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가 있다. 조급함이 없다.

by 읽쓰생정

1.

그는 여유가 있다. 비록 나이는 나보다 어릴지라도 사람을 대하거나 세상을 대하는 모습이 나보다 점잖았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점잔 빼는 그런 모습이 아니라, 타고난 심성이 잔잔하다. 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대학시절이었는데, 말은 없지만 유머감각 있고 주변 사람들이 내색은 안 하지만 그를 많이 좋아하고 있는... 조용한 인싸였다. 우연히 전공수업에서 그와 조별과제를 함께 하게 되었는데 그때 나는 그것이 그와 친해질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여겨 부단히도 노력했다. 왜 사람들이 그렇게 그를 좋아하는지 궁금했으니까.


2.

조별과제 모임이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되고. 과제 모임이 스터디 모임이 되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며 그와 가까워졌다. 사실 내가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몇 번의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도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왜 그렇게 마음이 편했을까. 그와 나누는 대화는 왜 어색한 겉치레가 없었을까를 생각해 보면 그가 풍기는 여유로운 모습이 한몫했다. 나를 윗사람으로 대하지만 오히려 그가 나보다 더 어른이었다. 나와 가장 큰 차이점은 고민의 빈도와 강도라 할 수 있는데, 내가 사소한 것에 몰두하여 고민하고 걱정하고 있을 때면 그는 "뭐 잘 되겠죠, 잘 해왔으니까"와 같은 짧은 말로 나를 위로했다.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겉치레라 생각하고 기억도 안 나겠지만,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이 느껴져 위로가 되었다. 그의 말과 행동에는 나이답지 않은 여유가 묻어났다.


3.

고민을 깊이 하되, 오래 가져가지 않는다. 어려운 순간에도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하여 괜한 마음 쓰지 않는다. 예측할 수 없고 결정할 수 없는 미래의 상황을 미리 가져와 걱정하지 않는다. 그가 가진 여유의 힘이다. 너무나 상냥하고 차분한 말투지만 그 안에 단호함이 있다. 생글생글 웃지만 그 눈에 힘이 있고 총기가 있다. 그러한 여유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물어볼 때면, 그는 본인은 여유로운 것이 아니라 별생각 없이 사는 것이라 말하곤 한다. 전기 방충망에 뛰어드는 날벌레 마냥 정신없는 마음을 가진 나로서는, 그 모습을 꼭 닮고 싶었던 나로서는 답답하기 짝이 없는 답변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의 여유는 '자신의 삶에 대한 확신'에서 나오는 듯싶다. 자존감과는 약간 다른데, '나는 항상 맞아, 옳아!' 이런 느낌보다는,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순간, 최선을 다해 살고 있어'라는 마음가짐이라 할 수 있겠다. 내가 바라본 그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즉각적으로 해결하지 못할지라도 회피하지 않았다. 모른 척하고 넘기지 않았다. 어떻게든 그 문제와 상황을 직면하려 했다. 나중에 자신이 한 결정을 후회하거나 아쉬워할지라도 그 순간 정말 최선을 다해 고민하고 그 순간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무수한 인생갈래를 선택해야 하는 삶에서 최고 또는 최악의 선택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그의 선택들이 쌓이고 쌓여 그런 여유를 만든 것은 아닌지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사람의 성격은 일정 부분 타고 나는 부분이 있기에, 그의 선한 심성도 물론 영향이 있겠지만 그의 삶에 대한 태도가 여유를 만들어 낸 것은 아닐까.



4.

그와는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가끔 연락한다. 여전하다. 사람이 차분하고 진중하며, 어떤 순간에도 그 만이 내뿜는 여유가 있다. 분명 그도 여러 힘든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나이가 들어가며 선택의 무게는 제곱으로 무거워지니까). 내가 그의 사정을 속속들이 다 아는 것은 아니기에 그 안에 어떤 거센 풍랑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강인한 여유 안에서 잘 헤쳐 나왔을 것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그러니 그런 미소를 지을 수 있겠지!


그가 이전과 달라진 점을 굳이 하나 꼽자면, 이전보다는 조금 더 능글맞다. 사회생활을 많이 해서인지, 결혼을 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오히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보다 장난꾸러기가 되었다. 그런 모습도 좋더라. 이전보다 조금 더 마음 편히 사는 건가 싶어서.


혹여 인생이 주는 숙제가 너무 무거워 그가 힘들어하는 순가이 온다면, 나 또한 그가 나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그의 마음을 위로해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가만히 옆에 앉아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마주 앉아 몇 마디 위로 해주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숨통을 틔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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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리즈는 제가 너무나 닮고 싶은 사람들의 모습을 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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