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IMF는 없다, 대신 서서히 피가 마를 뿐

'펀더멘털이 견고하다'는 수사에 감춰진 진짜 청구서

by LIFOJ

환율이 급등할 때마다 뉴스에는 정부 관계자들의 똑같은 코멘트가 등장한다. "1997년 외환위기 때와는 다릅니다. 우리 경제의 펀더멘털(기초체력)은 견고하고, 외환보유고도 충분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당장 내일 나라의 달러 곳간이 비어 부도가 날 확률은 희박하다. 하지만 실시간으로 자금 조달 시장을 지켜보는 실무자 입장에서 이 말은 철저한 반쪽짜리 진실이다. 국가의 부도를 막았다고 해서, 내 지갑의 부도까지 막아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견고하다'는 튼튼한 방패 뒤에는 반드시 누군가 대납해야 하는 청구서가 숨겨져 있다.


1. [착시] 평균의 함정에 빠진 펀더멘털
정부가 말하는 펀더멘털은 무역 수지나 국가 부채 비율 같은 국가 전체의 '평균 체력'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치명적인 착시가 있다. 한 발은 펄펄 끓는 물에, 다른 한 발은 얼음물에 담그고 있으면 평균 체온은 정상으로 나온다.
지금 한국 경제가 딱 이렇다. 장부상 국가의 대외 건전성은 멀쩡해 보이지만, 그 평균값을 맞추기 위해 끓는 물을 견디고 있는 것은 개별 기업과 서민들이다. 국가 전체의 달러 빚이 버틸 만하다고 해서, 당장 외국산 밀가루를 수입해 빵을 구워 파는 자영업자의 원가 압박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국가가 건강하다는 지표가 개인의 생존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2. [착각] 마트에서 매일 적금을 깨서 결제할 수는 없다
펀더멘털을 방어하는 가장 든든한 무기로 늘 '세계 9위 수준의 외환보유고'가 언급된다. 달러 비상금이 넉넉하니 안심하라는 논리다.
가계 경제로 비유해 보자. 은행에 1억 원짜리 정기적금이 있다. 그런데 당장 오늘 저녁 반찬을 살 생활비 현금이 부족하다. 그렇다고 매일 마트에 갈 때마다 적금을 깨서 결제할 수 있을까? 외환보유고를 헐어 억지로 환율을 짓누르는 '스무딩 오퍼레이션(미세조정)'이 바로 이 적금을 깨는 행위다. 비상금은 통장에 가만히 찍혀 있을 때 든든한 법이다. 환율을 막으려고 당국이 달러를 시장에 내다 파는 순간, 냄새를 맡은 해외 투기 자본들은 오히려 "한국이 지금 달러가 급하구나"라는 약점의 시그널로 받아들인다.


3. [전가] 국가의 청구서는 개인의 영수증으로 찍힌다
결국 '거시 경제가 튼튼하다'는 말 뒤에는 누군가의 뼈아픈 비용 지불이 숨어 있다. 최고급 아파트의 화려한 외관을 유지하기 위해, 입주민들이 매달 턱없이 비싼 관리비를 내고 있는 것과 같다.
국가의 대외 신인도를 유지하려면 달러가 빠져나가지 않게 묶어둬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해외 자본에게 더 높은 이자를 얹어주며 매달리게 되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는 수입 물가를 고스란히 감당해야 한다. 국가라는 거대한 장부를 흑자로 유지하기 위한 수수료를, 평범한 서민들이 오늘 저녁 마트 영수증과 주유소 결제창을 통해 대신 내고 있는 셈이다.


4. [직시] 심장마비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라
우리 국민의 DNA에는 1997년 IMF 사태라는 끔찍한 트라우마가 있다. 그래서 환율이 오르면 반사적으로 '국가 부도'부터 떠올린다. 정부의 해명 역시 늘 '부도날 일은 없다'는 데 머물러 있다.
하지만 위기의 형태가 완전히 바뀌었다. 과거의 위기가 심장이 멎는 '급성 심장마비'였다면, 지금의 고환율은 매일 조금씩 피가 빠져나가는 '만성 출혈'이다. 당장 심장마비로 죽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건강하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나라가 망하지 않으니 괜찮다"는 안일한 위안제에서 깨어나야 한다. 진짜 위기는 국가의 부도가 아니라, 서서히 피가 말라가는 내 지갑의 부도이기 때문이다.



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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