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초반의 긴장이 풀렸는지 골골대기 시-작
장기여행하면 신경 쓰고 조심해야 될 게 많은데 그중 하나가 건강문제다. 어디든 아프지 않은 게 좋다. 특히 혼자라면 더더욱.
여행 초반의 긴장의 풀려서인지 혹은 그동안의 피로가 쌓여서인지 아님 날이 따뜻한 남쪽으로 내려가는 게 아니라 상대적으로 북쪽으로 올라가서 그런지 코를 찔찔거리기 시작했다.
이번 여행에 중점적으로 가져온 약은 먼저 배탈 나면 먹는 약. 요 몇 달 배탈이 났다 하면 무조건 설사에 금방 낫질 않아서 개고생을 했으므로 챙겨 왔다. 그리고 기침이 심해져서 기침약과 나머지는 비상약 조금 챙겨 왔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콧물이 줄줄 흐르다니.
보통 나한테 감기가 오면 목이 아팠다. 그러면 사탕형태로 된 스트렙실 같은 약을 미리 먹으면 더 심해지지는 않았기에 그것들만 챙겨 왔는데. 휴지도 귀해서 어제도 한 장 가지고 몇 번을 아껴가며 풀었는가. 개중에 다행인 사실은 진득진득한 누런 코는 아니었다는 것.
오늘은 크게 무리하는 일정은 아니지만 저 멀리 몽트뢰까지 기차를 타고 돌아오는 일정이다. 그야말로 기차만 타는 일정. 여행 초반에 많이 피곤했을 테니 이 날은 하루 쉬어가는 겸 해서 잡은 일정이다. 원래 비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생각보다 날씨가 좋다. 아무리 기차만 타는 거라고 해도 풍경 보는 거라 날이 흐리면 소용이 없으니까.
호숫가 주변이라 쌀쌀할 거 같아서 안에 경량 패딩조끼도 입고 왔다. 원래대로 경량패딩과 긴 봄 코트를 입고 왔으면 추위에 떨고 다니지는 않았으려나. 이번엔 짐을 좀 잘 못 쌌다. 그동안 여행 경력 다 어디 갔냐며...?
이쯤 되면 역방향의 여자. 벨에포크 기차는 자리지정까지 했건만 또 역방향이네. 아니 도대체 왜 예매할 때 역방향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는 걸까? 너무 불편하다.
스위스 여행 둘째 날. 오늘은 하루 종일 기차만 탄다.
가만 계산해 보니 스위스에서 쓴 기차표 값만 대략 40만 원이다. 이 가격이면 잘 알아보고 패스를 끊을 걸 그랬나. 이게 뭐람. 게다가 감기가 오려는 거 같다. 환장하겠네. 열은 없지만 코만 불타오르는(?) 상태다. 코 부분만 열감이 뽝 느껴진다. 그런데다 기차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자 온 건데...
단체 여행으로 치자면 중국 사람들이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인도인들이 자유 단체여행객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이래서 돈 주고 일등석 타는 거구나. 이등석을 이들이 점령하고 말았다. 이들도 중국인처럼 꼭 떼로, 한두 명이 아니라 보통 2,3대 가족을 아우르는 이모에 삼촌에 사돈에 팔촌(?)까지 거의 기차 한 칸을 점령했다.
내가 인도영화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건 영화 볼 때 한정. 스위스 풍경을 보면서 왜 자꾸 인도영화에서 듣던 '꺄호와'를 들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에 시달렸다. 심지어 끊임없이 떠든다. 여긴 스위스인데 나는 왜 인도영화 안에 들어와 있나요.
게다가 내 핸드폰이 지금 인터넷이 안 되는 바람에 강제 데이터 디톡스 중이라 노래로도 귀를 막을 수 없다. 귀만 막을 수 있다면 눈은 바깥 풍경 보는 거니까 괜찮을 텐데. 다행인 건 비가 지금은 안 온다는 것. 그것만 해도 감사하자. 오늘 컨디션 별로인데 많이 안 돌아다니는 일정이고 기차에 앉아만 되는 일정이라는 사실에 감사하자.
기차는 평화로운 마을을 달리고 달려 딱딱한 독일어에서 벗어나 비음과 연음이 난무하는 프랑스어의 세계로 날 인도한다.
데이터가 안되니 핸드폰으로 음악을 들을 수 없어서 아침에 급하게 MP3를 충전해서 들고 왔는데 다행히 작동이 된다. 지난번에는 한국에서 풀충 해왔는데도 배터리가 없다고 나와 작동이 안 돼서 낭패였는데. 오늘의 구세주다. 배터리가 오래 못 간다 해도 괜찮다.
클래지콰이의 1.5집을 재생했다. 이 앨범이 의외로 여기저기 잘 어울린다. 그리고 오랜만에 노리플라이 1집 재생. 수록곡 중 <world>가 그렇게 최애곡은 아닌데 오늘 이 분위기랑은 찰떡이다. 몽트뢰 쪽으로 갈수록 지명도 뭔가 프랑스스럽다. 가는 방향은 왼쪽이 낫다는 거까지 조사해 놓고 정작 오른쪽 역방향에 앉은 나. 바보. 내가 그렇지. 이따 오는 기차에는 사람 좀 없었으면 좋겠다.
만년설이 있는 산이 있는 반면 기차가 지나는 아래쪽은 푸른 풀과 노란 민들레 같은 풀꽃이 가득하다. 중간중간 나무로 지어진 작은 집들이 있고 소들은 한가롭게 거닐며 풀을 뜯고 있다. 쟤네들은 스트레스 안 받을 거 같아 부럽다.
<오늘의 BGM> - MP3 재생 기념 과거로의 여행
클래지콰이 1.5집 (2004)
토이 6집 (2007)
노리플라이 1집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