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싶은 나의 옛 친구

<<위로가 필요한 당신에게>>

by 감성닥터


태풍이 지나간 한여름 저녁노을이 얼마나 장관인지, 말로 다 전할 수 있을까요. 그 붉고 짙은 하늘 아래, 나는 오래전 한 친구를 떠올립니다. 얼굴만큼이나 마음도 곱던 그 아이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언제나 조용히 내 곁에 머물렀습니다.

그날도 서쪽 하늘은 눈부시게 물들고 있었습니다. 해가 천천히 내려앉으며 불꽃처럼 퍼지는 노을빛은 세상의 끝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게 했지요.

같은 동네에 살던 친구가, 여동생의 손을 잡고 내 집으로 왔습니다. 볼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눈빛은 어딘가 들떠 있었어요. 마치 여름 노을이 처음인 듯, 마냥 신기하고 설레는 표정이었습니다. 그 아이는 그 황홀한 하늘을 나와 함께 보고 싶었던 거였지요. 말없이 우리는 서쪽 하늘을 향해 나란히 섰습니다. 붉게 물든 하늘이 천천히 어둠 속으로 가라앉을 때까지, 우리는 손을 꼭 잡고 서 있었습니다. 온 하늘을, 온 우주를 가슴으로 맞이하는 벅찬 감동이었습니다. 어떤 말도, 설명도 필요하지 않았던 순간. 그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요. 그때 우리는 몰랐습니다. 그 순간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걸. 세월은 앞만 보고 흘러가고 멈출 줄 몰랐습니다. 이제는 그 시절의 우리보다 더 큰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된 우리들은 다시 만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여름 저녁, 노을을 바라보던 우리의 모습은 지금도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되새겨집니다. 사라졌지만 잊히지 않는, 가장 조용하고 찬란했던 순간으로 말이지요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여름밤, 하늘은 맑고 깊은 푸른빛을 머금고 있습니다. 낮의 뜨거운 태양은 이미 지평선 너머로 자취를 감췄지만, 하늘 한가운데를 유영하는 하얀 구름들이 그 여운을 담담히 전하고 있습니다. 바람은 이제 고요하고 얌전하여, 구름조차도 조심스레 흘러갑니다.

어릴 적 내가 살던 집은 앞마당에 사계절 꽃을 피우던 화분들이 즐비했고, 장독대에는 엄마가 손수 담근 된장, 고추장이 익어가던 연둣빛 기와지붕이 있는 작은 한옥이었습니다. 그 집에서 나의 온전한 쉼은, 가장 높은 곳, 옥상에서 시작되곤 했습니다. 옥상에는 넓게 펼쳐진 기와지붕이 있고, 그 앞에는 나무로 만든 평상이 하나 놓여 있었지요. 나는 그 자리에 앉아, 집 앞으로 막힘없이 펼쳐지는 들판의 끝자락으로 연결되는 앞산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습니다. 어릴 적 나는 옥상 위의 기와지붕은 단순한 집의 구조물이 아니라, 우리 가족을 지켜주는 수호신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기와는 뜨거운 태양도 넘치는 빗물도 막아서 우리 가족을 지켜주었으니까요. 연둣빛 기와 하나하나에 햇살과 바람, 시간의 흔적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평상마루에 앉아 있으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따뜻한 품에 안긴 기분이 들었습니다. 낮 동안 집 앞 빈터를 어지럽히던 염소들의 울음소리도 해가 지면 이내 잠잠해지고, 바람은 다정한 손길처럼 내 뺨을 스치며 지나갔습니다.

여름 밤하늘은 점차 짙푸른 비단으로 물들고, 그 위로 초저녁 달과 별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냅니다. 밤이 깊지 않은 그 시간, 별들은 마치 나를 마중하러 나온 어린 친구들 같았습니다. 나는 이름도 모르는 별들과 밤늦도록 속삭이듯 이야기를 나누곤 했습니다. 가끔은 멀리 떨어져 반짝이던 견우성과 직녀성을 바라보며, 언젠가 내게도 찾아올 사랑의 이야기를 상상해 보기도 했지요. 그 순수한 상상은 소리 없이 반짝이는 별빛 사이로 스며들었고, 마음은 어느새 밤늦도록 아득한 꿈길을 걸었습니다.


밤이 깊어갈수록 은하수는 점점 더 찬란하게 빛납니다. 나는 그 별들의 강을 따라, 소리 없이 펼쳐지는 우주의 품 안으로 빠져들곤 했지요. 그 순간만큼은 세상도, 시간도, 어른이 되는 두려움조차도 잊곤 했습니다 하늘은 끝없이 펼쳐진 나만의 세계였고, 나는 그 속을 함께 떠도는 작은 별 하나였지요.

그즈음, 사춘기 소녀였던 나의 마음에 오래도록 남아 있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의 이름은 다소 특이하였습니다. 이름에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친구의 부모님이 그 당시로선 좀처럼 보기 드물었던 감각과 시선을 지닌 분들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친구는 독특한 이름 때문에 늘 억울하게 선생님으로부터 이름을 불리곤 했습니다. 선생님이 출석부를 무작위로 넘기다 이름을 부를 때면, 어김없이 그녀가 지목되었습니다. 이름을 둘러싼 줄다리기는 우리 반의 익숙한 풍경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장난처럼 그녀의 이름을 불렀고, 그녀는 마치 자신의 이름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듯, 단단한 눈빛으로 맞서며, 얼굴이 상기되며 자리에서 일어서곤 했습니다. 그 모습은 조용한 전투였고, 그럴수록 그녀는 더욱 단단해졌습니다, 그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녀를 특별하게 빛내는 깃발처럼 느껴졌습니다. 어릴 적 우리는 그것을 장난으로 여겼지만, 이제 와 돌아보면, 그녀는 누구보다도 자신의 존재를 지키는 법을 잘 알고 있었던 소녀였습니다.

그 시절, 우리들의 유일한 가십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연애 소설이었습니다. 밤이 깊어갈수록 성우의 멋진 목소리는 점점 더 서정적으로 낮아지고, 그에 따라 이야기는 꿈결처럼 펼쳐졌습니다. 달빛보다 부드러운 톤으로 이어지는 로맨스는, 사춘기 소녀들의 감수성을 끝없이 자극했고, 우리의 상상은 라디오 전파를 따라 한없이 부풀어 나갔습니다.

우리는 그 밤의 이야기 속 주인공이 되어 보기도 하고, 어떤 날은 주인공을 사랑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교복을 입고 교실에 모이면 어김없이 전날 밤의 연애 스토리로 수다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장면을 덧붙이고, 대사를 바꾸고, 결말을 다시 쓰며 우리만의 로맨스를 키워갔습니다. 마치 현실보다 더 확실한 세계가 그 라디오 속에 존재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때 우리 마음속에 이상형처럼 자리했던 연인역의 성우분은 이제 이 세상에 계시지 않습니다. 언젠가 조용히 떠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마치 오래된 꿈 한 조각이 사라진 듯한 허전함이 찾아왔습니다.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7월의 밤하늘 아래 있습니다. 달빛은 예전처럼 옥상 평상을 비추고, 바람은 변함없이 다정한 손길로 볼을 스치고 있습니다. 세상은 많이 달라졌지만, 그 감정은 여전합니다.

그래서 문득, 하늘을 향해 마음을 속삭여봅니다.

“라라야, 오늘따라 네가 참 보고 싶구나.

잘 지내고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