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021년 겨울 : 짧은 서울 여행하기

결혼식 참석과 신세계백화점 본점 일루미네이션 구경

by 세니seny

코로나 시국에도 결혼식은 이어진다. 2020년엔 코로나 시국에서의 첫 결혼식에 참석하고 글을 남기기도 했었다. (https://brunch.co.kr/@lifewanderer/70) 오늘은 지난번 결혼식 이후 코로나 시국에 참석하는 두 번째 결혼식이다. 그러고 보니 신랑과 신부를 둘 다 아는 결혼식에 가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오늘은 6년간 같이 일한 팀 동료의 결혼식이었고 동료는 사내커플이었으므로 당연히 신랑과도 안면이 있었다. 보통은 신랑 혹은 신부만 아는 결혼식에 가니까 내가 참석한 쪽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졌는데 오늘은 둘 다 아는 사람이니 둘 다 자세하게 봤고 신랑과 신부 모두 우리 회사를 오래 다닌지라 회사 사람들도 대거 참석해서 꼭 우리들의 축제 같은 느낌도 들었다.


결혼식장이 밥이 맛있기로 유명한 곳이라 그런지 다들 축의금도 냈고 식이 끝나고 나자 저녁 먹을 시간이라 대부분 밥을 먹고 간다고 했다. 나는 코로나 때문에 찜찜해서 식사를 하지 않기로 했고 대신 답례품을 받았다. 식이 끝나고 마지막까지 기다려 지인들 틈에 껴 사진을 찍고 다들 밥 먹으러 간다길래 나는 사람들과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다행히 아직까지 밖이 밝았다. 어제 눈이 오기도 했고 결혼식이 오후 4시여서 끝나고 집에 돌아갈 때쯤엔 어두워질까 봐-아직 어두울 때 운전을 많이 해보지 않아서 가능하면 밤 운전을 안 하고 있다- 차를 안 갖고 온 건데 갖고 와도 될 뻔했다. 날은 생각보다 추웠고 갈 길이 멀었다. 이 결혼식에 참석해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나의 소중한 일요일 오후 시간을 나를 위해 쓰지 못한 건 억울하니까 나만을 위해 뭔가를 하자고 생각했다.


작년에도 아마 버스 타고 신세계백화점 본점 앞을 지나가면서 일루미네이션을 얼핏 봤던 기억은 있었지만 내려서 제대로 보진 않았었다. 독립하게 되면서 신세계백화점 본점이 집에 가기 전 들렀다 갈만한 위치에 있었다. 결혼식 참석 때문에 금쪽같은 일요일 오후를 날렸다고 생각하기보다 일루미네이션을 보러 나왔다고 생각을 고쳐먹기로 했고 마침 결혼식이 끝나고 가면 해도 졌을 시각이라 일루미네이션을 딱 보기 좋은 시간이 될 참이었다.






일요일 오후 다섯 시, 오늘의 여정은 버스를 타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일요일의 느지막한 오후라 그런지 평소 같음 붐볐을 버스도 여유롭다. 대신 배차 간격도 길어지므로 주의해야 한다. 이제 나이가 나이인 만큼 남의 결혼식에 가면 '너는 언제 결혼하니?'라는, 상대방은 내가 진짜로 언제 결혼할지 관심 따윈 하나도 없으면서 그냥 의레 내뱉는, 중요하지 않은 말을 수도 없이 듣게 된다. 오늘도 역시나 그런 질문을 듣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결혼은 혼자 하니? 내가 자웅동체냐고?'라고 생각했다.


요즘 읽고 있는 책 중 하나는 200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도리스 레싱의 소설 <풀잎은 노래한다>. 이 소설엔 주인공은 메리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이다. 별다른 생각 없이 독신으로 나름 즐겁게 살고 있었던 메리는 뒤에서 사람들이 자기를 두고 메리 쟤는 왜 결혼을 안 하냐, 애가 생각이 없다 등 자신을 험담하는 얘길 듣고 충격을 받아 충동적으로, 자신의 의지라기 보단 남들의 의견에 떠밀려 결혼을 하게 된다. (결국 결혼을 선택한 것은 메리이긴 하지만) 소설의 시작 부분은 잘 안 읽혔는데 나와 비슷한(?) 처지에 처한 메리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가 나오는 2장부터는 감정이입이 돼서 그런지 책장이 술술 넘어갔다.


“근데 왜 결혼을 안 하는 거야? 지금까지 기회도 많았을 텐데.”
“내 생각은 그렇지 않아. 우리 남편이 언젠가 메리를 유심히 살펴본 적이 있었는데, 그이가 생각하기로는 절대로 결혼하지 않을 여자 같대. 결혼하고는 거리가 멀어. 그래, 내가 보기에도 결혼하고는 담을 쌓은 것 같다니까. 어딘가 나사가 하나 빠졌든지 그렇지 않으면 무슨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해.”
(p.66)

자신이 사는 세계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을 정도로 중요하지 않았던 그날의 조그마한 사건이 메리에게는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따로 시간을 내어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그녀가 어느 날 하루는 자기 방에 몇 시간이고 눌러앉아서 생각을 해보았다. ‘왜 그 친구들이 그런 말을 했을까? 도대체 내게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거야? 나사가 하나 빠졌을지도 모른다니. 도대체 그게 무슨 뜻이지...’ (p.67-68)

그녀는 결혼 상대자를 찾아 나섰다. 메리 자신은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을지 모르겠지만 비록 지금까지는 ‘사회’라는 추상적인 개념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도 그녀는 사회적 존재가 아니라면 사실상 아무것도 아닌 셈이었다. 그리고 만일 친구들이 그녀가 결혼을 해야만 된다고 생각한다면, 거기에도 일리는 있을 법했다. (p.69)

<풀잎은 노래한다>, 도리스 레싱, 민음사


이 소설을 읽고 있어서인지 내가 없는 저녁 뷔페 자리에서 메리의 친구들처럼 쓸데없는 소리가 오가진 않을까 하는 노파심마저 들었는데 마침 오늘 결혼한 동료가 나랑 동갑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회사에서 서로를 챙겨줄 만큼 친한 사람이 없어서 결혼식 내내 나랑 비슷한 처지의 다른 팀 사람이랑 같이 서 있었고 둘 다 사람들이 없는 자리에서 꼭 메리 같다는 말을 들을 법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괜히 찔렸다. 사람들한테 딱히 피해를 준 것은 아니지만 특별히 연애에 관심이 없어 보이고, 사내에서 특별히 사이가 나쁜 사람은 없지만 또 딱히 친한 사람은 없는 뭐 그런 사람들.


이미 남들 눈엔 나도 메리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메리가 뭘 어쨌다고, 그들한테 피해를 준 것도 아닌데 왜 그러는 걸까. 나는 같은 팀의 팀원이 결혼한다고 본부 사람들 한 명 한 명을 컨택해서 돈을 모아 선물도 준비했고 사내 전체에 결혼식을 알리는 메일도 내가 썼고 결혼식에 참석까지 했으니 같이 일한 동료로서 해야 할 의무는 충분히 다 했다.


결혼식 장소는 신도림이었고 그곳은 내가 25년간 살았던 곳 근처라 많이 지나다녔던 곳이기도 했다. 버스를 타고 오가다 보니 내가 오래 근무했던 여의도도 지나가서 괜히 옛 생각이 나 창밖의 풍경을 보며 혼자 감상에 젖었다. 영등포역에 있는 롯데백화점은 연말을 맞아 입구를 예쁘게 꾸며놨고 여의도역 출구는 한창 공사 중이었다. 영등포와 여의도라는 익숙한 동네를 지나 용산구로 진입했다. 숙대입구역 정류장에 내려 4호선으로 갈아타고 명동역에서 내렸다.


오랜만이다, 명동. 명동역에서 내려서 우리은행 본점 쪽으로 걸어가는데 어째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내 앞에 걸어가는 사람들이 다들 그쪽으로 가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세상에 사람이 이렇게 많을 수가 없었다. 이곳은 올해만 그런 게 아니라 평상시에도 건물 외벽을 활용한 비주얼 라이징이 인상적이었던 곳이긴 했는데 이번엔 다른 때와 다르게 소위 '대박을 쳐서' 사람들이 모여든 핫 플레이스가 되어 있었다. 듣기로는 원래 중간에 광고가 들어갔었는데 그걸 빼는 과감한 선택을 했다고 한다. 만약 여기에 광고가 들어가 있었다면 이 정도로 흥행하진 않았을 것 같기도 하다.


P20211219_180030263_9A90B88B-3675-46BF-85E6-35F6B0664C5B.JPG 신세계백화점 본점 일루미네이션 (2021.12.19)
신세계백화점 본점 일루미네이션 풀 동영상 (2021.12.19)


영상을 보고 있자니 꼭 외국에 나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크리스마스는 전 세계적으로 축하하는 명절이자 축제지만 특히 유럽이나 영미권에서는 우리나라와는 다른 의미로 큰 축제인 듯하다. 나는 아직 미국은 안 가봤으니 그나마 가봤던 영국 런던을 떠올리면서 마치 런던의 피카딜리 서커스 한복판에서 일루미네이션을 보는 건 아닐까 하는 착각에 잠시 빠졌다. 일루미네이션이 나오는 전체 동영상을 하나 찍고 눈으로 바라보면서 무슨 노랠 들을까 하다가 곧 크리스마스니까 아리아나 그란데의 'Santa Tell Me'를 셀프 선곡했다. 노래 재생시간이랑 일루미네이션 영상 길이랑 거의 비슷해서 좋았다.


조금 서있다 보니 발도 시리고 배도 고파왔다. 마치 겨울에 떠난 여행에서 하루 종일 구경 잘했고, 이제 해도 떨어져서 날도 더 쌀쌀해지고 배도 고파졌으니 숙소로 돌아가야지 하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얼른 집에 가서 직구로 사놓고 아직 한 번도 안 먹은 이치란 라멘을 먹기로 했다.


겨울에는 여행을 잘하지 않는 편이라 겨울여행이라고 하니 2013년 2월에 홋카이도로 여행 갔던 기억이 난다. (https://brunch.co.kr/@lifewanderer/43) 그때도 나는 지금처럼 혼자였고 차도 옆에 2m씩 쌓여있던 눈을 보았고 여행자답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밖을 돌아다니느라 지쳤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그렇지만 종이 지도만 보고 지하에 있었던 수프 카레집을 찾아가 따뜻한 수프 카레 한 그릇을 먹고 기운을 차린 것처럼 오늘도 (내가 끓인) 일본의 향이 나는 라면을 먹으며 여행지에 간 느낌도 내고 빈 속을 따뜻하게 채워야지 생각했다. 이렇게 짧은 서울 여행은 끝났다.






구경을 잘 마치고 집에 가는 버스를 타려고 롯데백화점 본점 쪽까지 걸어왔다. 그런데 롯데백화점 외벽 장식은 평범하기 그지없었고 직장인 10년 차를 넘어가고 있는 나는 직장인 마인드가 발동되어 롯데백화점 담당자는 엄청 혼난 거 아닐까 생각했다. 방금 신세계백화점 본점을 구경하고 난 사람들이 이 길로 많이 지나가는데 정말 놀랄만치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는지 며칠 뒤 유튜브에 tvn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록>(일명 유퀴즈)에 신세계 백화점 본점 일루미네이션 담당자분이 출연한다는 링크가 올라왔다. 아마 일루미네이션을 보고 온 사람이라면 과연 이걸 기획한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했을 것이다.



2021년 겨울,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한 시기에
잠깐이라도 외국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밤하늘을 가로지르는 관람차가 있는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