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가볍게 혹은 무겁게

어느 오후의 산책과 합리화

by 안명심


솔이의 보폭에 맞춰 걷다

발밑의 그림자가 예전보다 조금 더 느릿하게 따라오고 있는 것을 보면서

새삼 나이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흔히들 말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마음만은 여전히 이팔청춘이라고.

나 역시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주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그 경쾌한 문장이 어딘지 모르게 비겁하게 느껴지곤 한다.

그것은 어쩌면 거울 속의 낯선 나를 외면하기 위해 치는 얇은 커튼 같은,

일종의 서글픈 합리화는 아니었을까.


​마음만은 이팔청춘이라는 말은 달콤하지만 위험하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 내가 짊어지고 있는 삶의 무게와, 그동안 견뎌온 세월의 결을 무시하는 처사일지도 모른다.

스무 살의 서툼과 지금의 나이에서 느끼는 능숙함이 결코 같을 수 없듯,

나이라는 숫자는 단순히 쌓여가는 산술적인 데이터가 아니라 내가 통과해 온 계절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만약 나이가 정말 숫자일 뿐이라면,


그 긴 세월 동안 흘린 눈물과 땀방울은 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가.

"나이는 숫자일 뿐"이라는 말로 노화와 쇠락을 억지로 부정하기보다는,

내 몸과 마음에 새겨진 그 숫자를 정직하게 긍정하고 싶다.

이팔청춘의 들뜸은 없을지언정,

풍파를 겪어낸 나무만이 가질 수 있는 단단한 옹이와 깊은 그늘을 사랑하고 싶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솔이가 멈춰 서서 냄새를 맡는 동안 나도 잠시 숨을 고른다.


​나이를 먹으며 더 이상 무모하게 달리지 않는 법을 배우고, 뜨거운 열정 대신 은은한 온기를 품는 법을 익히리라

숫자가 늘어날수록 무릎은 조금씩 시려오고 시야는 침침해질지 모르나,

대신 한 사람의 생애를 깊이 있게 바라보는

마음의 눈을 열리라



나이는 결코 숫자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살아낸 삶의 '부피'이자,

오늘을 버텨낸 나에게 주어진 가장 정직한 훈장이다.
​비록 마음이 더 이상 청춘의 파동처럼 요동치지 않더라도 괜찮다.



지금의 나는 그때보다 훨씬 깊고 고요한. 바다를 닮아가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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