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보다 구유가 놓이는 나라
이탈리아에서 맞는 두 번째 크리스마스입니다. 두 번째가 되니 더 많이 느끼게 됩니다. 크리스마스라고 파티하고 여행 가면서 연말 분위기 내는 그런 날이 전혀 아니라는 것을요. 이탈리아에서는 크리스마스를 오랫동안 이어져온 전통의 방식으로 보냅니다. 특히나 제가 사는 이탈리아 북부는 이 시기에 조용하고 정돈된 느낌까지도 듭니다. 상점과 레스토랑들도 문을 닫고 따뜻한 조도의 가로 등만 남는 시기입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땐 이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아 썰렁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이날은 집 밖을 나가기보단 집 안으로 들어오는 시기이고, 새로움을 더하기보다 오래된 방식을 반복하는 날에 가깝다는 것을 알아서 저도 집 안에서 조용히 가족과 보내게 되네요.
또 다른 점은 이탈리아 집에는 크리스마스트리보다도 예수의 탄생 장면을 재현한 구유 장식, 프레세페(Presepe, Nativity scene)를 더 많이 보게 됩니다. 한국에서는 성당에서만 보았던 것인데 이곳 이탈리아에서는 학교 앞에도 구유 장식을 해 놓고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크리스마스는 '기념일'이 아니라, 이 구유 장식을 보면서 예수의 탄생을 '다시 보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말씀 위주의 개신교 국가권은 트리를 많이 하고 이탈리아와 같이 천주교 국가권은 이 구유를 장식하면서 육화(incarnazione, incarnation), 탄생, 인간의 삶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제가 예전에 미국에 살 때도 구유는 일반 가정에서 많이 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아기 예수 탄생은 허름한 마구간에서 아기 예수가 탄생하고 동방박사가 와서 축하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탈리아의 구유는 그 배경을 좀 더 넓게 생각해서 표현한다는 것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그 한 장면이 아니라 그 탄생을 둘러싼 세계 전체를 상상했다는 것이 이탈리아의 구유의 핵심입니다. 국민 대다수가 가톨릭 신자인 폴란드에서 온 제 친구네 집에서 본 구유가 이 모든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구유 장식을 보니 이탈리아의 크리스마스 전통이 좀 더 이해가 됩니다.
'신은 어디에서 태어났는가?' 를 생각했던 사람들.
그 답은,
사람들이 사는 한복판에서 Bambin Gesù 가 태어나셨다.
아기의 남성형인 bambino가 아닌 bambin. 노래나 기도, 이야기 속의 호칭으로 '아기 예수야'라고 부르는 뉘앙스입니다. 저 높은데 계시는 전지 전능한 신이 아닌, 작고 연약하고 보호받아야 할 무력한 아기로 표현했습니다. 춥고 허름한 곳에서 신이 인간이 되었고 그렇다면 인간의 삶은 하찮지 않다는 것. 그래서 저 구유 장식에서 보듯이 아무것도 모르고 살고 있던 인간들의 일상, 노동, 가족, 기다림 등이 모두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기념일로 새롭고 화려한 장소에서 흥을 내기보다, 일상을 열심히 살아온 우리의 삶에 의미를 얻는 날이라고 생각하고 가족들과 항상 먹는 식탁에서 촛불을 켜고 식사를 하고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눈에 띄지 않았을지라도,
우리들의 일 년은 지나왔네요.
이탈리아에서 조용한 축하를 보내요.
잘 해냈다고 말해드리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