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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바다를 바라보는 여행 @ 부산 (2020.08)

바다가 보이는 방에서 방구석 여행하기

by 세니seny

(2020년 8월 시점에서 쓰인 글입니다)



2019년 10월 유럽여행 이후 장장 10개월 만의 여행이다. 전 세계로 퍼진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외국은커녕 국내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없었다. 서서히 확진자 수도 안정화되었고 여름휴가철이 다가오자 몸이 근질근질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올해 아무 데도(국내 포함) 여행 갈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펭수 조형물이 7~8월 두 달간 부산의 광안리 해변에 전시된다고 했다. 작년에 부산에서 한 펭수 사인회에 갈까 말까 하다가 초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냈던 하지만 지금은 잘 연락하지 않고 지내는 친구 결혼식과 날짜가 겹쳐서 결혼식에 참석한답시고 부산은 가지 못했다. 그런데 나 빼고 나머지 친구들은 오지 않거나 왔는데도 축의금만 내고 일이 있다고 가버렸다.


나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결혼식장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졌고 그곳은 뷔페가 따로 분리된 곳이 아니라 식장에 놓인 원탁 테이블에서 바로 식사가 제공되는 곳이었다. 보아하니 이미 테이블은 자리가 꽉 차서 앉을 곳을 찾기가 어려웠다. 내가 아무리 프로 혼밥러라 혼자 밥을 잘 먹는 편이라고 해도 이런 씁쓸한 기분으로 모르는 사람들 틈을 파고들어 테이블의 남은 한 자리를 차지한 후 그곳에 앉아 축의금이 아깝다는 느낌으로 우걱우걱 밥을 먹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오래된 친구의 결혼을 축하하면서도 쓸쓸하게 결혼식장을 빠져나왔다.


결정적으로 그 친구는 결혼식 이후로 아예 연락이 없었다. 물론 내가 먼저 연락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나는 그저 그녀의 '오래된' 친구 중 하나에 불과했다.


과거에 머무른 사람.

오래되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서로가 걷는 방향은 같지 않더라도 현재와 미래를 보며 계속 움직여야, 살아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관계라면 그것은 죽은 관계에 불과하다. 오래된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하느라 부산에 가지 못한 아쉬움에다 이번엔 펭수 조형물을 놓치지 않고 보고 싶어서 2020년의 첫 여행(이자 아마도 마지막)은 그렇게 부산을 가기로 결정했다.






부산은 이미 여러 번 와봤기 때문에 유명한 관광지에는 거의 다 가봤다. 게다가 시국도 시국이고 여행 시기가 8월 중순의 한여름이기도 해서 웬만하면 밖을 돌아다니지 않기로 했다. 나의 평소 여행 스타일은 하루 종일 관광지나 야외를 부지런히 돌아다니고 숙소에는 잘 때만 머무른다. 그래서 나에게 숙소는 적당히 저렴하면서 있을 거 있고 깔끔하고 교통이 편리한 곳에 위치하면 그만이었다. 아무리 풍경 좋은 숙소, 비싼 숙소를 택해봤자 그곳에 머무르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그만한 가치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엔 평소 내 여행 스타일과는 달리 숙소에만 머무를 예정이었으므로, 풍경이 좋은 숙소라는 조건이 중요해졌다. 정해진 일정은 광안리 해변에서 펭수 동상을 보는 것밖에 없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광안대교가 보이는 숙소를 찾아보기로 했다. 다행히 에어비엔비에서 마음에 쏙 드는 곳을 발견해서 예약을 마쳤다.


여행하면서 남들이 모르는 곳을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하겠지만 어느 정도 사람들이 멋있다고 하는 곳에는 이유가 있다. 광안리는 누구나 다 알고 좋아하는 곳이며 나 또한 이곳을 좋아한다. 부산에 오면 꼭 광안리에 들러 밤의 광안대교를 보는 것이 나에겐 하나의 의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항상 숙소가 이 근처가 아니어서 짐을 잔뜩 든 상태에서 잠깐 들러야 했다. 게다가 지하철이나 버스 막차시간을 고려해 항상 아쉬운 마음을 남겨둔 채 떠나야 했다. 이번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광안리가 한눈에 보이는 숙소에서 그 풍경을 질리도록 볼 것이기 때문이었다.


P20200816_150848266_5F9DC8E7-2B11-4FB5-BF77-FC66A68F52DE.JPG 숙소 들어가기 전 @ 광안리 (2020.08)


내가 좋아하는 기차를 타는 것도 오랜만이다. 부산역에서 내려 깡통시장에서 점심으로 떡볶이를 먹고 체크인 시간인 3시에 맞춰 도착했다. 방은 정말 작았지만 필요한 건 다 있었고 무엇보다 광안대교와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거야. 내가 찾던 게 이거였어. 짐을 풀고 해변을 볼 수 있도록 놓인 낮은 침대에 허리를 비스듬히 대고 앉았더니 바로 눈앞에 해변의 전경이 펼쳐진다. 그리고 이번 여행에서 읽으려고 가져온 호프 자런의 '랩 걸'을 펼쳤다. 광안리 해변을 눈앞에 두고 이 책을 여기서 펼친 건 운명적이라고 느꼈다. 왜냐하면 이 책의 프롤로그가 바로 이렇게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바다를 좋아한다. 사람들은 나에게 왜 바다를 연구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내가 하와이에 살기 때문에 더 그럴 것이다. 나는 그런 이들에게 바다를 연구하지 않는 이유는 그곳이 외롭고 텅 비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곤 한다.


P20200816_160649436_0EBEDED6-34C9-40AB-91CB-D59BE4C884E1.JPG <랩 걸>의 '프롤로그', 호프 자런 (2020.08)


'랩 걸'은 유명한 책이었지만 그동안 읽을 기회를 놓쳤는데 최근에 다시금 식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데다 마침 도서관에 책이 있어서 빌려왔다. 바다를 바로 앞에 두고 저 문장을 읽을 수 있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문과 계열인 나의 삶과는 또 다른 이공계열 여성 과학자로서의 삶이 펼쳐진다. 과학자는 단순히 대학을 졸업했다고 끝이 아니다.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이다. 끊임없는 실험과 기록과 발견. 그런 것들이 평생 이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기의 길을 찾았고 그대로 잘 살아왔다. 나는 괴롭고 힘들어도 좋으니 제발 나도 나의 그런 것을 찾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번 여행은 평소 나의 여행과는 전혀 다른 양상-그저 방에서 뒹굴고 노는 것-으로 전개되고 있기 때문에 굉장히 낯설었다. 분명 여행지인 부산에 와있지만 하루 종일 방에 처박혀 바다를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보거나 책을 보고 있다. 물론 글도 조금 쓰고 있다. 첫날은 도착하자마자 피곤해서 낮에 낮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밤엔 정신이 말똥말똥했다. 밤 12시지만 밤바다가 바로 눈앞에 있으니 산책을 나가보기로 했다.


P20200816_234938068_35094A79-AB5E-451E-9BC0-1B02966E6AB0.JPG 밤 산책 @ 광안리 (2020.08)


일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아직도 해변에 사람들이 많았다. 숙소를 바로 바닷가 앞에 잡았기 때문에 밤 12시에도 여유 있게 산책을 할 수 있었다. 밤의 광안리는 몇 년 전에 왔을 때와 같이 똑같이 어둡고 광안대교는 여전히 반짝거렸다. 곳곳에서 폭죽을 터뜨리고 바짓가랑이를 걷어올리고 바닷물에 발을 담그는 사람들도 있었다. 몇 년 전에 이 장소에서 들었던 인상적인 음악을 다시 틀어봤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시간이 흘렀으니 새로운 음악을 들어야 했다.


밤의 광안대교를 보니 작년 광복절 연휴에 짧게 갔던 중국 다롄大连 여행이 떠올랐다. 그곳에도 광안대교 같은 다리에 조명을 달아놓아서 그곳에서 부산을 떠올렸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2년 전인 8월 중순 딱 이맘때엔 유럽 여행을 하고 있었다. 오전엔 라트비아Latvia의 수도 리가Riga 근처에 있는 아름다운 습지 체메리Kemeri 국립공원에 갔다가 욕심이 생겨 자전거를 타고 반대쪽에 있는 호수를 보러 가다가 1차로 비를 쫄딱 맞았다. 사람도 없고 비까지 오는 바람에 가던 길을 되돌아왔다. 다시 날이 개길래 오후엔 해변의 길이가 33km에 달한다는 유르말라에 갔는데 정말 순식간에 시작된 비를 역시나 쫄딱 맞고 힘겹게 숙소로 돌아왔다. 그렇지만 지친 몸을 다시 이끌고 밖으로 나가 밤하늘에 펼쳐진 리가 시티 페스티벌의 아름다운 불꽃놀이를 보며 하루를 마무리했었다. (결국 다음날 감기에 걸렸다)


8월 이맘때쯤엔 항상 제천에서 국제 음악영화제가 개최되기 때문에 매년 여행 겸 영화를 보러 제천에 가곤 했었다. 그래서 항상 8월 중순 이맘때에는 서울이 아닌 곳을 여행하고 있었는데 같이 영화제에 다니던 친구가 결혼을 해서 매년 가던 제천이었는데도 왠지 혼자 가기는 싫어졌다. 그래서 이 시기를 혼자 다니는 여행으로 보내게 되었다. 낮잠을 잤더니 잠이 오지 않아서 아예 날을 새고 내일 아침의 일출을 보기로 하고 숙소로 다시 돌아왔다.


비록 제천에 가지는 못했지만 코로나 시대에 걸맞게 제천 국제 음악 영화제도 일부 온라인 상영이 있어 온라인 상영작을 구매해서 부산에서 영화를 봤다. 그리고 만화 3월의 라이온을 구매해 읽기 시작했다. 작가 우미노 치카는 전작인 허니와 클로버부터 좋아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캐릭터 하나하나에 대한 이야기를 섬세하게 잘 그려낸다. 내가 느꼈던 미묘한, 애매한 감정들이 잘 녹아있다. 또한 만화 속의 그들을 보고 있자면 나도 생에 대한 의지를 불태워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느낀다.


남은 술도 마시고 음악을 듣다보니 어느새 새벽 다섯 시가 다 되었다. 분명 10분 전만 해도 새카만 어둠이 바다와 하늘을 덮고 있어서 그 둘의 경계선이 보이지 않았는데 어느새 동이 터오기 시작했다. 아뿔싸. 좀 더 극적인 변화를 촬영하려면 어두울 때부터 나가 있어야 했었는데.


나는 동해바다에서 일출을 본 적이 없다. 바다 가까이에 있는 숙소는 대부분 게스트하우스이거나 비싼 펜션들이 많았기에 나 같은 홀로 여행자가-게스트하우스는 요즘 선호하지 않음- 혼자 머무를 만한 합리적인 가격의 숙소는 잘 없었다. 그래서 일출을 직접 볼 기회가 없었다. 부산 같은 경우는 시내에 해변이 있다 보니 일반 시민들도 많이 지나다니는데 반해 도시가 아닌 외진 곳에 있는 해수욕장은 새벽 시간에 혼자 나가면 위험하니 그동안은 아예 일출 볼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P20200817_053732708_A6979D93-1AB0-4436-AB98-CB891D537FB3.JPG 해가 떠오르는 @ 광안리 (2020.08)


P20200817_053740718_DCA0BD17-C98F-4609-83DF-FBFE9159BFC9.JPG 해가 떠오르는 @ 광안대교 (2020.08)


서둘러 채비를 해서 나갔는데 이미 하늘이 많이 밝아져 있었다. 동쪽에서 올라오는 빛을 받아 구름이 분홍빛을 띄고 있었다. 날이 서서히 더 밝아졌다. 겨울이라면 새벽에 추워서 나오기 힘들겠지만 여름이니까 사람들도 벌써 돌아다니기 시작하고 따뜻한 공기가 느껴졌다. 오히려 해가 뜨기 시작하자 여섯 시밖에 안되었는데도 살짝 더운 느낌이 들었다. 새벽이라 사람들이 드문드문 있었기 때문에 펭수 동상도 편하게 구경하고 사진도 찍었다.




다음엔 겨울의 부산에 와보고 싶다. 사람이 많지 않은 겨울 바다를 보며 따뜻한 방 안에서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고 싶다. 여행을 하다 보면 지금 여행을 하면서 그다음 여행의 행선지가 나도 몰래 스르르 결정된다. 다음엔 꼭 태안 신두리의 해안사구를 보러 가고 싶다. 몇 년 전 발트 3국을 지날 때 리투아니아Lithuania의 클라이페다Klaipeda 사구를 가보려다 가지 못했었다. 나에게 사구는 미지의 세계이므로 어떤 느낌일지 매우 궁금하다. 그러다 사구보다 확실한 사막을 보고 싶어서 몽골 여행도 생각 중이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시도도 못해보고 없던 일이 되었다. 내가 처음 해보는, 풍경만 바라보는 이런 형태의 여행도 좋았다. 조만간 지구 어딘가에서 끝없이 펼쳐진 사구를 바라볼 수 있기를 바라며, 나는 다음 여행을 꿈꾸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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