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커는 어떤 시대의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영화 조커에 관한 다수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날갯짓이었다. 아서 플렉은 지긋이 춤을 추기 시작한다. 나지막이 한걸음 발을 내딛는다. 아서는 여전히 피에로 복장을 하고 있다. 더 이상은 피에로가 아니다. 더 이상 아서 플렉도 아니다. 아서는 다른 무엇이 됐다. 조커다. 조커는 조용히 탄생의 날갯짓을 시작한다.
조커를 다시 봤다. 처음 봤을 때 조커는 머리 복잡한 사회비판적 영화처럼 읽혔다. 솔직히 말해서 온통 그렇게만 보였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조커가 개리 글리터의 락앤롤 파트2에 맞춰서 춤을 추는 뉴욕 브롱크스의 셰익스피어 계단을 보면서 기생충을 떠올렸기 때문일 수도 있다. 택시 드라이버에 대한 명명백백 오마쥬 장면들 탓일지도 모르겠다. 조커는 기생충처럼 계층갈등이라는 가파른 계단을 이야기하려는 비판적 영화로 읽혔다. 1976년의 택시 드라이버처럼 자본주의의 뒷골목을 방황하는 혼돈의 영화처럼도 보였다.
조커를 복잡한 영화로 인식하게 된 데는 무엇보다 지하철 살인 씬 탓이 컸다. 아서는 지하철에서 세 명의 청년을 차례로 살해한다. 청년들은 월스트리트의 뱅커였다. 지하철에서 세 사람은 분명 여성을 희롱하는 불량배들이었다. 아서처럼 비쩍 마른 약자에겐 죄책감 없이 주먹을 휘두르는 폭력배들이었다. 그런데 하필 엘리트 뱅커였다.
첫발은 사고였다. 두 번째 총알은 자기 방어였다. 세 번째 총알은 쾌락이었다. 조커는 도망치려는 뱅커를 등 뒤에서 처형해버린다. 명백했다. 살인이었다. 정작 군중은 조커를 영웅시한다. 첫발로 불량배에 저항했고 두발로 폭력배에 저항해서가 아니다. 세발로 배부른 뱅커 셋을 깨끗하게 처리해줬기 때문이다. 일그러진 군중이 일그러진 살인마를 일그러진 영웅으로 만든다. 조커는 지독하게 냉소적인 일그러진 영화였다.
이상했다. 다시 본 조커는 처음 본 조커와는 전혀 다른 영화로 보였다. 일단 복잡할 것도 없는 이야기였다. 어린 시절 양부모의 학대로 뇌손상을 입고 정신질환을 앓게 된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사람들을 웃게 해주고 싶다. 그에게 사람들의 웃음은 세상이 자신을 환영한다는 또렷한 신호다. 광대는 눈물겹도록 애쓴다. 아무도 그를 보며 웃어주질 않는다. 광대의 인생은 거지 같은 비극이다. 남자는 세상을 웃겨주기보단 자신만 웃어주기로 결심한다. 광인은 홀로 광란하며 혼자만 웃는다. 광인에게 인생은 개 같은 희극이다. 그렇게 미친 광대는 멀쩡한 광인이 된다.
다시 본 조커는 시리도록 아름답기까지 했다. 조커는 화장실로 피신한다. 헐레벌떡 뛰어들어 허겁지겁 문을 잠근다. 언뜻 겁먹은 아서 플렉 같다. 아서가 아니다. 춤사위가 시작된다. 조커다. 조커는 사뿐히 첫 발자국을 내딛는다. 나비처럼 느릿느릿 양팔을 펼친다.
이윽고 조커가 거울에 비친다. 웃고 있다. 광대 분장 탓이 아니다. 아서 플렉은 조커로서 진정 웃고 있다. 광대 분장은 더 이상 변장이 아니다. 이젠 아서 플렉의 진짜 얼굴이다. 조커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본다. 아서는 조커가 황홀하다. 힐두르 구드나도티르의 묵직한 첼로가 화면을 그득 채운다.
조커는 이토록 숨 막히게 아름다운 예술 작품이었다.
그랬다. 조커는 멀리서 보면 비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희극인 영화였다. 멀리서 볼 땐 개인을 이루는 미시적 내면보단 개인을 포위한 거시적 시대상이 먼저 보이기 마련이다. 조커의 시대 배경은 구체적으로 1981년이다. 뉴욕에서 쓰레기 대란이 일어났던 해다. 당시 청소부들은 무려 17일 동안이나 파업을 이어갔다. 뉴욕은 쓰레기장으로 전락했다. 뉴욕은 자본주의의 하수구였다. 조커의 고담시엔 설상가상으로 슈퍼 쥐떼까지 들끓는다. 로버트 드니로가 연기한 토크쇼 진행자 머레이 프랭클린은 이렇게 농담한다. “슈퍼쥐한테 필요한 건 슈퍼캣이지.”
슈퍼쥐가 아서 플렉 같은 차상위 도시빈민을 은유한다면 슈퍼캣은 토마스 웨인 같은 최상위 도시 귀족을 상징한다. 도시빈민문제를 해결하고 자본주의의 하수구를 정화하려면 도시 귀족이 나서야 한단 말이다. 조커에서 토마스 웨인은 실제로 시장 선거에 출마한다. 잠시나마 고담시의 희망으로 떠오른다.
정치인 웨인의 민낯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건 우연한 지하철 살인 사건 때문이다. 토마스 웨인은 조커에 동조하는 시민들을 광대에 비유한다. 노력해서 성공한 자신 같은 사람들을 시기하는 비겁한 패배자들일뿐이라고 폄훼한다. 자신이 운영하는 금융회사의 직원들이라는 이유만으로 피해자들을 전도유망한 청년이라고 단언한다. 실제론 여성을 희롱했던 불량배였고 광대를 폭행했던 폭력배였을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그렇게 웨인은 고담 시민들의 신뢰를 잃는다. 낙담한 고담은 폭주하기 시작한다. 정치의 실패다.
웨인의 실패가 조커의 뱅커 살인 탓인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민주주의로 교정된다. 자본주의가 유발하기 마련인 극심한 빈부격차는 계층갈등이라는 사회문제를 야기한다. 정치는 민주주의 원리를 통해 이런 필연적 사회갈등을 완화해야만 한다. 자본주의가 격차와 갈등으로 붕괴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성장하게 하려면 다른 해법이 없다.
따라서 토마스 웨인은 아서 플렉의 말에 귀를 기울였어야 했다. 토마스 웨인 같은 민주주의의 지도자들은 아서 플렉 같은 자본주의의 낙오자들한테 귀를 기울였어야 했다. 웨인은 자신을 찾아온 아서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결국 아서 플렉은 이렇게 중얼거리게 된다. “내 말 듣고 있지 않지, 그렇지?”
낯익은 비극이다. 1980년대 미국은 실제로 토마스 웨인 같은 정치인이 이끌고 있었다. 로널드 레이건이다. 레이건 대통령은 백악관 앞에 있는 홈리스들을 보면서 이렇게 반문했었다. “저들은 왜 가난을 선택했을까?” 1980년대는 지금도 가진 자들한텐 에덴 낙원으로 추억된다. 가난한 자들한텐 신자유주의를 잉태한 비정한 시대로 기억된다.
가난한 자들은 가난을 선택한 것이라는 레이거니즘은 1998년 외환위기를 거치며 한국 자본주의에도 빠르게 전염됐다. 그렇게 미국의 1980년대는 전 세계 가진 자들의 이상향이 됐다. 2019년의 조커가 구태여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까닭이다. 조커가 실패한 자본주의와 패배한 민주주의가 합작한 괴물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다. 조커가 우리 시대의 오래된 자화상이라는 걸 말하기 위해서다. 멀리서 보면 조커가 시대의 비극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딱 여기까지가, 조커를 일견 했을 때의 첫인상이었다.
그런데 조커를 두 번째로 봤을 땐 모든 것이 달리 보였다.
인식의 지평이 뒤집히는 충격이었다. 같은 영화가 다른 영화처럼 느껴졌다. 결국 조커를 처음 봤을 때 우리 시대의 자화상만 목격했던 진짜 이유가 따로 있었다는 걸 어렵게 깨달았다. 조커를 멀리서만 바라봤기 때문이었다.
조커는 한국이란 자본주의 사회의 논쟁거리가 돼 있었다. 정작 모두가 조커를 통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하고 있었다. 한쪽은 처음부터 아서 플렉를 자본주의의 희생자로 바라보고 싶어 했다. 다른 한쪽은 아서를 실패로 조커를 오류로 낙인찍고 싶어 했다. 한쪽은 아서 플렉의 얼굴을 상징적 가면으로만 이해했다. 다른 한쪽은 아서 플렉의 얼굴을 끝끝내 외면하고 싶어 했다.
다들 아서 플렉이 조커가 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 이유를 찾고 싶어 했다. 정작 그 이유들 속엔 아서 플렉은 없었다. 자본주의 속에도 민주주의 안에도 아서 플렉이라는 존재는 없었다. 아서 플렉의 진짜 얼굴은 거기에 없었다. 조커를 둘러싼 논쟁 속 어디에도 없었다.
조커 같은 상징으로서만 아서라는 인물을 이해하는 건 참 손쉽고 참 안전한 일이다. 그가 겪은 학대에 연민할 필요도 그가 저지른 살인에 분노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멀리서 보는 비극은 아무리 비극적 비극일지라도 보는 사람한텐 그저 비극적 볼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아서를 애써 외면하는 사람들처럼 아서의 비극을 멀리서만 분석하는 사람들도 아서의 얼굴을 직시하지 않기는 매한가지다.
조커는 불타는 도심 한복판에서 조커에게 열광하는 폭도들을 보여준다. 동시에 자신이 조커를 처음 조커라고 불렀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아서를 힐난하는 토크쇼 진행자 머레이 프랭클린의 훈계도 들려준다. 어느 쪽도 아서의 말을 듣고 있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양쪽 모두 자신들이 보고 싶은데로 만 조커를 볼 뿐이다.
조커를 두 번째 봤을 때 비로소 깨달았다. 우리 모두 제 멋대로 조커를 바라보는 군중의 한 사람일 뿐이었다. 조커를 반영웅시하든 아서를 백안시하든 마찬가지였다. 조커와 아서 입장에선 둘 중 어느 쪽이어도 상관없다. 어차피 양쪽 모두 그들의 말을 듣고 있지 않기는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양쪽 모두 조커와 아서의 인생을 가까이서 볼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누군가의 인생이란 희극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볼 애정도 용기도 없기 때문이다.
이쯤 되자 조커에 관해 무언가를 써보겠다는 얄팍한 의욕조차 모조리 휘발돼버렸다. 조커를 멀리서 비극으로 분석하는 한낱 군중으로서의 자신을 자각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커에 관해 무슨 글을 쓰든 조커의 비웃음을 살게 틀림없었다. 모두가 잘난 헛소리에 불과했다. 그딴 먹물스런 엘리트적 논쟁으론 조커를 통찰할 수 없단 걸 알아버렸다.
그렇다고 아서의 인생을 가까이에서 바라볼 용기도 없었다. 대상으로부터 한발 물러나서 자본주의나 민주주의를 논하는 이성적 비평은 안전하고 쉽다. 또 있어 보인다. 누군가의 희극 앞으로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가서 들여다본다는 건 극심하고 위험한 감정 노동이다. 게다가 없어 보인다. 조커는 잊기로 했다.
지난 주말이었다. 이날도 광화문은 태극기로 대동 단결한 무방비 도시였다. 장관은 사퇴했지만 군중은 또 무언가를 요구하고 있었다. 주장들은 하염이 없었다. 걷다 보니 낯선 군중과 뒤섞여버렸다. 광장에선 주장과 주장이 메아리치며 격돌하고 있었다. 문득 만인이 만인을 향해 무엇을 주장하든 무관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집회의 한 복판은 한없이 공허했다. 정치적 희망이 퇴색하고 경제적 기대가 허물어진 시대에 개인은 무심해질 뿐이었다. 시대의 비극보단 인생의 희극이 더 서글펐다.
광장에서 이런 기분을 느껴보긴 처음이었다. 얼마 전 30대 초반의 직장인이 무심코 던진 푸념이 계속 뇌리를 맴돌고 있어서였을지도 모른다. “한국 사회에선 이대로 살아가면 이대로 사라질 뿐이란 생각이 들어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생각. 내 인생도 모두의 인생처럼 뻔해지겠구나 싶은.” 그때 허무가 시대의 공기란걸 직감했다. 지난 주말 광장 한복판의 공허 속에서 조커의 텅 빈 웃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비로소 조커에 관해 써볼 수 있을까도 싶어졌다.
가까이에서 다시 본 조커는 너무 자명해서 너무 창백한 영화였다. 조커라는 인물을 이해하는데 시대적 배경 지식 따위는 거추장스러웠다. 아서 플렉의 깡마른 등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 멀리서 그의 등을 봤을 땐 자본주의의 누추한 뒷모습이라고 독해했었다. 두 번째 봤을 땐 평생을 외톨이로 살아온 한 남자의 불쌍한 등이 보일 뿐이었다. 지하철에서의 첫 번째 살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고액 연봉의 월스트리트 엘리트들이란 걸 아서가 알았을 리 없다. 자신의 우연한 살인이 필연적 응징으로 포장되는 꼴을 보면서 조커는 거대한 희극을 봤겠구나 싶었다. 조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애벌레에서 벗어나 나비처럼 조커로 변화하는 아서의 춤은 섬뜩하면서도 아름다웠다. 구원으로서의 사랑을 갈구하는 아서의 망상조차 처연했다. 셰익스피어 계단에서 펼쳐지는 조커의 마지막 춤은 한없이 경쾌해서 오히려 두려울 정도였다. 에필로그의 정신병원 소동극은 서글펐다. 가까이에서 다시 본 조커는 너무 비극이어서 너무 희극이었다. 아무도 조커를 가까이에서 보려고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아서의 인생 이야기를 누구도 가까이에서 들어주려 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보기에 따라 달리 보이는 그림들이 있다. 아줌마일수도 할머니일 수도 있고, 소녀일 수도 늑대일 수도 있고, 인디언일 수도 에스키모일 수도 있고, 사람 얼굴일 수도 칵테일 잔일 수도 있는 그림들이다. 보는 이의 정신이나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보일 수 있는 조크 같은 그림들이다. 조커도 그런 영화다. 멀리서 살펴보느냐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느냐에 따라 상반된 두 얼굴을 가진 영화다. 조커는 비극과 희극의 두 가지 표정을 모조리 갖고 있다.
어느 쪽 표정을 보느냐는 각자의 운명이다. 비판을 하느냐 지지를 하느냐도 각자의 신념이다. 논쟁을 하느냐 감상을 하느냐도 각자의 선택이다. 우리가 어느 쪽에 서 있든 정작 아서나 조커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에겐 모두가 정답이 필요 없는 농담들일 뿐이다. 아서는 조커가 황홀할 뿐이다. 두 얼굴의 조커야말로 우리 시대의 진정한 자화상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문득 그 생각을 하니, 슬픈 웃음이 나왔다. 조커처럼. 마치 조커라도 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