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진짜 예뻤었는데."
"남자애들이 좋아하는애 투표했는데 너만 몰표받았잖아"
"걔네들, 아직도 너 얘기하면서 다투더라"
"네가 자기를 먼저 좋아했다느니 하면서..."
"다음번에는 꼭 나오라고 난리야 얼굴 좀 보여줘라!"
오랫만에 통화하는 H는 좀 많이 들떠서 신나게 말했다.
별로 말이 많은편이 아니고 표현도 덤덤한 H였는데. 어쩌면 내가 힘들다고 하니까 기분좋게 해주려고 더 오버했는지 모르겠지만. 예전의 나라면 H가 대충 말해도 기꺼이 웃어주고 신난척 대응해 주었을 거다. 이삼십대만해도 우쭐하며 대놓고 잘난 티를 내며 좀 더 얘기를 부추기고 흥미를 보였을거다. H는 그런 나를 기억하고 또 기대하며 오랫만에 전화를 걸었던 것같았다.
"그럴 일 없을거야. 70이 넘으면 그때쯤은 만날 수도 있어"
그리고 난 이렇게 말했던 것같다.
'내 얘기를 나 없는데서 하는 것도 싫고, 아직도 애들처럼 여자 가지고 실랑이 벌이며 수다 떠는 것도 싫고, 그 얘기의 중심이 나인게 정말 싫고, 보고 싶지 않다.'는 식의 말을 거침없이 했던 것같다. 아마 그랬을 거다.
그런 나의 싸늘하고 날카로운 반응에 H는 잠시 말을 잃었다가 거의 우는 소리로 말했다.
"걔들 그렇게 나쁜 애들 아냐. 네 말처럼 장난삼아 네 얘기한 것도 아니고. 그냥 다들 좋은 맘으로 추억을 떠올린거고. 정말 널 보고 싶어하는거야."
H가 말하는 '걔들'은 지금 나이가 오십이 다 되어가는 아저씨들이었다. 동창이라고 하기도 애매한 중고등학교 시절 한 동네 살던 애들 모임인데 딱히 모임이름이 있던 것도 아니고 길게 설명하기도 귀찮아 그냥 동창이라고 둘러대는 모임이었다. 성인 딱지를 붙이고 나서 대학도, 사는 동네도, 직장도 점점 달라지면서 3년에 한번, 5년에 한번, 그러다가 10년 넘어 한번 보았던게 전부였다. 그리고 또 어느새 10년이 흘러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과거를 돌아볼 시간이 많아져서 그런지 점차 만나는 횟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나만 빼고.
어쩌다 그 모임에 나가고 나면 H는 어김없이 전화를 해서 누가 나왔고 어떤 이야기들이 오갔는지 시시콜콜 들려주었다. 옛날을 추억하는 사람들이 만나면 지겨울 정도로 반복하는 '그때 그시절'이었다.
오랫만에 만난 모임에서도 어김없이 내 얘기가 화제가 되었고. 그렇게 H는 이런 저런 얘기를 전했던 거다.
그러다 예상치 못한 나의 냉랭한 반응에 매우 당황해 했었다. H는 내가 자기말을 매우 오해하고 있고, 자신도 그들도 전혀 나쁜 뜻이 없으며, 어릴적 순수한 맘으로 어울려 좋았고, 그러다보니 내 얘기를 하게 되었는데 보고싶어하는게 당연하지 다른 오해는 하지 않기 바란다 등 많은 말을 했다. H의 말 속에는 많이 실망하고, 안타깝고, 서운하고, 찜찜해하는 감정이 얽혀있었다.
"그래 알아. 나쁜 마음으로 한 건 아니겠지. 다들 이제 나이들어 여유도 생기고 옛 추억도 떠오르고 만나서 나쁠거 없겠지.", "그냥 내가 좀 바빠. 난 아직 그럴 여유가 없어서 그래. 하루 하루 사는게 버겁고 모습도 많이 변했는데. 내 옛날 모습을 떠올리면서 엉뚱한 기대를 하는 그런 자리에 나가고 싶지 않아. 한 70쯤 되면 예쁜 얼굴이나 외모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말할 필요 없을 거 같으니까 그때 만나자는 거였어."
내 말은 별 상관이 없었다. 이미 H는 기분이 상했고, 자신이 오해받고 있다 생각했고, 더불어 나를 빼고 H를 포함한 동창회 멤버들이 가볍고 우스운 사람들이 되었다고 여기며 계속 뭔가 나를 설득하고 싶어했다. 왠지 그런 통화가 낯설고 지겹게 느껴졌다.
"네가 뭘 말하려고 했는지 알아. 내가 너무 오버했나보다. 미안해. 내가 여유가 생기면 60대에도 만날 수 있을거야. 여하튼 지금은 아냐. 내가 여유도 없고 힘들어."
실제로 다음날 새벽부터 할 일이 쌓여있었고, 자정이 다되어 무척 지치고 피곤했었다.
H는 통화를 끝내기 전까지도 그들은 좋은 사람들이고 오해가 없기를 당부했다.
정작 내가 듣고 싶은 말은 조금도 들을 수 없었다.
많이 티 내고 호소하듯 말을 건냈지만, H는 끝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너 요즘 많이 힘든가 보구나. 남들 신경 쓰지말고. 지금은 너만 생각하고 챙겨."
결국 듣고 싶은 말은 꿈 속에서 아주 희미하게 들을 수 있었다. 아니 그냥 내가 중얼댔던 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