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릴 샌드버그 페이스북 COO는 그때 여성 대통령을 꿈꿨다.
셰릴 샌드버그는 페이스북을 떠나지 않았다. 대신 마크 저커버그로부터 터뜨린 인스타그램 기업화라는 새로운 숙제에 몰두했다. 동시에 페이스북 최초 여성 이사회 임원이라는 당근도 받았다.
당시 페이스북 이사회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은 피터 티엘이었다. 저서 《제로투원》으로 유명한 페이팔의 창업자다. 피터 티엘은 페이스북이 아직 페이스북닷컴이던 2004년 마크 저커버그한테 50만 달러를 투자했다. 외부적으론 마크 저커버그의 멘토는 큰 누나 셰릴 샌드버그로 비춰졌지만 실제로 마크 저커버그한테 가장 큰 영향을 미쳐온 멘토는 피터 티엘이었다.
피터 티엘의 경영 철학은 단순하다. “경쟁이 아닌 독점을 하라.” 마크 저커버그가 페이스북을 밀어내고 급부상하는 인스타그램을 파격적인 금액으로 사버린 건 피터 티엘의 경영 철학을 실천한 결과였다. 미래의 경쟁자인 인스타그램을 사버려서 시장을 독점하기 위해서였다. 결국엔 리나 칸 연방거래위원회 위원장과 마찰을 빚게 되는 저커버그의 독점적 사고 방식은 2005년부터 페이스북 이사회에서 17년 동안이나 활동했던 피터 티엘한테서 기인한 바가 크다.
게다가 저커버그는 CEO 뿐만 아니라 이사회 의장까지 겸임하고 있다. 대통령과 국회의장을 겸임하는 것과 같다. 아무리 샌드버그가 노련한 경영자라고 해도 페이스북 안에서 마크 저커버그를 견제할 자는 사실 없다. 결국 이사회에서 셰릴 샌드버그의 영향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셰릴 샌드버그는 근명성실한 실용주의자답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몰두했다. 인스타그램을 두 번째 페이스북으로 만드는 일 말이었다. 결과적으론 마크 저커버그를 더 부자로 만들어주는 일이었다. 소셜 네트워트 시장의 독점적 지배자로 만들어주는 일이었다.
샌드버그는 이 임무를 충실하게 해냈다. 인스타그램은 비쥬얼 소셜 광고에 최적화된 미디어로 재탄생했다. 어떤 면에선 페이스북보다도 파괴력이 더 컸다. 셰릴 샌드버그는 구글 광고의 기획자로서 구글 검색 광고의 장단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구글 검색 광고는 소비자의 검색어를 기반으로 광고를 보여준다. 유저가 여행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하면 구글은 여행 관련한 광고를 보여주는 식이다. 여행에 관심이 있든 없는 가리지 않고 무작위로 광고를 보여주는 TV광고보다 훨씬 효과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때 유저는 구글이 자신의 의도를 읽고 타켓 광고를 보여준다는 사실을 의식할 수 있다. 다름 아닌 유저 자신이 검색키워드를 입력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페이스북의 광고는 무의식적이다. 유저가 올린 포스팅의 내용과 좋아요를 이용해서 광고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최근에 여행을 간 친구들의 포스팅에 좋아요를 누른 유저에게 여행 광고를 보여주는 식이다. 무의식적인 행위에 숨겨진 무의식적인 욕망을 자극하는 것이다.
비쥬얼 중심인 인스타그램의 파괴력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텍스트 정보에 비해 이미지 정보나 영상 정보는 유저에게 훨씬 무의식적이고 무비판적인 영향을 끼친다. 마크 저커버그도 셰릴 샌드버그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마크 저커버그는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이 유저의 무의식에 더 깊이 파고들도록 알고리즘을 설계했다. 셰릴 샌드버그는 마크 저커버그의 알고리즘으로 광고주가 소비자의 무의식에 더 깊이 파고들 수 있도록 만들었다.
저커버그와 샌드버그는 자신들이 만든 광고 기법을 소비자 참여형 광고라고 이름 붙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참여형 광고라는 네이밍과 달리 소비자 스스로는 자신이 광고에 참여했다는 사실 자체를 의식하지 못하는 광고였다.
셰릴 샌드버그가 페이스북을 기업화하는 데는 3년이 걸렸다. 그렇다면 인스타그램을 상업화하는데는 3년만큼은 걸리지 않을 터였다. 2015년 즈음이면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의 광고화는 완성된다는 계산이었다.
셰릴 샌드버그는 페이스북을 기업화하고 광고 비즈니스를 안정화시킨 이후부턴 페이스북 특유의 기업 문화를 바꾸기 시작했다. 남성 엔지니어 중심의 브로 문화에서 젠더 다양성이 균형을 이룬 분위기로 탈바꿈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건 공직에 있을 때부터 셰릴 샌드버그가 늘 관심을 기울여온 분야였다.
피터 티엘과 같은 자유지상주의자와 마크 저커버그 같은 기술지상주의자 사이에서 셰릴 샌드버그는 페이스북 조직의 균형추와 같은 존재였다. 2012년 《타임》은 셰릴 샌드버그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으로 뽑았다. 셰릴 샌드버그가 구글에 있을 때도 클린턴 행정부 시절 래리 서머스 재무부 장관의 비서실장으로 일할 때도 누리지 못한 명성이었다.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는 셰릴 샌드버그를 가르켜 “미래의 유력한 여성 대통령 후보”라고 지칭다. 2013년 셰릴 샌드버그는 여성 리더십에 관한 베스트셀러 《린인》을 썼다. 셰릴 샌드버그는 여성들이 기회를 향해 “적극적으로 달려들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워싱턴과 실리콘밸리에선 인스타그램을 성공시킨 다음 셰릴 샌드버그가 오바마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는 2016년 대선에서 민주당 경선에 출마할 거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셰릴 샌드버그가 대통령이라는 기회를 향해 린인할 거란 얘기였다.
2015년 6월 시장조사업체 이마케터는 2015년 말이 되면 인스타그램이 5억9500만 달러의 광고 수익을 벌어들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2012년 인수 당시만 해도 수익이 제로였던 인스타그램을 그야말로 제로투대박으로 이끈 것이었다. 셰릴 샌드버그는 성공했다. 그렇지만 셰릴 샌드버그는 자신이 거둔 성공을 만끽할 수 없었다. 2015년 5월 1일 이후 셰릴 샌드버그의 삶은 달라졌다. 셰릴 샌드버그는 미안하다고만 말했다.
온라인 인물 도서관 서비스 라이프러리의 인물 정보를 기반으로 작성됐습니다.
크로스보더 테크미디어 더밀크에 연재했던 셰릴 샌드버그의 인물스토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