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1월, 업무 스트레스가 절정에 달했던 어느 날 밤, 나는 완전히 정신이 나갔나 보다. 예전 글에서 언급했던 그 임윤찬 피아니스트와 클라우스 메켈레 지휘자를 직관하고 싶다는 열망이 갑자기 폭발한 것이다. 마침 임윤찬의 공연은 대부분 매진되고 오케스트라 협연 하나 밖에 남지 않았다[1]. 그래서 이를 포함해서 보고 싶은 공연을 모조리 예매 하고 다음날 아내에게 용서를 구했다. ( - - )( _ _ )( - - )
베르비에는 스위스에서 열리는 음악 페스티벌 정도로만 알고 티켓을 질러버렸는데, 알고 보니 행사가 열리는 장ㅅ는 해발 1500미터 알프스 산골 마을이었다. 겨울엔 스키 리조트로 유명한 곳인데, 여름에 가족과 함께 가서 뭘 하지? 하는 현실적인 고민이 뒤늦게 밀려왔다.
다행히 아내가 "어차피 유럽 가는 김에 비엔나와 밀라노도 가보자"며 여행 계획에 힘을 실어주었다. 원래 일정에 시차 적응을 위한 비엔나 5일과, 패스티벌 중간에 북이태리 도시 산책을 위한 로드 트립까지 추가되면서 음악 페스티벌 참석이 유럽 문화 기행으로 업그레이드 되었다.
좀더 알아본 결과, 이 페스티벌은 생각보다 훨씬 잘 만들어진 행사였다. 많은 유명 아티스트들이 2주 동안 매일 공연하는 꿈 같은 무대였다. 특히 내가 목표로 했던 임윤찬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4번과 클라우스 메켈레 지휘의 스트라빈스키 《불새》는 페스티벌의 하이라이트 프로그램 중 하나였다.
재미있는 건, 교회에서 열리는 소규모 실내악 공연부터 콘서트홀에서의 대규모 오케스트라 공연까지 다양한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예전 글에서 다뤘던 공연 찾아다니기의 모든 유형을 한 곳에서 경험할 수 있는 셈이다.
베르비에 페스티벌의 시작은 정말 드라마틱하다. 1991년, 스웨덴 출신의 마틴 엥스트뢰엠(Martin T:son Engstroem)이 가족 휴가차 베르비에를 방문했을 때 "이 평화로운 스키 마을을 유명한 클래식 음악 명소로 만들어보자"는 무모한(?) 아이디어를 떠올린 것이 전부였다.
생각해보면 정말 미친 발상이다. 겨울엔 스키 타러 오고 여름엔 하이킹 하러 오는 알프스 산골 마을에서 클래식 음악 공연을? 하지만 그 '무모함'이 1994년 첫 공연으로 이어졌고, 지금은 루체른과 잘츠부르크와 함께 유럽의 잘 알려진 클래식 페스티벌 중 하나가 되었다. 첫 공연이 열린 1994년 7월 12일, 임시로 설치한 거대한 텐트 '살레 메드랑'에서 주빈 메타 지휘와 당시 13살이던 다비드 가렛의 바이올린으로 시작된 이 페스티벌은 이제 3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베르비에 페스티벌이 다른 페스티벌과 차별화되는 건 단순히 공연만 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베르비에 페스티벌 아카데미라는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13세부터 30세까지의 젊은 음악가들을 육성한다. 매년 60개국에서 900여 명이 지원해서 108명만 선발되는, 선발 과정이 꽤 까다로운 곳이다.
특히 "Rencontres Inédites"(이전에 한 번도 함께 연주한 적 없는 만남)라는 프로그램이 인상적이다. 잘 알려진 연주자들이 즉석에서 만나 새로운 조합으로 실내악을 연주하는 건데, 이런 '깜짝 콜라보'는 베르비에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매력이다.
게다가 공연장도 독특하다. 메인 무대인 '살레 데 콤빙'은 매년 6주에 걸쳐 60명이 달라붙어서 조립하는 임시 구조물이다. 1,700석 규모에 몽블랑 전망이 펼쳐지는 이 콘서트홀은, 페스티벌이 끝나면 완전히 해체된다. 얼마나 로맨틱한가! 참고로, 배르비어 페스티벌의 주요 공연은 아래 스트리밍 플랫폼에서 실시간으로 제공하고 있으니 참고 바란다.
https://www.medici.tv/en/partners/verbier-festival-on-medicitv
특히 최근 몇 년간 임윤찬, 다니일 트리포노프, 마오 후지타 등 젊은 세대 연주자들이 많이 참여하면서 '새로운 아티스트들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루체른이나 잘츠부르크 같은 전통적인 페스티벌들이 기성 연주자들 중심이라면, 베르비에는 "앞으로 더 주목받을 만한 아티스트들"을 미리 만나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할까?
중년의 취미 (1) 음악 듣기에서 언급했듯이, 시애틀에는 심포니가 하나밖에 없어서 항상 아쉬웠는데, 베르비에에서는 2주 동안 매일 다른 조합의 연주자들을 볼 수 있다는 게 꿈만 같다. 더구나 브래드 멜다우 트리오 같은 재즈 아티스트까지 참여하니,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진정한 '음악 축제'라고 할 수 있다.
우선 베르비에에 도착하는 것이 새로운 경험이었다 우리는 장기 여행을 위한 짐이 많았는데 이동에는 기차를 이용 해야되기 때문에 짐은 별도로 배를 비워 호텔로 붙이고 우리 가족은 배낭과 캐리어만 들고 기차를 타서 이동 하는 계획을 세웠다. 제네바 공항에서 기차를 2번 갈아타고 케이블카까지 타는 여정이었다. 다행히 스위스 기차여행은 굉장히 쾌적하고 편안한 경험이었다.
베르비에 타운 자체는 전체적으로 평화로운 분위기로 페스티벌이라고 북적거리거나 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차이라면 악기를 매고 다니는 사람들이 자주 보이는 정도? 어쨌든 산에서 하이킹을 하거나 자전거를 타는 것 이외에는 별 할 일이 없는 동네다 보니 아티스트도 참가자도 온전히 음악에 집중할 수 있는 그런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서 베르비에를 선택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실제 감상기는 다음 글로 이어진다.
첫 번째 목표는 가족 모두의 음악적 지평 넓히기다. 특히 최근 피아노와 바이올린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딸 리오나에게는 다양한 연주를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중년의 취미 (3) 내 인생의 음악들에서 말했듯이, 음악은 특정 시점의 경험과 강하게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 7살 리오나에게 스위스 알프스에서 듣는 클래식 음악이 어떤 의미로 남을지 정말 궁금하다.
마스터클래스 참관도 빼놓을 수 없다. 연주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이 어떻게 음악을 가르치고 해석하는지 직접 볼 수 있다니, 이건 정말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경험이다. 더 자세한 정보는 베르비에 페스티벌 공식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두 번째 목표는 제대로 된 휴식과 재충전이다. 알프스의 웅장한 자연 속에서 듣는 음악이라니, 상상만 해도 힐링이 따로 없을 것 같다. Journey of Life의 핵심 취지인 "평소에 하지 않았던 일을 주로 한다"는 원칙에도 완벽하게 부합한다. 스위스 산골에서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보내는 시간이야말로 평소 시애틀에서는 절대 할 수 없는 경험 아닐까? 이미 기대감으로 설레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