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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프러리 Sep 28. 2024

셰릴 샌드버그의 순간1 : 죽음

셰릴 샌드버그 페이스북 COO는 그때 졸리다고 말했다. 

셰릴 샌드버그는 남편이 죽은 것이 자기 탓이라고 생각했다. 셰릴 샌드버그의 남편 데이브 샌드버그는 2015년 5월 1일 세상을 떠났다. 샌드버그 부부는 멕시코 푼타 미타의 리조트로 주말 여행을 떠났다. 샌드버그는 풀장에 누워 아이패드로 게임을 즐겼다. 셰릴 샌드버그는 남편 데이브 샌드버그에게 말했다. “졸려요.” 셰릴 샌드버그는 잠들었다.    

  

오후 3시 41분 무렵이었다. 1시간 쯤 자다 일어난 셰릴 샌드버그는 집에 남겨두고 온 아이들부터 챙겼다. 데이브 샌드버그와 셰릴 샌드버그의 아들은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아들과 통화한 셰릴 샌드버그는 비로소 남편이 너무 오래도록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셰릴 샌드버그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남편이 헬스장에 다녀오겠다고 말한 걸 떠올렸다. 셰릴 샌드버그는 헬스장으로 뛰어갔다. 남편 데이브 샌드버그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머리맡 바닥에는 피가 흘러 있었다. 서둘러 병원으로 옮겼다. 이미 숨이 끊어진 뒤였다.      


셰릴 샌드버그는 자신이 너무 늦게 발견한 탓에 남편이 죽었다고 믿었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자책했다. 데이브 샌드버그의 두개골이 골절됐고 피가 흥건했던 게 증거였다. 실제로도 많은 언론들이 페이스북의 COO이자 《린인》으로 여성 리더들의 우상이 된 셰릴 샌드버그의 남편이 “과다출혈로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사실이 아니었다. 데이브 샌드버그는 심장부정맥으로 돌연사했다. 셰릴 샌드버그가 남편을 일찍 발견했다고 해도 죽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셰릴 샌드버그는 미안해했다. 남편의 사망 원인이 심장마비에 의한 돌연사라는 사실을 알았어도 셰릴 샌드버그는 미안해하는 걸 멈추지 못했다. 남편의 심장 상태를 주기적으로 체크하지 않았던 자신을 자책했다. 남편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졸려요”라는 사실까지도 미안해했다.     



2015년은 페이스북의 최고운영책임자가 사실상 기능 정지 상태에 빠져버린 해였다. 셰린 샌드버그는 업무에 애써 복귀했지만 정상적으로 회의를 하는 건 불가능했다. 눈물을 터뜨렸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이때부터였다. 마크 저커버그와 셰릴 샌드버그의 관계는 뒤바뀌었다. 2007년 12월 댄 로젠스웨이그가 주최하는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서로를 처음 만난 이후 줄곧 셰릴 샌드버그는 마크 저커버그의 멘토였다. 당시 마크 저커버그는 스물 세 살이었다. 세릴 샌드버그는 서른 여덟 살이었다. 마크 저커버그는 2004년 2월 4일 페이스북을 창업한지 3년 정도 된 젊은 CEO였다. 셰릴 샌드버그는 구글에서 온라인 세일즈 부문 부사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사실 마크 저커버그한텐 셰릴 샌드버그 이전에도 멘토가 있었다. 냅스터 창업자 숀 파커였다. 마크 저커버그의 브로였던 숀 파커는 페이스북의 초대 CEO가 됐다. 정작 둘의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숀 파커는 셀럽이었고 마크 저커버그는 너드였다. CEO 숀 파커와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 사이에선 헤게모니 싸움이 벌어졌고 파국으로 이어졌다.      


숀 파커와의 실패는 마크 저커버그가 셰릴 샌드버그와의 관계를 정립하는데 반면교사가 됐다. 마크 저커버그와 셰릴 샌드버그는 처음부터 일종의 신사협정을 맺었다. 마크 저커버그는 CEO로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라는 프러덕트 개발에 집중한다. 셰릴 샌드버그는 COO로서 인사와 재무 그리고 대외홍보와 대관업무까지 회사 경영의 전반을 책임진다. 개발과 경영을 분리하는 탁월한 선택은 결국 셰릴 샌드버그가 소셜 광고 상품을 만들어서 페이스북을 광고 제국으로 재탄생시키는 대박으로 이어졌다.     

 

2023년 글로벌 디지털 광고 시장에서 메타의 시장점유율은 23%에 이른다. 26.5%인 구글에 이어 2위다. 구글과 메타 빅2가 전세계 디지털 광고 시장의 절반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 사실 구글의 검색 광고를 탄탄대로에 올려놓은 것도 셰릴 샌드버그 구글 검색 광고 담당 부회장이었다. 메타의 소셜 광고를 탄생시키고 키워낸 것도 셰릴 샌드버그 메타 최고운영책임자였다. 그렇게 셰릴 샌드버그는 디지털 광고의 어머니가 됐다.  


    

그렇지만 메타 안에서 셰릴 샌드버그는 그 무엇보다 마크 저커버그의 오피스 누나였다. 샌드버그는 메타에 몸 담은 14년 동안 언론으로부터 방 안의 어른이라고 불렸다. 애초에 페이스북은 마크 저커버그가 하버드 대학교 기숙사에서 뚝딱뚝딱 만든 서비스였다. 당초 목적도 불순하기 짝이 없었다. 페이스북이 소셜 미디어로서 레거시 미디어를 대체하기 시작하자 마크 저커버그에 대한 우려의 시선도 늘어났다. 마크 저커버그는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걸 미처 모르는 스파이더 키드였기 때문이다.      


셰릴 샌드버그는 페이스북에 소셜 광고라는 비즈니스 모델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페이스북을 제대로 된 기업 조직으로 재조직한 장본인이었다. 셰릴 샌드버그는 타고난 행정가였다. 1남2녀의 맏딸이었던 셰릴은 어릴 적부터 동생들과 조직적으로 놀았다. 셰릴의 여동생 미셸은 페이스북을 다룬 책 《페이스북 : 더 인사이더 스토리》에서 큰 언니는 자신들과 함께 놀았다기 보단 놀이를 조직하고 운영했다고 회상한다.     


페이스북 안에서도 저커버그에 대해서도 다르지 않았다. 무엇보다 둘 사이의 신사협정은 CEO와 COO의 위상을 수직적 상하관계가 아니라 수평적 상보관계로 만들어줬다. 마크 저커버그가 보스였지만 셰릴 샌드버그가 리더였다.      


2015년 5월 1일의 비극은 마크 저커버그와 셰릴 샌드버그의 관계까지도 뿌리 채 뒤흔들어놓았다. 둘 중에서 리드가 필요한 사람은 이제 마크 저커버그가 아니라 셰릴 샌드버그였다. 게다가 저커버그는 이미 서른 한 살이었다. 더 이상 크리스마스 파티장에서 만난 셰릴 샌드버그 앞에서 수줍음을 타던 스물 세 살의 하버드 중퇴생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마크 저커버그는 셰릴 샌드버그와 달리 전형적인 이과형 천재였다. 공감능력보단 연산능력이 탁월한 사람이었다. 페이스북이 광고 기업에서 기술 기업으로 거듭나고 싶다면 마크 저커버그의 역할이 확대될 필요가 있었다.    

  

마크 저커버그는 프리실라 챈과 2012년 5월 19일 결혼했다. 2012년 5월 18일 페이스북이 나스닥에 상장되고 하루가 지난 뒤였다. 덕분에 마크 저커버그는 아내로부터 페이스북의 스톡 옵션과 스톡 그랜트를 지킬 수 있게 됐다. 페이스북 상장으로 얻은 주식 재산은 결혼 기간 전에 취득한 것이 됐기 때문이다. 마크 저커버그는 MBTI는 INTJ로 알려져 있다.      


적어도 마크 저커버그는 셰릴 샌드버그처럼 반려자를 잃은 슬픔에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종류의 인간은 아니라는 뜻이다. 셰릴 샌드버그가 슬픔 속에서 한 없이 흔들리는 사이 마크 저커버그는 쉼 없이 셰릴 샌드버그 없는 페이스북을 지켰다. 이때부터였다. 더 이상 셰릴 샌드버그는 방 안의 유일한 어른이 아니었다. 마크 저커버그도 방 안에 있었다. 




온라인 인물 도서관 서비스 라이프러리의 인물 정보를 기반으로 작성됐습니다. 

인물을 읽다 인생을 알다 라이프러리 



크로스보더 테크미디어 더밀크에 연재했던 셰릴 샌드버그의 인물스토리입니다. 

라이프러리 오리지널 : 셰릴 샌드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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