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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광 May 29. 2024

푸바오가 도대체 뭐라고

역지사지


자이언트 판다 '푸바오'는 한국에 진한 자취를 남기고 중국으로 떠났다. 에버랜드는 마지막으로 푸바오를 보기 위해 인산인해를 이뤘고, 그중에는 내 지인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물었다. 고작 5분 남짓 푸바오를 눈으로 담기 위해 그 긴 시간을 기다리게 한 원동력이 무엇이냐고.


"관련된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돈을 받는 것도 아니며 가까이서 만져볼 수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저 멀리서 저게 푸바오인가? 알아보기도 힘들고 보는 것 밖에 못하잖아"


솔직한 대답이 듣고 싶어 일부러 긁어가며 물어봤다.


"그렇지 맞지. 처음 기다리기 시작했을 땐 이게 뭐 하는 건가 생각도 들었었는데 막상 눈으로 보니까 너무 좋은 거야. 4시간 기다리는 거 힘들었는데 보고 나니까 기다리길 잘한 것 같더라고"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넌 그런 거 없어?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거나 하지 않아도 보기만 해도 좋잘되면 좋겠는... 팬심? 같은 거"


팬심? 그런 게 없을 리가. 없었을 리가.




유독 운동과 거리가 먼 나는 남자들이라면 으레 자주 꺼내게 되는 축구 얘기에는 잼병이다. 어릴 때는 이게 뭐가 재밌는 건가 싶었고, 더 어릴 때는 뭘 해도 재밌을 때라 지금 뭐 하는지도 모르고 공만 보고 쫓아다녔더랬다. 손흥민이 월드 스타인 건 알지만 '손케 듀오'의 '케'가 누군지 모르고, 류현진이 아직도 메이저리그에 있는 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스포츠의 '맛'을 모르는 건 아니다. 머리에 털 나기 시작한 때부터 내 주된 관심사는 게임이었으니, TV만 틀면 나오는 축구 야구는 질색했지만 집마다 다른 케이블 채널 숫자를 달달 외워가며 온게임넷 스타리그는 챙겨봤다. 난 그때 2인자 홍진호의 팬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난 당시의 권위자에 도전하는 포지션을 가진 팀이나 선수를 응원했었다. 보통 그런 쪽은 도전과 패배를 반복하는 스토리를 가지고 있고, 난 거기에 감정이 입을 했었으니까. 그래서 만날 때마다 홍진호를 이겨대는 임요환이 그렇게 미웠고(3연벙 때는 거의 울었다), 내가 응원하는 팀들을 이기고 올라가 롤드컵 우승을 4번이나 한 페이커와 그의 소속팀 T1이 미웠다. 리스펙도 했다. 그들 또한 우승을 향해 도전하는 도전자 이기도 하니까.


게임 전문지 기자로 일하던 시절 내가 응원하는 팀과 페이커가 속한 T1이 만나 결승전을 치렀다. 그 결과를 기사로 써야 했는데, 그 결승전 또한 여지없이 T1이 우승을 했다. 착잡하게 시상식을 지켜보던 그때 T1소속의 한 선수가 우승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우승해서 기쁘고, 저희 팀원들과 오늘 같이 결승무대에 섰던 선수들, 그리고 리그에서 같이 경쟁했던 모든 선수들에게 고생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정확한 워딩은 이제 기억이 안 나지만 이런 느낌이었다. 세상에, 이제 20대 초반 나이에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니. 본인이 그만큼 고생해서였을까. 감정이입을 잔뜩 한 나는 그렇게 써진 기사의 마무리를 MBTI 'F 95%' 답게 했다.


'누구보다 치열했던 소년들의 봄이 끝났다'라고.


물론 데스킹에서 이 문장은 편집됐다 :(


'그깟 전자오락 대회 우승한 게 뭐 그리 잘난 거라고'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 말도 맞다. 정식 스포츠도 아니고 앞으로 그렇게 될 일도 없는, 제도권 밖의 서브컬처다. 그렇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에 재능 있는 소년들이 달려들어 그들의 소중한 시간에 열정이라는 기름을 들이부어 만들어낸 전자오락 대회라는 커다란 불꽃은 유난히 마음을 사로잡았다.




2023년 한국 프로야구는 LG트윈스가 최종 우승을 했다. 프로야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LG가 우승을?'이라며 놀랄 수도 있는 대목이다. '엘롯기(하위권 3팀을 지칭하는 별명)', 'DTD(내려갈 팀은 내려간다는 밈)' 불리다가 우승을 하기까지 팬들도 마음고생이 심했으리라. 그들은 옷장에 오랜 시간 묵혀뒀던 유광점퍼(가을에 하는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하면 입을 일이 없다)를 오랜만에 꺼내 입고 눈물을 흘리며 팀의 우승을 지켜봤다. 1994년 우승 이후 19년 만의 우승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푸바오를 잠깐 보기 위해 4시간씩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푸바오가 팬들에게 어떤 실질적인 이득이 되지 않듯이, e스포츠를 보는 내게 e스포츠는 내게 돈을 주거나 하지는 않으며, LG트윈스 또한 우승을 했다고 해서 팬들에게 떡 하나씩 돌리지 않는다.


그러니 '그깟 푸바오가 뭐라고'. 그 생각은 사실 내가 누워서 침 뱉는 짓과 같은 것이었다. 내가 게임이라면 일단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을 그토록 혐오했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잠깐이나마 그렇게 생각했고 지인에게 그렇게 질문했던 스스로를 반성했다.


역지사지. 참 쉽고 금방 해 볼 수 있는 것이지만 그만큼 잘 잊고 사는 것이기도 했다. 아마 많은 역지사지를 놓치고 살고 있었을 테지.




이제 떠난 지 두 달이 다 되어간다. 언론에서는 푸바오가 그 새 탈모를 얻었다며 연일 푸바오 소식을 나르고 있다. 어떤 사람은 안타까움과 그리움을, 어떤 사람은 떠난 지 언젠데 이제 푸바오 소식은 지겹다고 말하고 있다.


나 또한 그렇다. 푸바오가 귀엽다거나 보고 싶다고 느껴본 적이 없고, 지금까지 들려오는 소식을 지겹다고 느낀 적도 있다. 그렇지만 이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이해받고 싶어 한다면 내가 먼저 이해를 해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라는 것을 안다. 내가 좋아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는 것을 생각하면서.


받고 싶은 것이 있다면 내가 먼저 해주는 것. 내게 그 말은 이런 의미다.


그러니 푸바오, 뭐 한 번쯤은 한국에 다시 돌아와도 큰일은 안 나지 않을까?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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