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택은 격차가 대량생산되는 사회의 표정을 짓고 있다.
영화 기생충에 관한 다수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리면 박사장네 가족이 돌아온다. 이렇게 비가 내리면 캠핑은 끝장이다. 박사장네가 돌아오면 김기택 가족도 끝장이다. 그런데도 기택네 가족은 참 한가롭다. 비가 내리는데도 박사장네 거실에서 술판을 벌이고 있다. 기택네 가족은 오랜만에 행복하다. 온 가족이 백수였다. 반지하방에서 옆집 와이파이를 훔쳐 쓰며 연명하던 기생 인생들이었다. 이번엔 와이파이 정도가 아니라 저택에 기생할 수 있게 됐다.
기택은 훌륭하게 학력 위조에 성공해서 박사장네 영어 가정교사가 된 아들 기우가 자랑스럽다. 덕분에 기택의 딸 기정까지 미술 가정교사로 들어올 수 있게 됐다. 착실한 윤 기사한테 누명을 씌워서 내쫓는 데 성공한 딸 기정이 자랑스럽다. 덕분에 기택이 박사장의 운전기사가 될 수 있었다. 기택 가족은 박사장의 아내 연교가 성실한 집사 국문광을 돌림병자로 오해해서 내쫓게 만드는 데까지 성공했다. 덕분에 기택의 아내 충숙이 새로운 가정부로 들어오게 됐다. 기택 가족은 자신들의 성공한 기생 인생을 자축한다.
문득 기택이 중얼거린다. “그런데 윤 기사는 잘 있겠지? 사지 멀쩡하니깐 윤 기사는 어디서든 먹고살 수 있을 거야. 그렇지?” 기묘한 이야기다. 사기를 쳐놓고선 연민까지 한다. 기택 가족은 사기와 연민이라는 두 가지 상반된 행위와 감정 사이의 모순을 느끼지 못한다. 인간적으론 안 됐지만 인간적으로 어쩔 수 없었다는 식이다. 자신들이 기생하는 박사장네 가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너무 잘 속아줘서 미안하지만 속은 건 그들 잘못이라는 식이다. 그때 벨소리가 울린다. 이럴 줄 알았다. 박사장네 가족인가.
기택 가족과 박사장 가족이 숨바꼭질을 벌이는 한바탕 소동극은 기생충의 백미다. 기생충은 거의 완벽한 영화다. 비와 함께 시작되는 이 시퀀스 하나만으로도 기생충은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고도 남는다. 봉준호 감독은 비를 통해 영화의 서스펜스를 조작한다. 서스펜스는 알프레드 히치콕이 즐겨 사용했던 영화적 장치다. 탁자 아래에 시한폭탄이 놓여있다. 주인공들은 그 사실을 모른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만 안다. 이때 관객이 느끼는 스릴감이 서스펜스다.
서스펜스에 예민한 관객이라면 주인공들을 위해 “탁자 아래 폭탄이 있다”고 소리라도 질러주도 싶을 지경이 된다. 실제로 어린이 관객들이 종종 보여주는 귀여운 관람 행위다. 서스펜스를 스릴러나 액션 장르에 주로 쓰인다. 봉준호 감독은 기생충에서 웃음의 서스펜스를 창조했다. 비가 내리면 박사장네가 돌아온다. 관객도 아는 사실을 천하태평인 기택 가족만 모른다. 여기에서 서스펜스가 시작된다.
그런데 익살스럽다. 기택 가족이 갑자기 돌아온 박사장네 가족을 인질로 잡는 식의 상식적 대결 구도로 전개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두 가족은 공간을 완벽하게 분점한다. 하나의 세계에서 공존하고 있지만 사실상 완벽하게 분리된 세계에서 병존하는 두 계층의 초상이다. 닿을 듯 닿지 않고 만날 듯 만나지 않고 들킬 듯 들키지 않는 슬램스틱 코미디들이 이어지면 어지간한 관객들은 실소할 수밖에 없다.
박사장 부부는 참 이중적이다. 겉으론 도덕적인 척 준엄하게 윤 기사를 쫓아냈지만 실제론 윤 기사를 문책할 자격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적나라한 욕망을 숨기고 있다.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드러내는 박사장 부부의 속내를 기택 가족과 관객이 빤히 듣게 된다. 분명 들키면 죽는 서스펜스 상황인데 다들 비굴한 웃음을 먼저 짓게 된다.
봉준호 감독은 기생충을 웃음의 서스펜스로 연출했다. 기생충은 꽤나 무거운 영화다. 계층 갈등이나 빈부 격차나 양극화 같은 진지한 대주제를 다룬다. 봉준호 감독은 관객들이 결코 맛있게 먹기 어려운 식재료를 부지불식 중에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상업적인 당의정을 입혔다. 그것이 웃음의 서스펜스다. 서스펜스로 관객들의 주의를 집중시키고 웃음으로 관객들의 감정을 이완시킨다. 봉준호 감독의 노련미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스릴러와 코미디라는 전통적인 영화 장르를 뒤섞어서 봉준호식으로 재창조했다는 점에서도 각별하다. 봉준호 월드라는 수식어가 나오는 이유다.
솔직히 기생충의 한바탕 소동극은 전형적인 파국으로 끝날 수도 있었다. 봉준호 감독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영화를 전개시킨다. 쫓겨났던 집사 국문광이 찾아온다. 알고 보니 국문광의 남편이 박사장네 지하벙커에 숨어 살고 있었다. 기생충은 기택 가족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기생충은 반지하에 사는 기택 가족과 지하에 사는 문광 부부의 대결 구도로 전개된다.
두 가족은 박사장네에 기생할 수 있는 권리를 놓고 죽고 살기로 싸움을 벌인다. 박사장네와 기택 가족의 대결로 이어질 줄 알았던 관객들은 허를 찔린 꼴이다. 부자와 가난한 자의 대결이 아니라 가난한 자와 더 가난한 자의 대결이라는 구도야말로 기생충의 가장 탁월한 지점이다.
봉준호 감독은 2013년 설국열차를 연출했다. 설국열차는 430억 원이나 들인 대작이었지만 기대만큼 흥행하지도 기대 이상으로 평가받지도 못했다. 지나치게 2차원적이었기 때문이다. 머리칸과 꼬리칸의 대결 구도는 자본주의가 빚어내는 필연적 양극화와 계층 갈등을 시각화한 것이었다. 꼬리칸의 혁명군이 한 칸 한 칸 전진할 때마다 자본주의 세계를 이루는 시스템들이 하나하나씩 영화화된다. 영원히 세계를 일주하는 기차를 자본주의 시스템의 축소판으로 만든다는 설정은 언뜻 상상했던 것보단 덜 매력적이었다.
꼬리칸과 머리칸의 공방전은 오직 2차원 직선 운동만 하는 기차처럼 단선적으로 펼쳐졌다. <설국열차>에서 송강호는 끊임없이 이렇게 중얼거린다. “앞칸으로 전진하는 게 답이 아니야. 이놈의 벽을 뚫고 옆으로 나가야 한다고.”
기생충에서 봉준호 감독은 설국열차의 한계를 완벽하게 극복한다. 정말 설국열차의 벽을 뚫고 뛰쳐나가버린다. 봉준호가 봉준호를 넘어서는 순간이다. 사실 봉준호 감독은 데뷔작 플란더스의 개부터 괴물을 거쳐 설국열차와 기생충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오직 한 가지 주제에 집요하게 천착해왔다고도 할 수 있다. 격차다. 인간 세상엔 왜 격차가 생기는가. 왜 격차가 있는 인간은 서로를 혐오하는가. 격차가 없는 세상을 만들 수는 없는가.
격차는 소득 격차일 수도 있고 빈부 격차일 수도 있고 계층 격차일 수도 있고 문화 격차일 수도 있다. 어떤 식으로든 같은 인간이 같은 인간을 차별하게 만드는 현실의 모순을 집요하게 파고들어왔다.
기생충은 철저하게 3차원적이다. 2차원적이고 수평적이었던 <설국열차>와 달리 계층 격차의 구도는 수직적이고 3차원적으로 전개된다. 소동극이 마무리된 뒤 기택 가족은 본래 자리인 반지하방으로 내려오고 또 내려온다. 카메라는 길고 긴 계단을 내려오는 기택 가족을 비추고 다시 수몰되기 직전인 반지하방을 보여준다. 결국 기택 가족은 집도 잃고 체육관에서 밤을 보낸다.
기생충이 입체적인 영화인 이유는 단지 수평적 대결 구도를 수직적으로 전환시켰기 때문은 아니다. 반지하의 기택 가족 앞에 지하의 문광 부부를 등장시키면서 기생충은 비로소 입체적이 된다. 비로소 현실이 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미 혁명이 불가능해진 곳이다. 우리가 매일 듣는 절규는 가진 자를 타도해야 한다는 못 가진 자들의 외침이 아니다. 못 가진 자들끼리 조금이라도 가져보겠다고 싸우는 아귀다툼의 비명소리다. 매일 같이 의자 뺏기 게임이 벌어진다.
조금만 예를 들어봐도 알 수 있다. 정년 연장 문제는 곧바로 청년 일자리 문제로 이어진다. 아버지의 직장을 지켜주면 아들이 실직자가 된다. 거의 모든 기업에서 벌어지고 있는 노노갈등은 결국 피고용자들끼리 일자리와 복지를 놓고 벌이는 싸움판이다. 설국열차의 세계가 이론적이고 이념적이었다면 기생충의 세계는 체험적이고 현실적이다. 봉준호는 그렇게 봉준호를 넘어선다.
기택 가족은 윤 기사한테 보였던 연민을 문광 부부한테도 똑같이 보여준다. 충숙과 기정은 지하에 가둬둔 문광 부부한테 음식을 갖다 주고 싶어 한다. 기우는 직접 지하실로 내려간다. 이번에도 기택 가족은 스스로의 모순을 깨닫지 못한다. 인간적으론 안 됐지만 인간적으로 어쩔 수 없었다며 스스로를 자기 합리화한다. 봉준호 감독이 의도한 모순이다. 결국 관객은 도대체 인간적이란 건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모순은 인간 세상의 본질이다. 인간이 모순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든 자본주의 역시 모순적인 시스템일 수밖에 없다. 모순적인 세상에서 제정신으로 살아가려면 한 가지 방법뿐이다. 모순 불감증이 돼야 한다. 박사장네에 기생할 권리를 놓고 다투지만 사실 양쪽 모두 아무런 권리가 없다는 모순을 잊어야 한다. 인간적으로 해서는 안 될 짓을 했으면서도 인간적 연민을 느껴줌으로써 인간이길 포기하지 않아야 하루하루 멀쩡하게 살아갈 수 있다.
기택 가족만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니다. 우리도 하루하루 그렇게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기생충>을 본 1000만 가까운 관객들이 극장 밖에서 매일 같이 살아가는 세상의 풍경이다. 기택 가족의 모순성은 고스란히 스크린을 넘어 객석까지 투사된다. 그래서 기생충의 한바탕 소동극은 결국 웃기고 슬프다. 웃프다.
기생충은 필연적으로 비극으로 끝난다. 지하에서 뛰쳐나온 문광의 남편은 백주대낮에 칼부림을 벌인다. 문광의 남편이 분노하는 대상은 기택 가족이다.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그는 죽이겠다고 달려든다. 못 가진 자와 더 못 가진 자의 대결은 늘 그렇게 자멸적이다. 그렇다고 분노의 화살을 박사장네 같은 부자들에게 돌릴 수도 없다. 사실 기생충에서 박사장네는 피해자일 뿐이다. 믿음의 벨트로 신뢰했던 기택 가족은 사실 사기꾼들이었다. 기택보다 더 더 믿고 의지했던 문광 역시 박사장네 몰래 지하에 비밀을 숨겨놓고 있었다. 박사장 부부는 이중적일지언정 타인한테 해를 끼친 적은 없다.
박사장네가 원하는 건 단 하나다. 선을 지키는 것이다. 계층이 계급이 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기 분수에 맞게 선만 지키면 박사장네 같은 부자들은 얼마든지 너그러워질 수 있다. 문제는 냄새다. 냄새는 결국 선을 넘을 수밖에 없는 인간적 존재감을 뜻한다. 서로 다른 계층인 우리들은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완전히 다른 세계를 살고 있다. 냄새는 서로 다른 세계가 같은 공간에서 뒤섞일 수밖에 없게 만든다. 그래서 냄새는 박사장네한텐 참을 수 없는 무엇이다. 사실 선은 인위적인 것이다. 선이 존재한다는 개념 자체가 체제의 산물이다. 그런데도 체제의 순응한 우리는 있지도 않은 선을 지키면서 살아간다. 냄새는 그런 모순을 드러낸다.
격차를 양산하고 극대화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은 이미 누군가를 증오해서 교정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분명 모순이 있고 문제가 있지만 누구의 탓도 아니며 누구의 탓을 할 수도 없다. 부자가 가난한 자를 착취하는 정도보다 가난한 자가 더 가난한 자를 착취하는 빈도가 더 하다. 혁명은 분노의 대상이 특정화될 때만 가능하다. 우리는 이제 누구를 향해 분노할지조차 모른다. 우리는 분노할 권리와 자격조차 상실했다. 그저 모순 불감증을 내면화한 채 기생하며 살아갈 뿐이다.
기생충은 우리 사회의 웃픈 초상이다.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장 알렉산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은 “기생충은 한국적인 이야기만이 아니라 전 지구적인 이야기”라고 했다. 그렇다면 기생충은 전 세계의 웃픈 초상이다. 문광의 남편은 박사장과 처음 마주치자 이렇게 말한다. “리스펙트.” 반면에 기택은 박사장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다. 기택이 왜 박사장을 죽였는지는 설명하기 어렵다.
봉준호 감독은 이것만큼은 의문부호로 남겨뒀다. 관객에게 질문을 던졌다. 기생충으로서 모순을 내면화한 문광의 남편과는 다른 선택이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기생충이 보고 나와서도 자꾸만 생각하고 묻게 되는 이유다. 극장에서 본 영화에 대한 질문처럼 보이지만 사실 극장 밖 현실에 대한 질문이다. 결코, 쉽게 떨쳐버릴 수 없는 긴 여운의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