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안개 속으로 증발한 붉은 약속
을왕리, 노을을 분실하다
붉은 노을 한 점 얻으려 달려간 서쪽 끝
바다는 온통 젖은 솜뭉치 같은 안개에 잠겨 있었다
수평선이 지워진 자리엔
타오르는 불꽃 대신 눅눅한 수증기만 가득했고
기다리던 태양은 끝내
그 두꺼운 벽을 뚫고 나오지 못했다
운동화 앞코를 적시는 바닷바람은 차가운데
기대했던 색깔을 빼앗긴 눈동자엔
뿌연 무채색의 허기만 고였다
빈 손으로 돌아오는 길
백미러 속의 을왕리는
다 읽지 못한 소설의 뒷장처럼
안갯속으로 자꾸만 흐릿하게 멀어졌다.
기대를 품고 달려간 서쪽 끝에서 마주한 것은 붉은 환희가 아니라, 모든 색을 집어삼킨 우윳빛 정적이었다.
때로 자연은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을 허락하지 않는 것 같다.
미처 마침표를 찍지 못한 문장처럼,
그날의 풍경은 내 마음 한구석에 지워지지 않는 눅눅한 여백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