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fetrajectory Nov 11. 2024

입시의 기억

갑자기 떠오른 대학 입시의 기억

 대학 입시 면접 컨설팅을 하고 있어서 다양한 학생의 생활기록부를 읽고 있다. 아이들에게 연민을 느끼기도 하고, 그들의 이야기에서 흥미로운 것이 보이기도 한다. 이들을 보면서 나의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게 된다. 사실 이들보다 내 생활기록부가 훨씬 볼 것이 없다. 하지만 나는 학업성취도가 뛰어난 편이었다. 왜냐하면 수준이 높은 고등학교에 다녔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고등학교에서 중간 정도밖에 하지 못하는 학생이었다. 자존심이 강한 나는 그것을 순순히 인정하지 못했다. 나는 무언가 뛰어난 구석이 있는 사람이라고 믿었고, 그래서 언제나 약간 오만하게 행동했다. 콧대 높은 집단에 속한 것이 나를 망쳐놓는데 불을 지폈을지 모른다.


고등학교 시절 성적보다 나에게 중요한 일은 집안의 불화였다. 내 고등학교 시절 절정에 달한 집안불화는 9년도 넘게 지난 이제야 꺼져가고 있다. 나는 그것을 극복할만한 방법을 당시에 알지 못했다. 내 감정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생각으로서 받아들일 방법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고등학생이 집안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기껏해야 묵언으로 항의하거나, 속으로 모욕을 쏟아내는 수 밖에는 없었다. 집안이 너무 답답하여 자주 산책을 빌미로 집을 탈출했는데, 결국 잠을 자려면 지옥 같은 집에 돌아가는 수 밖에는 없었다.


고3시절 한 번은 방 안에서 수행을 시도했다. 매번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고 팔자 좋게 컴퓨터로 다른 짓만 하는 내가 싫었고, 내 삶의 방식을 탈출할 수 없다는 생각에 가득 차 몸부림치다가 선택한 하나의 수였다. 나는 진심으로 나아지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봤던 자기 초월의 겉모습을 따라 해 본 것이다. <등신불>이라는 문학 작품을 고1쯤 읽고 강렬히 기억에 남았다. 수행과 분신을 통한 자기 초월이라는 강렬한 이미지가 나를 사로잡았다. 어쩌면 나는 어떤 의미에서 죽음을 원했을지도 모른다. 그 이미지에 사로잡혀 나는 그냥 지옥 같은 방 안에 앉았고, 계속해서 앉아있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몇 시간도 가지 못해 잠에 들고, 몸이 근질거려 수행을 포기하고 말았다. 나는 짧디 짧은 수행 중에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나 자신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자기 학대에 가까운 생각을 키워가기 시작했다. 모든 실패는 나의 책임이요, 나는 죄인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내게 주어진 불안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훨씬 열심히 해야만 한다는 것이 논리적 귀결인데도, 집중하지 못했다. 그리고 나의 이런 상황을 진정으로 이해해 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결국 나를 끝까지 지지해 줄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은 가족인데, 이 가족이야 말로 나의 고등학교 입시 성공을 자신의 구원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구원자가 되지 못했다.


고등학교 시절 뛰어난 사람들이 있었다. 천재적인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나로서는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만 했다. 그래야 나 자신을 구원할 수 있고, 가족을 구원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전혀 알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천재가 되는데도 실패했고, 그것을 받아들여야 했고, 내가 구원자가 아니라 죄인임을 받아들여야 했다.


집에서 최대한 멀리 대학을 간 것은 바로 그런 이유였다. 다들 서울에 가려는 분위기에 나는 훌쩍 떠나버렸다. 당연히 부모님은 지방에 가는 것을 반대하셨고, 나는 적어도 이 선택은 내가 알아서 하게 놔두라고 역정을 냈다. 부모님이 나를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생애 첫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며, 부모님과 절연하고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리고 나는 정말 홀로 지방으로 떠나버렸다.


그러나 만족할 수가 없었다. 내 오만함이 너무 깊이 쌓여 벗어날 수가 없었다. 대학에서 만난 흥미로운 사람들이 있었지만, 나는 내가 이런 곳에 있을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이 너무 쉽게 느껴졌고, 선배들은 한심하게 느껴졌다. 홀로 물리학을 공부하는 것은 재미가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 성격에 안 맞게 너무 활발하게 사람들과 관계를 맺은 결과인가, 성인이 되었는데 사람들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을 수가 없게 되었다.


지금 보면 나는 어릴 적부터 부끄러움이 많고 자신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나에 대한 부모님의 기대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절대로 실패해서는 안되고, 실패하더라도 실패를 받아들일 수 없는 태도를 부모님께 배웠다. 나의 생존 전략이었다. 아이는 가정에 적응하게 되어있다. 가정을 벗어나 친구들 사이에서 독특한 성격을 키워나가려 시도했다. 하지만 대체로 많은 교우관계는 실패했고, 몇몇 관계만이 남아 겨우 지금에야 찾게 된 깨달음의 빛을 희미하게 발하고 있는 것이다.


지방으로 훌쩍 떠나버린지 한 학기만에 나는 부모님의 곁으로 다시 돌아왔다. 다시 한번 구원자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이제 나를 그들의 구원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나는 이미 추락한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나에게는 두 살 터울의 동생이 있는데, 동생이 시선을 좀 돌려주었다. 다시, 이번엔 문과로 수능을 보았지만 잘 해내지 못했다. 나는 천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자기 통제도 여전히 잘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것은 하나의 진전이었는데, 부모님과 절연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부모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차라리 부모님에게 의지하고, 꼬일 대로 꼬여버린 가족관계를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것이 낫다. 부모님이 나의 실패 이후로 많은 것을 포기하셨는지, 오히려 관계는 나아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앞이 안 보이고, 집안에 있으면 숨이 막혔지만 전보다는 덜했다. 그렇게, 겨우 살 수 있을 정도의 숨통만 트인 채로 수년을 살아갔다.


나는 모종의 이유로 다시 집을 떠나 부산으로 내려갔다. 이제 몇 살을 더 먹어 나는 부산에서 정말 혼자 살아갈 줄 알게 되었다. 물리학에서 최상의 성적을 거두고, 의미 있는 관계를 몇 더 얻을 만큼은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내 구원자가 되겠다는 꿈은 사라지지 않았다. 내가 억지로 짊어지려고 안달인 짐도 내려놓지 못했다. 겉으로는 살아가는 듯했으나, 나는 깨달음에 전혀 다가가지 못했다. 그렇게 어리석은 상태로 나는 대학생의 탈을 벗어던지게 되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