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드테크가 필요한 이유
가공식품 회사들은 국산 원료 사용에 본질적으로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가격이 합리적이고 수급이 안정적이며, 무엇보다 표준화가 잘 되어 있다면 당연히 국산을 선택할 것이다. 문제는 현재 국산 농산물 중에서 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품목을 찾기 어렵다는 점이다.
농대 전공자로서 농업 현장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가공식품 회사들이 생각하는 시장 논리와 농업계의 인식은 완전히 다른 세상에 있다는 것을 절감한다. 이 흐름이 계속된다면 국산 농산물과 가공식품 산업 간의 괴리, 즉 디커플링(decoupling)이 완전히 굳어져 버릴 것이다.
국산 밀의 상황이 이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연간 생산량이 2만 톤만 넘어가도 남아돌기 시작하고 처치 곤란한 상태가 된다. 반면 수입 밀은 매년 200만 톤을 들여와도 전량 소진된다. 이것이 단순히 가격 이슈만이 아니라는 점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시장을 바꾸려면 단일 상품, 단일 가격 구조에서 벗어나야 한다. 용도와 품질에 맞게 유통 가격이 차별화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중국의 오상미(五常米)는 맛이 뛰어나 프리미엄으로 인정받으며 일반 쌀의 5배 이상 가격으로 유통된다. 쌀 유통과 이용을 선진화하려면 저가 쌀부터 고급 프리미엄 쌀까지 가격을 차별화하여, 용도와 품질, 취향, 기호도에 맞게 선택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밀도 마찬가지다. 국산 밀을 단일 규격으로 밀어붙일 것이 아니라, 용도에 따라 차별화하고 국산이 접근할 수 있는 용도만 집중 공략해서 시장의 교두보를 확보해야 한다.
이런 가격 차별화와 고급화를 추진하려면 유통 SKU별 표준화와 품질관리가 필수적인데, 바로 여기서 심각한 수준 차이가 발생한다.
처음에 국산 밀을 생산할 때, 용도를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튀김과 부침도 있고, 빵도 있고, 국수도 있고, 수제비와 만두피, 떡볶이 떡까지 있으니 '어디든 쓰이겠지' 했다. 근데 실제로는 각각의 용도에 따라 밀가루의 품질 규격과 등급 차이가 엄존한다.
국수도 소면, 우동면, 칼국수면, 생면 등 여러 가지 종류가 있고, 빵도 제과용, 케이크용, 식빵용, 베이글용, 페이스트리용 등 다양하게 있다. 농가에서는 그냥 "빵도 되고 국수도 된다"고 해서 금강밀을 심는데, 빵과 국수에는 요구되는 글루텐 함량과 회분 함량 등이 달라서 그냥 심는다고 아무거나 다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현장에서 수매할 때 이걸 기준 등급 가려서 수매를 했어야 하는데, 덮어놓고 수매를 하니 국산 밀은 빵용, 국수용 규격에 맞지 않아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골칫덩이가 되고 만 것이다.
쌀도 지금은 밥으로만 먹었기 때문에 단일 등급 체계를 유지하는 것이지, 쌀 가공품 시장이 확대되면 시장에서는 분명 용도별로 다른 특성의 품질을 요구할 것이다. 국산 쌀이 그 품질 등급에 맞추지 못한다면 가공품 시장은 고스란히 수입쌀 차지가 되고 말 것이다.
이런 문제가 있는지 아무도 모르고, 그냥 덮어놓고 "콩으로 두유를 만들면 어떠냐", "가루미는 제분 비용이 덜 들어가니 쌀 가공식품으로 많이 쓸 수 있지 않냐"는 얘기나 하는 게 농식품부와 정부 관련 부처들, 기존 농업 관계자들이다.
정작 어떤 용도에 어떤 규격의 원료가 필요한지, 그걸 어떻게 생산하고 수매하고 분류해서 유통해야 하는지에 대한 개념은 전혀 없다.
원래 내 계획은 이러하다. 먼저 품질 등급을 나눌 필요가 없는 영역의 시장부터 접근해서 키우자. 내가 취급하는 쌀 물량이 커지면, 그때부터 용도별, 품질별, 규격별 차등화를 해서 쌀 가공식품 생태계를 구성하는 것이다.
가공식품 회사들은 벌써부터 성급하게 용도별 쌀 혹은 쌀가루를 달라고 얘기를 하고 있다. 그런 걸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개념 자체도 모르는 판에 그런 고차원적인 쌀 원료 공급이 가능하겠는가?
푸드테크라고 해서 AI를 활용하는 거창한 것만 있는 게 아니다. 한국 현실에 필요한 건 거창한 것보다도 실제 현실에서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이런 표준화 기술이다. 그리고 매우 간단하지만 꼭 필요한 기술들이 여럿 있다.
이런 건 모르고 다들 죄다 남들이 말하길 유명하고 멋진 것들만 하려고 했으니, 푸드테크가 실속이 없다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
진짜 전문가가 이런 걸 기초부터 만들어야 하기에, 내가 꼭 이걸 해야겠다고 하는 것이다. 남들이 화려해 보이는 것에 현혹될 때, 나는 이 산업의 무너진 기초를 다시 세우는 일에 매진할 것이다.
진짜 필요한 푸드테크란, 국산 농산물과 식품산업을 이어주는 기술이다.
정부가 집중적으로 신경써야할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