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청국가답게 강제로 인터넷 디톡스 하게 된 사연은?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스위스로 출발한다. 아침 7시 기차라 피곤해서 깜박 아니 대놓고 잠들었다. 오늘 오후 여행 일정도 있으니까.
정차역이 가까워졌는지 사람들이 부시덕거리는 소리에 깼다. 창 밖에는 그야말로 누가 봐도 '나 이제 스위스야~' 하는 풍경이 펼쳐졌다. 여태까지는 들판과 토스카나 지방 특유의 기다란 이등변 삼각형 모양의 나무들이 죽 늘어서 있는 풍경만 봤었다. 그런 건 온데간데없고 갑자기 높다란 산에 둘러 쌓이고 산 정상에는 눈이 보인다. 아아, 스위스구나. 기차 안에서 여기가 바로 스위스라는 걸 눈치채게 될 줄은 몰랐어.
핸드폰을 보니 국경이나 도시가 바뀌게 되면 유심 안내문자가 오는데 이번에도 그러했다. 그래서 보니까 처음에 유심을 그리스에서 샀더니 알 수 없는 그리스어 문자가 잔뜩 쓰여있길래 구글 번역을 돌리니 통화 금액이 어쩌고 저쩌고 뭐 그런 안내문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핸드폰이 안 터집니다…?
아침까지만 해도 잘됐는데 이상하다. 이탈리아에서 스위스로 넘어왔다는 거 빼고는 다른 변화는 없는데. 그래그래, 보아하니 여기가 좀 깊은 산속 같은데 산 속이라 안 터지는 거겠지. 봐봐, 통신사에서 나라가 바뀌었음을 감지하고 문자도 왔잖아?
그런데 시간이 흘러도 핸드폰이 되지 않았다. 한국에서 사 온 유심이 안 될 때도 증상이 딱 이랬던 것 같은데. 아직 유심 사용기간이 열흘이나 남았는데... 데이터 무제한이라 막 써서 좋았는데...
일단 숙소가 진짜 바로 역 옆이라 지도 없이도 찾아올 수 있어 다행이었다. (돈 아낀다고 서역 쪽으로 바꿨으면 거기는 역에서 조금 걸어가야 하는 곳이라 난감했을 듯…)
짐부터 맡기고 호텔 와이파이 연결을 해서 급한 대로 왕복 기차표 비쌌지만 눈물을 머금고 얼른 끊었다. 그리고 여길 나가는 순간부터 앱도 안될 거 같으니 티켓 큐알코드도 캡처해 놓고 얼른 기차 타러 갔다. 이탈리아처럼 기차를 탑승하면서 펀칭/체크인을 추가로 안 해도 돼서 천만다행이다.
핸드폰은 아무리 해도 안된다. 오늘 오후에 가기로 한 루체른 시내는 작아서 카펠교와 빈사의 사자상 정도만 볼 거고 구글맵 오프라인으로 현재 위치는 확인가능하니까 오늘 반나절은 어떻게든 버틸 수 있겠다 싶어 계획대로 루체른에 다녀왔다.
15년 전, 대학교 졸업하기 직전에 이때 아니면 언제 유럽여행 가겠나 싶어서 간 반 패키지여행이었다.
이번 여행에서는 첫 유럽여행 때 갔던 곳들도 재방문했다. 희미하게 어디 어디에 다녀왔다, 정도의 기억 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이제 어엿한 사회인이 되어서-사회인이었지만 다시 백수가 되었다-같은 곳을 또 오다니 감회가 남달랐다. 그때는 겨울에 와서 두꺼운 패딩을 입고 눈도 오고 해도 빨리 떨어져서 금방 저녁이 됐었는데 봄에 오니까 또 다른 느낌이다.
하지만 유심이 안 되다 보니 기차 안이나 시내에서 여행정보도 즉각 찾아보지 못하고 유튜브로 음악도 못 듣고... 유심이 안 되니까 강제로 인터넷 디톡스가 되어버려서 조금 심심한 여행이었다.
원래는 내일 아침에라도 당장 스위스에서 사용가능한 유심을 사려고 했는데 어차피 화요일이면 프랑스로 넘어간다. 그리고 그리스에서도 보니 자국 내에서 사용하는 유심이 저렴한 가격에 용량은 더 많아 조건이 좋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스위스는 기차만 타고 편하게 쉬려고 왔으니 그 본분에 맞게(?) 데이터 없이 여행하기로 결심했다. 프랑스는 체류기간이 최소 열흘이고 일단 이 유심이 스위스라서 안 된 걸 수도 있으니까 한번 프랑스 국경 넘어가는 거 봐보고 안되면 그때 구입해도 늦지 않겠지.
이렇게 오늘의 문제 하나를 해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