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치 못한 풍경에서 받은 위로
(2013년 2월의 시점에서 쓰인 글입니다)
일본에 여행 갈 생각은 없었다.
첫 번째 회사의 퇴사를 결심하고서 생각한 해외여행은 오직 호주뿐이었다. 그런데 호주 여행을 질러 놓고서 갑자기 일본의 유바리 시市에서 매년 2,3월 경에 판타스틱 영화제를 한다고 했던 기억이 났다. 나는 EBS 라디오 교재를 통해 일본어 학습을 하고 있는데 교재에 나왔던 내용을 떠올렸을 것이다.
유바리 시는 크게 4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일본의 섬 중 제일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곳은 홋카이도라 불리는 지역에 위치해있다. 홋카이도는 겨울에 춥고 눈이 많이 오며, 여름에는 비교적 시원한 지역이다. 유바리는 그중에서도 작은 소도시인데, 시의 재정이 파탄 나면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판타스틱 영화제라는 축제를 열어 그 위기를 극복했다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나는 원래 영화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우연히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자원봉사를 한 뒤로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터라 가까운 일본에서 ‘판타스틱 영화제’가 열린다고 하니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었다. 그래서 ‘그럼 마침 지금은 시간도 되니 한 번 가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최초의 계획은 다른 곳은 구경하지 않고 여행 기간 내내 유바리에서만 머물며 마을 구경도 하고 영화제만 온전히 보고 오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행사를 통해 알아보니 작은 마을이라 숙소가 리조트 아니면 호텔 밖에 없고 게다가 1인용으로 알아보니 싱글차지 때문에 가격이 더 올라갔다. 이러다간 숙박비로 여행을 거덜 내게 생겼다.
하는 수 없이 유바리 숙박을 사흘에서 이틀로, 하루로 줄이고 줄이다 결국 삿포로 시내에서 당일치기를 하기로 하고 삿포로에 3박 4일을 머물며 추가로 삿포로 구경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내가 본격적으로 여행을 알아보기 시작했던 12월엔 영화제 홈페이지에 상영작이나 숙소에 대한 정보가 전혀 올라오지 않았고 작년 자료도 찾아볼 수 없어서 갑갑했는데 이게 웬걸, 호주에 다녀와서 1월 말에 보니까 1월 중순경에 온갖 자료들이 다 업로드되어있었다. 게다가 영화제에서 마련한 저렴한 단체 숙소도 있었다. 이런 정보를 미리 알았더라면 유바리에서만 머물렀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숙소 등 모든 것이 확정되었기 때문에 바꾸기가 어려워서 그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그래서 최종 여행안은 총 3박 4일의 여정으로, 모두 삿포로 숙박으로 결정. 첫째 날은 오타루 및 삿포로 시내 관광, 둘째 날은 유바리 영화제 관람, 셋째 날은 한인 여행사에서 주최하는 비에이-후라노-대설산 투어 코스로 하루 온종일을 보내기로 했다. 넷째 날은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었다.
처음에 가고자 생각했던 유바리 시 이외의 곳들을 가게 되면서 다른 곳들에 대한 조사를 하다 보니 홋카이도엔 볼거리가 많았다. 특히 비에이-후라노 지역은 보랏빛 라벤더 꽃이 한창인 여름에 와야 제멋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오타루는 내가 좋아하는 영화 ‘러브레터’의 촬영지이기도 했다.
마침 여행 출발하기 며칠 전에 영화 ‘러브레터’가 재개봉을 한다는 소식이 있어 여행 출발 전에 설레는 마음으로 오랜만에 영화관 스크린으로 영화도 다시 봤다. 이왕 여행 가는 건데 유바리에서만 머문다는 애초의 계획을 바꾼 것이 나중엔 오히려 다행이다 싶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2월 말이 되었고, 삿포로 신치토세 공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떨린다. 그러고 보니 국내 여행은 혼자서 잘 다녔지만 해외에 혼자 가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더 긴장이 되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일본어를 조금 할 줄 안다는 것인데 실제로 써 본 적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게 얼마나 통할지 의심스러웠다. 게다가 생각 없이 비행기 티켓이랑 일정이랑 다 해놓고 보니 방사능 문제 때문에 일본에 여행을 가지 않겠다는 사람들도 꽤 많이 있었다. 나는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예매해놓고 후회를 좀 했다. 그곳에 사는 보통의 일본 사람들이야 삶의 터전이니 어쩔 수 없다고 쳐도 한낱 관광객에 지나지 않는 나는 여행을 갈 것인지 말 것인지 선택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방사능이라는 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기에 더 무서웠다. 그래도 이젠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이미 비행기는 떴지만 여러 가지로 찜찜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렇게 공항에 도착해 바로 오타루로 이동해서 오타루 시내를 구경하고 다시 버스를 타고 삿포로로 돌아왔다. 겨울이라 여섯 시만 돼도 깜깜해졌다. 하루 종일 빨빨거리고 돌아다녔더니 힘들고 지친다. 삿포로에 내려서도 내일 유바리로 가기 위해 가야 할 버스 터미널 위치를 확인한답시고 한참을 돌아다녔다. (알고 보니 바로 근처였나 같은 자리였나 그랬다)
그리고 편의점에서 저녁으로 먹을 도시락을 사서 눈이 오는 거리를 캐리어를 끌고 숙소까지 30여분을 걸었다. 숙소 간판을 보는 순간 힘이 쫙 빠졌다. 체크인을 하고 방을 배정받았다. 아마 늦게 왔으니 낮은 층이겠거니 했는데 11층이었고 알고 보니 그 건물에서 제일 높은 층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방으로 향해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토요코인에서 봤던 그런 자그마한 비즈니스호텔의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드디어 짐을 풀고 쉴 수 있었다.
텔레비전을 켰는데 자꾸 유료채널이 나와서 이상하다고 생각하다가 겨우 일반 채널에 맞추고 아까 사 온 도시락과 삿포로 맥주를 꺼내놓고 저녁을 먹었다. 별 것도 아닌 메뉴였는데, 지치고 배고파서 그랬는지 아주 꿀맛이었다. 도시락과 맥주를 깔끔하게 싹 비웠다. 그리고 틀어놓은 일본 방송은 자막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상당히 잘 들렸고, 재밌었다. 내가 공부한 게 헛되지 않았구나 싶었다.
씻고 자려다가 창문 옆에 두껍게 쳐진 커튼을 그냥 한 번, 아무 생각 없이 살짝 들추어봤다. 그런데 창 밖 저 멀리에서는 마치 이 방이 아니면 그런 광경을 볼 수 없다는 듯이 반짝거리는 관람차가 도시의 검은 밤하늘을 가로지르며 서 있었다. 이런 장면을 상상이나 했을까? 넋을 놓고 관람차를 바라봤다. 조명은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빨간색에서 파란색으로, 위에서 아래로 정신없이 움직였다.
그걸 보면서 오늘 아침 일본으로 여행 오면서 가졌던 불안한 마음들이 싹 사라졌다. 그래, 난 이걸 봤으니 됐다고 생각했다. 밤하늘의 관람차가 거기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게 다 괜찮아졌다. 아직 여행의 밤이 이틀이나 더 남았으니 이틀이나 그걸 더 볼 수 있는 시간이 있고, 저것을 꼭 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료를 찾아보니 그 관람차는 노르베사ノルべサ라는 건물 위에 있다고 했다. 원래는 삿포로 TV탑에 가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셋째 날 밤에 관람차를 타러 갔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진행된 투어를 마치고 길을 헤매며 저녁으로 수프 카레를 사 먹고 나니 밤 10시가 되었다. 늦은 시간이라 갈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갔는데 직원 빼고는 아무도 없었다.
약간 민망한 마음으로 표를 사고 탑승했다. 하지만 내가 관람차를 타고 있으니 관람차의 반짝이는 모습을 볼 수 없었고 오히려 방에서 바라본 풍경이 훨씬 아름다웠다. 오늘도 방에서 보기만 할걸 그랬나 싶었지만 그러면 또 타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남았을 거다. 관람차에 혼자 타있는 순간은 좀 쓸쓸했는데 이미 울산과 남원에서 혼자 관람차를 타 본 기억이 있어서인지 무섭지는 않았다.
숙소로 돌아와서 창문을 열었더니 관람차는 아직도 그 자리에서 불빛을 반짝거리고 있었다. 마지막 날 밤이고 하니 아쉬운 마음에 사진이 아닌 동영상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그때 그 장면과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던 음악은 페퍼톤스의 ‘바이킹’이어서 MP3로 음악을 틀어두고 휴대폰 동영상으로 영상과 음악을 함께 촬영했다. 거의 6분이 되는 노래가 끝나자 나는 촬영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10초나 지났을까? 관람차의 불이 한순간에 팟, 하고 꺼졌다. 그 전날만 해도 분명 12시가 넘어서도 관람차의 불이 반짝였는데 알고 보니 그 날은 일요일이었고, 일요일엔 밤 11시에 운행이 종료된다고 했다. 참 신기했다. 내가 촬영을 조금만 늦게 시작했더라면 노래가 끝나기도 전에 불빛이 꺼졌을 것이다. 그러면 '아직 끝날 시간도 안 됐는데 왜 갑자기 불빛이 꺼지지?'라며 당황했을 거다. 그런데 내가 촬영을 마치자마자 마치 그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조명이 모두 꺼졌으니.
삿포로 시내의 그 관람차는 아주 많이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그 관람차 덕분에 방사능 때문에 불안했던 마음을 모두 잊고 즐거운 마음으로 나머지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날의 여행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매일 저녁마다 커튼을 열어젖히고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멍하니, 항상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는 관람차가 있는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여행 마지막 날 밤, 아쉬운 마음을 갖고 시작했던 영상 촬영 종료 후 빛이 사그라들었던 그 순간도 잊지 못할 것이다. 언젠가는 그 관람차를 다시 보기 위해 삿포로에 또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물론 첫날 허겁지겁 맛있게 먹었던 저녁 도시락과 삿포로 맥주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내가 관람차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만화 ‘허니와 클로버’에서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관람차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종종 등장했는데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그중 주인공 다케모토가 관람차에 대해 말한 다음의 문장이 내가 혼자 관람차를 타면서 느꼈던 쓸쓸한 기분을 잘 대변해주고 있어 이걸로 글을 마무리할까 한다.
나는 어렸을 때
사람들이 왜 관람차를 타는지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알겠다.
관람차는,
사랑하는 사람과
하늘을 천천히 가로지르기 위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