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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프러리 Sep 28. 2024

셰릴 샌드버그의 순간2 : 퇴임

셰릴 샌드버그 페이스북 COO는 그때부터 문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2022년 6월 1일 갑작스럽게 발표된 셰릴 샌드버그의 퇴장은 거슬러 올라가면 2015년 5월 1일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뉴욕타임즈》의 칼럼리스트이자 2008년 금융위기를 다룬 책 《대마불사》의 저자로 유명한 앤드류 로스 소킨은 2022년 6월 2일자 모닝 칼럼을 통해 이렇게 썼다. “마크는 지난 5년 동안 한때는 페이스북이었고 지금은 메타인 회사를 어떻게 경영할지 초석을 다져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셰릴의 실질적인 퇴장은 좀 갑작스러워서 떠밀려 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수년에 걸쳐서 느리게 문 쪽으로 조금씩 걸어 나가고 있었다고 말하는 게 적절한 것이다.”      


셰릴 샌드버그가 페이스북 방 안의 유일한 어른이 아니게 된 시점부터 변화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마크 저커버그가 방 안의 새로운 어른으로 누나를 챙기기 시작하면서부터 페이스북의 책장은 조금씩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오히려 셰릴 샌드버그의 퇴장에서 진짜 예상 못한 부분은 따로 있다. 셰릴 샌드버그가 다음 자리를 보고 발을 뻗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셰릴 샌드버그는 전략적인 인물이다. 셰릴 샌드버그는 이제 방 안의 유일한 어른이 아니었지만 분명 방 안에서 가장 멀리 내다보는 인물이었다. 정작 샌드버그는 페이스북 퇴임 이후 “재단과 자선활동에만 전념하겠다”고 밝혔다.      


사실 이것도 2015년 5월 1일의 비극과 관련이 있다. 셰릴 샌드버그는 카머라 해리스가 될 수도 있었다. 2024년 대선에서 조 바이든 대신 도널드 트럼프와 한 판 뜨는 여성 후보가 될 수도 있었단 뜻이다.     

 

2015년 무렵만 해도 샌드버그는 2016년 대선 이전엔 워싱턴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만일 그랬었다면 2020년 대선에서 바이든 대통령의 옆자리엔 카머라 해리스 부통령 대신 셰릴 샌드버그 부통령이 서 있었을 수도 있었다. 2024년 11월 대선의 얼굴 역시 셰릴 샌드버그가 될 수도 있었다. 실제로 당시까지만 해도 상당수 실리콘밸리의 비즈니스 전략가들과 워싱턴의 정치 평론가들은 셰릴 샌드버그가 공직에 출마한다는 걸 상수로 놓고 있었다.      


2015년 5월 1일 데이브 골드버그의 갑작스러운 별세는 셰릴 샌드버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그때부터 샌드버그는 방 안의 코끼리와 싸워야만 했다. 셰릴 샌드버그는 《옵션B》에서 모두가 누군가의 슬픔을 직시하지 않고 외면하는 침묵 효과를 방 안의 코끼리라고 표현했다. 아무도 샌드버그에게 남편에 관해 묻지 않았다. 샌드버그 역시 누구와도 남편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모두가 코끼리가 있다는 걸 알지만 아무도 코끼리에 관해 꺼내놓고 이야기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2015년 5월 1일 이전까진 셰릴 샌드버그는 방 안의 코끼리가 아니라 선거판의 코끼리와 싸워야 하는 사람이었다. 1년 남짓 남은 2016년 대선에선 민주당의 당나귀와 공화당의 코끼리 사이에 대접전이 벌어질 게 분명했다. 2024년 대선에선 도널드 트럼프를 등에 태운 코끼리와 싸워야만 했다. 민주당 캠프엔 샌드버그 같은 최고운영책임자가 반드시 필요했다. 정작 셰릴 샌드버그는 코끼리는 생각하지도 말아야 하는 불행에 빠졌다.      


사실 셰릴 샌드버그이 페이스북을 떠나 워싱턴으로 이동할 기회는 이전에도 있었다. 셰릴 샌드버그는 2022년 6월 1일에 페이스북을 통해 발표한 입장문에서 “2008년 일을 처음 맡을 때에는 이 자리에 5년 정도 있을 줄 알았다”고 회고했다. 사실이다. 인생이 계획한 대로 흘러갔다면 말이다. 2012년 페이스북의 IPO가 무탈하게 마무리됐었다면 말이다.   

   

2012년 5월 18일의 페이스북 상장은 다음날 치러진 창업주 저커버그의 결혼식을 제외하면 재난 상황 그 자체였다. 페이스북 주가는 상장 일주일 만에 반토막이 났다. 페이스북 투자자들은 페이스북과 상장 주관사들에게 소송을 제기했다. 페이스북이 기업 공개 직전 저조한 모바일 광고 실적을 의도적으로 숨겼다고 주장했다.       

모두 결국엔 셰릴 샌드버그가 수습해야만 하는 아수라장이었다. 당시 마크 저커버그는 신부 프리실라 챈과 로마에서 신혼 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마크 저커버그는 페이스북 기업 공개로 세계 2위의 부자가 됐다. 셰릴 샌드버그는 페이스북에 적대적인 시장의 여론을 돌려세우는 데 주력했다.    


특히 인스타그램이 문제였다. 저커버그는 상장 직전인 2012년 4월 10일 10억 달러나 들여서 인스타그램을 인수했다. 주주들은 대부분의 M&A에 부정적이다. 회사의 현금을 소진하기 때문이다. 페이스북 주주들은 특히 페이스북의 인스타그램 인수에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2010년 탄생한 인스타그램은 출시 2년 만에 가입자 3000만 명을 넘어서고 있었지만 뚜렷한 수익 모델이 없었다. 상장 직전 해인 2011년 페이스북의 영업이익이 딱 10억 달러였다. 저커버그는 1년 치 영업이익을 몽땅 털어서 매출이 0원인 회사를 사들였던 것이다.    

  

물론 마크 저커버그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옳았다. 페이스북은 인스타그램을 인수한 덕분에 소셜 광고 시장에서 독점적 사업자가 될 수 있었다. 전체 디지털 광고 시장에서 구글을 턱 밑까지 추격할 수 있었다.     



정작 인스타그램을 페이스북 이상의 막강한 광고 미디어로 만든 건 마크 저커버그가 아니라 셰릴 샌드버그였다. 셰릴 샌드버그는 페이스북에서 그랬던 것처럼 다시 한번 인스타그램 광고 부서를 조직하고 인스타그램 광고 전략을 수립했다.      


그렇게 성과를 내면서 페이스북에 대한 투자자들의 의구심을 해소시켜 나가는 건 로마의 휴일을 즐기고 있는 마크 저커버그 CEO가 아니라 매일 새벽 5시에 눈을 떠서 페이스북 본사가 있는 먼로 파크로 출근하는 셰릴 샌드버그 COO의 몫이었다. 광고 비즈니스는 물레방앗간을 돌리는 것과 같다. 매일 물을 길어오지 않으면 방앗간을 돌아가지 않는다.   

   

인스타그램을 페이스북처럼 광고 방앗간으로 만들기 위해선 셰릴 샌드버그는 다시 한번 인스타그램에 올인해야만 했다. 페이스북을 돈 버는 회사로 재창업했던 것처럼 인스타그램도 사실상 재창업을 필요로 했다.      


사실 셰릴 샌드버그처럼 스타트업에 합류하는 시니어 임원은 IPO가 끝나면 회사를 떠나기 마련이다. 상장을 성공시키고 스톡옵션을 챙기는 것이 경제적 목표이기 때문이다. 이런 실리콘밸리의 전통에 따랐다면 셰릴 샌드버그 역시 2012년 전후로 회사를 떠날 일이었다. 상장 직후 샌드버그한테 주어진 스톡옵션과 보너스는 무려 3000만 달러에 달했다. 한화로는 399억 원이었다. 




온라인 인물 도서관 서비스 라이프러리의 인물 정보를 기반으로 작성됐습니다. 

인물을 읽다 인생을 알다 라이프러리 



크로스보더 테크미디어 더밀크에 연재했던 셰릴 샌드버그의 인물스토리입니다. 

라이프러리 오리지널 : 셰릴 샌드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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