. 정작 삼성전자 안에선 치열한 갑론을박이 있었다. 이재용 회장은 끝까지 감산을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압박은 상당했다. 블랙록도 압박을 했고 심지어 대통령실에서도 압력이 있었다. 2개월 연속 경상수지 적자가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한 마디라 시장과 정부 모두 삼성전자에게 감산을 사실상 요구한 것이다. 이때 정현호 부회장도 이재용 회장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시장과 정부를 설득해내진 못했다. 결국 이재용 회장은 굴복했고 단기적으론 실적이 회복됐다. 이건 역설적으로 정현호 부회장의 영향력 강화로 이어졌다. 사업지원TF는 사실상 미래전략실의 위상을 회복했다. 서초동으로 이사했고 계열사 사장단 회의까지 부활했다. 이름만 사업지원TF였다.
반전은 2022년 11월 샘 올트만의 오픈AI가 챗GPT를 공개하면서 반도체 시장의 판도가 AI 중심으로 완전히 바뀌어버리면서 시작됐다. 반도체 불황으로 다 죽어가던 SK 하이닉스는 엔비디아에 HBM을 납품하면서 AI 트렌드에 올라탔지만 삼성전자는 그러지 못했다. 그러자 이번엔 경계현 DS부문장이 책임을 지고 옷을 벗었다. 역설적으로 다시 한번 사업지원TF로의 원심력이 강화된 것이다.
어닝 패배로까지 이어진 삼성전자의 실패는 결국 이건희 회장 체제에서의 균형을 잃고 의사결정 구조가 악순환 구조에 빠져들면서 시작됐고 강화되고 있다. 삼성전자는 과거의 미래전략실을 거의 복원했지만 과거 기술 CEO들과 미전실이 이뤘던 아름다운 균형은 복원하지 못했다. 게다가 천재지변적 리스크까지 잇따르고 있다. 사법 리스크에 이어 AI 혁명까지 몰아닥치면서 삼성전자한테 주어진 시간이 바닥나고 있는 것이다. HH도 문제고 사업지연TF도 문제다. 문제가 생겼을 때 누군가를 지목하는 건 쉽다. 그렇지만 가장 큰 문제는 잘못된 전략을 만드는 고장난 구조다. 그리고 그 구조는 1990년대부터 만들어져온 것이다. 지금 삼성의 문제가 고차방정식이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