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솔레 언덕에서 노을 보며 사진 셔틀 당하기
피렌체 마지막 날. 낮엔 근교 도시인 시에나에 다녀오기로 하고 저녁엔 피렌체 바로 옆의 작은 도시? 지역? 인 피에솔레에 가서 노을을 보기로 했다.
현재의 나는 유럽 여행 3주 차이지만 서류상으론 회사에 재직 중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연차가 착실하게 하루하루 소진되어 오늘이 드디어 서류상 나의 퇴사일이다. 마지막 출근일자 뒤로 그동안 남아있던 연차를 붙이고 5월 초엔 공휴일이 많다 보니 마지막 출근 한지가 한 달 정도 된 것이다. 기분이 이상하다. 이제 서류상으로 당분간은 나 외엔 아무 곳에도 속하지 않은 인간이 되었다.
시에나를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 그동안 피렌체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눈에 띄었던 관람차에 직접 가보고 싶었다. 혼자 여행 다닐 때의 특장점은 바로 이런 거다.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을 장소를, 내 마음대로 가고 싶은 곳에 가는 것이다. 피렌체 버스 터미널로 가는 길에 관람차 근처에서 잠시 정차하고 다들 내리던데 잠결에 비몽사몽이던 나는 내릴 타이밍을 놓치고 결국 버스터미널에 다 와가서 다음 정류장에 내린다. 그리고 관람차 방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한참 걸어서 도착했다. 이거야, 이거!! 내가 이렇게나 관람차에 집착(?) 하는 이유는 만화 <허니와 클로버>때문이다. 언제 봐도 명작. 오늘의 노래는 다 필요 없고 애니 <허니와 클로버>의 엔딩송이었던 <waltz>다. 언제 들어도 몽글몽글하면서 설레면서도 씁쓸한 기분.
갑자기 파리에서 바이올린 레슨을 받아볼 순 없을까 싶어서 땡볕에서 검색해 봤으나 그딴 건 없었다. 대신 파리 수영장은 시민뿐 아니라 나 같은 일반인도 저렴한 가격으로 이용이 가능했다. 그래, 파리에서 1주일이나 머무니까 거기서 실컷 하자. 검색하다 보니 파리에서 발레 원데이 클래스도 많이 가더라. 어렸을 때 발레를 해본 경험이 있어서 가보고 싶었지만 발레옷도 없고 신발도 없어서 포기. 무엇보다 발레를 안 한지도 너무 오래되었고. 그나저나 난 왜 이렇게 돈 안 되는 것들로만 하고 싶은 게 많은 걸까?
숙소에 잠깐 들러 마침 다 되어 있는 빨래도 정리하고 카레랑 밥도 데워먹고 다시 나갈 준비를 한다. 노을 보러 가는데 너무 일찍 가면 오래 기다려야 되니까 슬렁슬렁 나왔다. 내가 탈 버스가 지나가는 거 보고도 여유 있게 지나쳤는데 그 뒤로 온 차가 퇴근시간과 겹치면서 길 막혀서 늦게 왔더니 사람이 꽉 차 있다. 뒤차가 금방 올 거 같아서 기다렸는데 또 저렇게 사람이 많으면 안 갈까 싶었으나 다행히 다음 차는 사람이 좀 비어서 탔다.
피렌체 시내를 벗어나니까 차가 안 막혀서 버스가 빨리빨리 간다. 그렇게 피에솔레에 도착했다. 전망대 올라가는 길 찾느라 헤맸는데 버스 정류장에서 뒤로 돌아야 있다. 올라오는 길에 뒤에 한 남자가 따라오길래 뭐지 했는데… 언덕 올라가기 직전 제일 마지막(?) 집인 16번지로 쿨하게 들어가더라. 노을 보러 가는 사람이 아닌 그냥 동네주민이었던 거다. 아저씨야 맨날 보자면 볼 수 있는 거니까 개쿨쏘쿨 오늘의 노을 따위는 보지 않고 집으로 들어간 거다.
짧고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오니 정말 조그맣게 피렌체 시내가 내려다 보인다. 아참, 피렌체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 다시 봐야 하는데 결국 못 봤네.
새소리가 들리고 평화로운 풍경. 성수기가 아니라 그런지 생각보다 사람도 없다. 주위에 프랑스어를 쓰는 커플이 있었는데 슬슬 다가오더니 사진 찍어달라고 부탁한다. 프랑스어로 말을 걸어볼까 하다 포기. 혼자 오면 아무래도 만만해 보이는지 사진 찍어달라는 부탁을 참 많이 받는다. 이게 어떤 때는 괜찮은데 어떤 때는 벌써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어서 부탁하러 오면 빡친다. 특히 내가 음악 듣고 있거나 뭔가 풍경 보고 있을 때… (이번엔 후자였음)
프랑스 커플의 사진을 찍어주고 나서 셀카라도 남길까 싶어 혼자 끙끙대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아까 같은 버스를 타고 와서 내릴 때부터 나 먼저 내리라고 해주던 흑인 여자애들 그룹이 뭐가 그리 재밌는지 낄낄거리고 즐거운 시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셀카 찍으려고 낑낑대는 나를 발견하고 다가와서는 너 사진 찍어줄까?라고 물어봐주었다. 정말 고마웠는데 왜 나 죄다 눈 감고 있니…? ㅜㅜ
아무튼 내 무드 즐기는 와중에 모르는 사람들한테 사진 찍어달라는 부탁 두 번이나 당해서 기분도 조금 상했다. (에라잇) 그리고 아직 돌아갈 버스 시간은 충분하지만 여기 서있다가는 또 이런 부탁당하는 사람이 될 것 같아 마음이 여러모로 좋지 않았다. 게다가 내일 아침 베네치아로 이동하기 위해 일찍 나가야 하니 가서 씻고 짐정리도 해야 한다. 그리고 교통권도 시간이 애매하게 남아서 마음의 평화를 위해 나머지 노을은 내려가면서 보기로 한다.
오늘의 클로징 배경음악은 데이브레이크의 <회전목마> 그리고 언덕길을 내려오면서 들은 페퍼톤스의 <heavy moon heavy sun>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