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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을 간직한 거리

동행자와의 여행에서 찾은, 나만의 비밀

by 세니seny

첫 번째 회사를 호기롭게 그만두고 처음 떠난 여행은 바로 호주였다. 나는 12월에 퇴사를 했고 그 이후로 여행을 가야 했는데, 가고 싶은 곳들은 대부분 겨울 날씨였다. 그런데 남반구는 계절이 반대라는 새삼스럽고 아주 당연한 사실을 잊고 지내다 어디선가 '호주는 우리나라랑 계절이 반대예요'라는 걸 주워듣고는 '추운 한국을 떠나 따뜻한 남쪽 나라로 가겠어!'라고 결심하게 되었다.


해외 자유여행, 그것도 혼자 가는 건 처음이었기에 숙소 예약, 비행기 예약 등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겁도 많았던 나는 여행사를 통해 에어텔 상품을 예약하기로 했다. 혼자 갈 생각이었지만 마침 비슷한 시기에 퇴사를 한 친구가 있어 혹시나 여행 갈 생각이 있냐고 물어보았다. 친구는 딱히 호주가 가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자기 혼자 여행은 못 가는 성격이고 퇴사하고 시간도 있는데 마침 내가 간다고 하니 겸사겸사 이 여행에 합류하게 되었다.






따뜻한 남쪽나라를 찾아왔는데, 따뜻하다 못해 한여름이라 더워 죽겠는 호주 여행도 어느새 중반부에 다다랐을 때였다. 많은 사람들이 호주의 수도로 알고 있을 만큼 널리 알려져 있고 크기로만 따졌을 때 호주의 제1도시라고도 할 수 있는 시드니를 만족스럽게 여행한 후, 두 번째 도시인 멜버른으로 넘어왔다. 시드니에서 만난 여행자들이 한결같이 ‘시드니보다 멜버른이 나아요’라며 멜버른에 대해 좋은 말만 해주었기에 더더욱 두 번째 도시를 기대했다. 하지만 기대하면 실망하는 법이라는 게 맞는 건지, 아니면 여행 중반부에 접어들면서 이렇게 길게 이 친구와 여행을 처음 해봐서 그런 건지 나와 친구 사이에서 약간 삐그덕거리는 느낌이 시작되었다.


시드니의 날씨는 낮에 살짝 더웠지만 대체적으로 돌아다니기 좋은 정도였다. 멜버른은 시드니에서 고작 1시간여 비행기를 타고 내려왔을 뿐인데, 그만큼 남극에 더 가까워졌는지 해가 길고 날이 선선했다. 아니, 선선하다 못해 조금 쌀쌀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우리는 호주의 날씨가 아주 더울 것으로만 생각하고 한여름에 어울릴 옷들을 주로 챙겨 왔기 때문에 더 그렇게 느꼈다. 게다가 친구는 멜버른에 도착하고 나서부터 속이 좋질 않다고 했다. 다행히 그에 대비해서 약을 가져오긴 했지만 아무래도 기분도 가라앉았고 그에 따라 여행을 즐겁게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날씨도 생각보다 쌀쌀하고 친구의 몸 상태도 별로고 해서 하루는 관광을 일찍 접고 숙소로 돌아왔다. 오후 다섯 시 정도밖에 안 된 시각이었지만 1월의 멜버른에서는 저녁 아홉 시쯤은 되어야 해가 지고 어둑해졌기 때문에 다섯 시는 우리나라의 오후 두, 세시 정도의 한낮 느낌이었다. 친구가 아픈걸 누굴 탓하겠느냐만-본인도 속상할 거다-나도 기분이 좀 꽁기 꽁기했다.


숙소에서 저녁을 해 먹기로 하고 호스텔 부엌에서 요리를 시작했다. 나는 평소에 요리를 거의 하지 않아서 부엌일에 매우 미숙한데 그나마 친구가 조금 솜씨를 부리는 편이었다. 그렇게 오늘의 메뉴인 순두부찌개 요리를 시작했다. 참고로 순두부찌개는 한 2년 전이었던가 서울 시내에서 친구들과 방을 잡고 하루 잔 적이 있었는데 그다음 날 아침에 해먹은 음식이었다. 마트에서 순두부찌개용 양념을 사서 순두부를 넣고 물을 적당히 넣고 끓이면 완성되는 비교적 간단한 음식이었다. 그때도 그렇게 해 먹었던 기억이 났다.


그렇게 요리를 시작했는데 친구가 먹어보더니 ‘좀 싱거운가?’ 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때도 물을 조금 많이 부어서 싱거워서 어쩌지, 하다 반찬으로 사 왔던 고추참치를 넣어 해결을 본 적이 있었다. ‘우리 아까 왜 옛날에 고추참치 넣어먹었던 얘기만 하고 그걸 안 사 왔을까? 어쩌지? 그냥 먹을까?’라고 친구가 묻는다. 그냥 먹을까, 싶었지만 고추참치 이야기가 나온 마당에 뭔가 껄끄러웠다. 어차피 나는 요리하는데 아무 도움이 안 되고 있었으니 ‘내가 갔다 올게’라는 말이 나왔다. 어차피 끓이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 하고. 그렇게 다시 한인마트로 출발했다.


숙소에서 한인마트는 걸어서 다녔다. 하지만 대중교통을 타기엔 가까워서 비용이 조금 아깝고 걷기엔 조금 먼 미묘한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하지만 구불구불 복잡한 길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그냥 직선거리로 쭉 한 네다섯 블록만 걸어가면 나오는 곳이었다.

그렇게 나는 여섯 시가 조금 넘은, 멜버른의 오후 거리로 나섰다. 그러고 보면 친구와 둘이 여행을 다니느라 계속 붙어있었다. 사람들이 아무리 친한 친구랑 여행을 와도 싸운다고 하던데,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 알겠다 싶었다. 어쩌다 보니 마트에 갔다 오겠다고 자처해서 나왔는데 걷다 보니 그 짧은 시간은 온전히 나만의 시간이 되었고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그냥 걷기는 심심해서 노래를 들을까 해서 왠지 마트 가는 시간 동안 딱 다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데이브레이크의 EP앨범을 틀었다. 'Honey delivery'가 나오더니 그 뒤를 이어 바로 ‘좋다’가 나온다. 데이브레이크에게 빠지게 해 준 고마운 노래다. 낯선 외국 도시의 거리를 홀로 걷는 여행자, 하지만 귀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익숙하게 들어오던 노래가 흘러나온다. 다음 곡인 'Urban Life Style'이 나오니 퇴사하기 전까지 회사가 있었던 여의도 생각이 났다. 높은 빌딩 숲에 둘러 쌓여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를 수없이 되뇌었던 날들을 지나 지금에 왔다. 지금은 목적지를 한인마트로 정해 잘 걷고 있었고, 이번 2013년의 길은 어디로 펼쳐져 있는 걸까? 하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친다. 그렇게 짧은 EP앨범을 들으며 신나게 걸으니 어느새 도착이다. 바로 고추참치를 사고 계산을 한다.


이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역시 걷기엔 미묘하게 멀다. 하지만 여행을 하다 보면 생각보다 참 많이 걷게 된다. 비용도 아낄 겸 버스 타느니 그냥 좀 가까워 보인다 싶으면 걷게 된다. 버스를 타야만 보이는 풍경이 있고, 걸어야만 보이는, 느낄 수 있는 것들도 있다. 멜버른에서 숱하게 걸어서 한인마트를 다니던 그 길이, 유독 혼자 고추참치를 사 오며 걸었던 그 오후의 기억하고만 맞물리는 이유는 뭘까? 동행자와 여행을 하면서 친구는 모르는 나만 비밀을 간직하게 된, 그런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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