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기억은 복숭아씨앗 같은 단단한 것들을 녹아내리게 하지, 입술에 닿은 머그잔 온기가 코에 닿듯이. 사토 사이사이 봄볕 스며들듯이. 사람들이 꽃을 말할 때 너는 흙을 떠올릴 줄 알았지. 박수처럼 환한 꽃이 필 때 느릿하게 움트는 촉촉함을 잊으려 하지 않으려 애쓰는, 너는 그런 사람이었지. 그런 네 이름이 노트 한 구석에 적혀있는 이유를 한참 골몰했다. 함께 찍힌 큼직한 느낌표를 두고, 물음표를 떠올렸다.
노트를 펼쳐본 이유와는 부합하지 않았던 뜻밖의 조우. 떠올리기만 하는 일을 만남이라 할 순 없지만. 왠지 그려진 낯선 곳에서 너를 만났다. 네가 선 샛길 기억을 찾으려 비적거린 스크롤이 한참이었다. 캘린더를 넘기고, 사진첩을 밀어 올리고, 십수 년 퇴적한 시간을 퍼 올려야 했다. 그 아래 깔려 종잇장처럼 얇아진 향수가 술기운처럼 떠올랐다. 몇몇 강박을 잊고 기억을 들쑤셨다. 그제서야 그 속에 찍힌 몇 장면들을 그릴 수 있었다.
읍내 터미널. 이어진 무결의 눈밭. 그 위에 하얗게 눌린 발자국. 네 흔적을 헤치지 않으려 했던 걸음. 오솔길 끄트머리를 따라 걷던 두 애송이들의 뒷모습이 점점 가까워졌다. 네 부스스한 검정 단발머리가 바람에 흐트러졌고 고개를 돌린 너는 칭 둘러 감은 목도리 속에서 코를 한 번 훌쩍거렸지.
걸음을 늦추고 싶었다.
너는 햇빛이 싫다며 창가자리에 나를 앉히고는 코트 주머니에서 두어 개 잘 익은 귤을 꺼내어 건넸다. 나는 귤꼭지 하나를 떼어내곤 물었다. 귤꼭지를 심으면 귤나무가 자라는 걸 아느냐며. 너는 뻥치지 말라며 반짝거리는 눈으로 답했다.
"귤씨 본 적 있어?"
"말도 안 돼. 진짜?"
실없는 거짓말이 그날따라 천연덕스러웠고, 네 웃음은 아이 같았다. 큼직한 느낌표 하나, 또 물음표와 함께.
그리고 곧 함께 배꼽 빠지게 웃었던 순간들이 몇몇 단어들로 되어 스쳤다. 노부부와 워낭소리. 김치찌개와 계란말이. 마른오징어와 병소주. 라푼젤과 자수정...
그리고 어느 날 벽을 배게 삼아 영화를 보고 있던 나의 모습이 보였다. 어느새 일을 마치고 돌아온 너는 내게 다가와 물었다. 뭘 그렇게 재밌게 보냐며. 그러면서 내 어깨에 기대어 나란히 누웠다. 한동안 숨을 참았다. 설마, 심장 소리가 네 귀에 닿지는 않았겠지.
그날의 적막. 눈에 갇혀있던 세상. 너와 같길 바랬던 시간표. 터미널 대합실. 검정 코트와 검정 목도리. 눈길과 붕어빵. 고백이나 다름없던 애송이 농담. 농담 같은 안녕. 두어 시간 러닝타임으로 압축된 필름은 그렇게 끝났다. 삽화 한 장 끼워지지 않은 짧은 엔딩 크레딧은 안녕 뒤로 공유하지 못한 검정 세월로 덮여 있었다.
공교롭게도 책상 한 구석엔 아무 생각 없이 올려둔 귤 하나가 있었다. 그래. 한동안은 귤을 쥐고선 구태여 꼭다리를 떼어내곤 했지. 부질없는 의문을 벽지에 걸어두곤 잘게 나뉜 한 때의 소망을 주섬주섬 모아 촛불 켜듯 했지. 네가 건넨 그것을 그 무렵 그곳에 곱게 심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날의 거짓말을 초연하게 믿었더라면, 그래서 나조차 속았더라면?
하나의 이름에 다른 하나의 이름을 새겨 넣는 힘. 그것은 단단한 지면에 뿌리내린 씨앗의 것이자, 자의반 타의반 파종자의 것이나 다름없다. 딱히 반박의 여지를 찾을 수 없어서 이름과 이름의 인과를, 나는 내 기억의 파종자가 된 너로 하여 일단락 지었다. 눈밭 위에 검정으로 빛나던 네 흔적이 문득, 한 쌍의 느낌표와 물음표로 나란히 찍혔다.
2010년 파종자에게.
2026년 A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