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되돌아보기
(2013년 시점에서 쓰인 글입니다.)
나는 종교가 없다. 그래서 교회, 성당, 절 하다못해 이슬람 사원에 들어간다 해도 합장을 하고, 절을 할 수 있고 그게 아무렇지도 않다. 종교는 믿는 신의 형태가 다를 뿐 본질적인 건 같다고 생각한다. 유럽여행을 갔을 땐 교회나 성당이 종교적인 의미에다 건축물로서의 가치도 있으니까 관광지로서 방문하기도 하고 같은 맥락으로 국내 여행을 갈 때는 절에 간다.
우리나라엔 길가부터 산속 깊이까지 절이 없는 곳이 없을 만큼 절이 많다. 그렇게 절에 가서는 부처님 얼굴을 뵙고 욕심쟁이처럼 이런저런 소원들을 이뤄 달라며 부처님께 부담을 팍팍 드리고 온다.
국내 여행을 하면서 절을 많이 가봤기에, 템플스테이가 있다는 것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템플스테이를 한 번 해보고 싶었지만 왠지 혼자 갈 엄두는 나지 않았다. 그런데 불자 집안이라 가끔 절에 가는 친구가 템플스테이를 해보고 싶다면서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나는 종교가 없지만 교회 스테이, 성당 스테이라도 있다면 다 참여해보고 싶은 마음이기에 수락했다.
요즘은 대부분의 절에서 템플스테이를 많이 운영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친구와 나는 둘 다 차가 없는 데다 1박 2일로 짧게 다녀올 생각이라 서울 근처에서 대중교통으로 접근 가능한 곳이면서 템플스테이를 운영하는 곳을 찾다 보니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그중에 휴식형 템플스테이를 운영하고 있으며 커다란 은행나무가 유명하고 지하철로도 갈 수 있는 경기도 용문사에 가기로 결정했다.
템플스테이 운영 방식은 절마다 다르지만 크게 체험형과 휴식형 두 가지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체험형은 단어 그대로 절에서 이것저것을 체험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이왕 절에 왔으니 절에서 할 수 있는 것들-다도 프로그램, 108배 등-을 해보는 것이다. 그래서 절에서의 시간을 대부분 이러한 활동으로 보낸다. 그런데 나랑 친구는 활동하는 것엔 큰 관심이 없었고 그냥 절에 머물러 보고 싶어서 체험이 최소한으로 들어가 있는 휴식형을 선택했다.
지하철을 몇 번이나 갈아타고도 한참을 가서야 경의중앙선 용문역에 도착했다. 지하철역에서 버스를 타고 절 입구에 도착했다. 하지만 실제 절 입구는 산속에 있으니 한참 올라가야 했다. 그래도 올라가는 길 옆에 개울도 흐르고 길이 험하지 않아서 슬슬 올라갔다. 방 배정을 받고 경내를 산책하며 오후 시간을 보냈다.
저녁 시간이 되어 배식을 해서 밥을 먹었다. 절에서는 음식을 남기면 안 돼서 먹을 만큼만 담아야 한다. 저녁을 먹고 나선 불당에서 자기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스님의 말씀을 듣다 보니 내가 기도를 하면서 빌었던 대상, 나를 알아주는 단 한 사람 그건 바로 내 마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에게 쓰는 편지에 할 말이 많아졌고 한 페이지를 꼭꼭 채워 편지를 썼다. 스스로 봐도 참 잘 쓴 것 같아 뿌듯했다.
밤이 되자 절에는 원래 거주하는 스님들과 템플스테이 하러 온 체험객들만 남았다. 저녁의 산은 고요하다. 그동안 나에게 절이란 곳은 낮에만 구경하러 잠깐 왔다가 가는 곳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오랜 시간 그리고 어둑한 밤에 절에 있는 것은 처음인지라 기분이 묘했다.
밤 9시경이 되자 내일 새벽에 일어나야 한다고 일찍 자라고 했다. 그런데 잠이 올 턱이 있나. 나는 현대 문명세계에서 밤 12시, 1시에 잠들고 주말엔 더 늦게 자는 사람인데. 같이 간 친구는 원래 일찍 잠을 자는 타입이라 금방 잠이 들었지만 나는 잠이 오지 않아서 한참을 뒤척이다가 겨우 잠이 들었다.
그런데 잠이 든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무슨 소리가 난다. 스님이 밖을 돌아다니면서 템플스테이 참가자들을 깨우는 소리였다. 그런데 방에 들어와서 사람을 깨우는 게 아니라 국악에 쓰이는 박(?) 같은걸 쳐서 나는 소리였다. 힘겹게 일어나 불당으로 갔다.
그때가 새벽 4시였다. 나와 내 친구는 휴식형이라 108배를 안 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는지 아님 뭔가 잘못된 건지 템플스테이 참가자들은 모두 108배를 해야 한다고 했다. 나랑 친구는 당황했지만 분위기가 워낙 조용해서 안 한다고 빠질 수가 없었다. 임산부 한 분만 빠지고 나머지는 108배를 시작했다.
템플스테이 프로그램 중에 108배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나랑 친구는 안 할 거라고 생각해서 전혀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작스레 하게 돼서 당황스러웠다. 몰랐던 사실이었는데 교회로 치면 CCM 같은 음악이 불교에도 있었다. 108배를 위한 음악이랄까?
예를 들면 절을 한 번씩 할 때마다 첫째, 이웃을 돌보지 않았는지 생각해봅니다, 둘째, 이기적인 생각을 하지는 않았는지 참회합니다... 이런 식으로 정해진 멘트가 있었다. 언제 108배를 다 하나 걱정했는데 그 멘트를 들으면서 하나씩 하나씩 하다 보니 108배를 마쳤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리고는 어젯밤에 자신에게 썼던 편지를 태우는 의식 같은 걸 한다고 했다. 당시 나는 첫 번째로 다니던 회사를 자의로 퇴사하고 구직 중이었다. 직종을 바꿔볼까 했지만 결국 원래 직종으로 다시 취업하기로 마음먹고 여기저기 원서를 내고 면접을 보면서 자존감이 바닥을 치던 시기였다. 그래서 나에게 쓰는 편지에 굉장히 구구절절할 말이 많았고 내가 쓰면서도 참 마음에 들어서 두고두고 간직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걸 태운다니! 태워버릴 거라면 그렇게 잘 쓰지 않았을 건데!
이곳은 절이니까 이렇게 물건에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는 법을 알려주는 건가? 이걸 태우는 정확한 이유는 템플스테이를 한지 오래되어서 잊어버렸다. 아무튼 밖으로 나가서 나를 비롯해 다른 참가자들이 쓴 편지까지 전부 모아서 아궁이 같은 곳에 넣고 태웠다.
이후로 아침 산행 등이 더 이어졌지만 나랑 내 친구는 휴식형을 신청했으니 슬쩍 빠져나와서 다시 방에 들어가 잠을 잤다. 그러고 나니 아침이었다. 아침에는 아침만 먹고 다른 활동이 없었다. 그래서 음악도 듣고 경내도 걸어 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퇴실시간은 점심시간 때쯤이었다. 퇴실할 때 식사 쿠폰을 주셨는데 산 밑에 내려가는 길에 있는 (아마 절에서 운영하는 곳인 듯했다) 체험관 같은 식당에서 사용할 수 있는 식사권을 주셨다. 마침 산에서 내려갈 때가 점심시간 즈음이라 그곳에 들러 점심을 먹었다. 공짜라 그랬던 건지 아니면 산에서 먹는 건 뭐든 맛있어서 그런 건지 엄청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템플스테이로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이 되었다. 어제 일찍 잤으니 오늘은 일찍 일어나야지 하면서도, 알람 소리를 들었으면서도 백수니까 결국 그대로 잤다. 그런데 벨소리가 울린다. 알람인 줄 알았는데, 생각해보니 알람이 울릴 시간은 한참 전에 지났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템플스테이에 가던 지난주에 최종면접을 봤던 회사의 전화번호가 핸드폰 액정에 떴다. 불안한 마음에 받질 못하겠다. 불합격이라고 하면 어떻게 해. 결국 전화를 받지 못하고 부재중 통화로 남겨놓은 다음 화장실에 다녀와 그 번호로 전화를 걸어본다.
최종 합격하셨습니다.
합격이란다. 불합격까지 전화로 통보해주면 통보하는 사람도, 받는 사람에게도 너무 잔인한 일일 테니 전화로 불합격 통보를 하는 일은 (아마) 없을 텐데도 나는 왜 전화를 받지 않았던 것일까. 전화를 받지 못할 만큼 자신감이 떨어져 있어서 그랬던 걸까.
템플스테이에서 나에게 썼던 편지라든가 절에서 했던 마음 수양 때문에 취업이 된 건 아니었을 것이다. 월요일에 합격 통보 전화가 올 거면 이미 금요일쯤에는 결과를 정해놓고 통보만 월요일에 했을 가능성도 높다. 그렇지만 템플스테이에 가서 빌었던 나의 간절한 마음이 통해서 그런 거 아닐까, 하는 다소 어이없는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또 한 단계를 클리어했다. 문제는 또 이제 다음 주부터 닥쳐올 다음 단계일 것이다. 주는 게 있음 받는 게 있다고, 새로운 회사는 나에게 경력과 돈을 주면서 어떤 어려움을 줄 것이다. 악물고 3개월만 하자. 그러면 어떻게든 될 거야.
집에서 멀다는 게 조금 흠이지만 그거 빼고는 나름 괜찮은 회사인 거 같다. 어차피 난 대기업형 인재는 아니었으니까 적당한 규모의 외국계 기업도 괜찮을 것이다. 우연히 넣었던 서류 접수부터 1,2차 면접까지 이렇게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진다는 것만으로도 내 기도가 이루어졌다는 것 아닐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새로운 세상이 조금은 두렵지만 또 익숙해지는 날이 오겠지.
백수로 보낸 장장 9개월간의 대장정, 수고했다. 재충전은 충분히 되었고 주어진 일에 감사하면서 살아가자. 일하고 남는 시간과 주말에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하면서 살아가자. 그것도 하나의 해답이 될 것 같아. 전 직장엔 아마도 추석이 껴서 찾아뵙지는 못할 것 같다. 다음 주에 꼭 전화를 드려야겠다. 나를 뽑아주셨던 상무님과 사수인 차장님께 그동안 참 고마웠다고.
*
하지만 결국 사수에게 전화는 하지 않았고, 이로부터 2년 뒤 사수가 퇴사한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전 회사에 찾아갔었다. 그때의 전 회사 방문기는 이미 발행한 글에 남겨두었기에 덧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