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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초록 Feb 05. 2024

방실방실 망실망실

누구나 그럴 테지만 나는 나를 잘 설명하지 못한다. 내가 하는 행위의 연유를 스스로 알지 못한다. 하고많은 것들을 놔두고 왜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냐고, 정체도 없고 무슨 징후 같은 것도 없는 누군가가 내게 자주 물었다. 그럼 나는 길게 고민하면서도 머릿속이나 마음속에 무엇을 갖고 있지는 않는다.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나냐면, 마음에 든 건 없는데 마음은 희뿌연 에어로졸 같이 부유하고, 마음이 부유해지는 것 같아서 무섭게 뿌듯해진다. 그 모든 풍광을 고전적으로도 현대적으로도 묘사할 수 없으므로 나는 나를 잘 설명하지 못하게 된다.


묘사할 수 없다는 것은 어느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묘사할 수 없는 것은 이것이 묘사될 수 없음을 드러냄으로써 간접적으로 묘사된다. 표현되지 않으므로 우리가 감지할 수 없지만, 묘사할 수 없다고 선언함으로써 그것은 분명히 존재하게 되기 때문이다. 마음이 그러하고, 계획이 그러하고, 삶이 그러하다. 따라서 내가 내 마음을 설명하는 방식은 난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제 마음을 모르겠어요, 마음을 표현할 방법이 없어요, 말하는 것이 내가 마음을 묘사하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앞으로 어떻게 살지 가늠은 했는데 당신께 단언하지 못하겠어요. 제가 이렇게 살아오긴 했는데 그 시간을 함축할 수는 없겠어요. 마음이 그렇고 계획이 그렇고 삶이 그래요.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한다. 지금은 겨울이니까, 겨울에는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생각한다. 보통 이렇게 곰곰이 생각하는 것을 우리는 고민한다고 표현한다. 근데 무엇을 고민하냐고 묻는다면 또 묘사할 방법은 없다. 얼추 답은 있는데 그 답을 묘사할 수가 없어서 그게 답이 될 수 있을지를 또 고민한다. 그렇게 고민이 꼬리를 물고 늘어지면 눈을 슬쩍 감고는 자세를 고쳐 앉게 되는데, 다시 눈을 뜨면 생각은 엉뚱한 곳에 가 있다. 이를테면 귤껍질로 화장실에 타일을 깔았다든지, 빵을 오븐에 살짝 데웠다가 호주머니에 넣고 외출을 했다든지, 하는 생각. 겨울에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생각을 했었기 때문에.


어느 날은 또 무슨 생각을 했냐면, 내가 도서관에 앉아서 시집 한 권을 읽다가 배가 슬슬 아팠는데, 몇 장만 책장을 넘기면 다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시집이라 흐름 끊길 걱정은 필요 없는데도 흐름이 끊길 수도 있겠다는 걱정에 조금만 참기로 하고 자리에서 계속 책장을 넘겼다. 그날 도서관에는 유달리 사람이 많았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앉을 의자가 없어서 계단에 앉거나 벽에 몸을 기대고 책을 읽었다. 그러다가 문득 이 건물에는 의자가 몇 개나 있을까 생각하다가, 이 건물에는 변기보다 의자의 수가 더 많다는 당연한 사실을 곱씹다가, 만약 의자에 앉아있는 모든 사람이 동시에 배가 아파진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했다. 그런 상상을 하니까 소리 없이 웃음이 나왔다. 잽싼 사람은 어디에나 있으니까 분명히 가장 먼저 칸 안에 들어가 문을 잠글 테고, 나머지 사람들은 태연한 척 참을 수 있다는 척 휴대전화만 들여다보고 있겠지.


그런 간간하고 발칙한 상상은 오래가지 않았고, 나는 다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주변은 무심하게 조용했다. 난방 돌아가는 소리가 가득 차있을 공간에서, 그러나 아무도 알지 못하다가, 띠리리 난방 꺼지는 소리가 나서야 찾아오는 어색함에 그 소음을 알아챌 공간에서 겨울은 겨울이 아니게 되었다. 묘사할 수 없는 것은 묘사될 수 없음을 드러냄으로써 묘사되니까. 소음이 그렇겠지. 겨울을 없애는 그 소음이. 표현되지 않으므로 감지할 수 없지만, 묘사할 수 없다고 선언함으로써 분명히 존재하게 되기 때문에. 겨울이 아니므로 겨울에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고민은 부질없는 일이 되었다. 인내하는 사람들이 화장실 앞에 인산인해를 이루는 일은 없었다. 겨울이 아니었으니까. 화장실 앞이 아니더라도 각자의 의자에서 인내하며 있을 테니까. 살고 있을 테니까.


입을 예쁘게 살짝 벌리고 자꾸 소리 없이 밝고 부드럽게 웃는 모양.

예문: 아기가 귀엽고 사랑스럽게 방실방실 웃는다.


내 마음은 어떤 말로 묘사해볼까. 줄기차게 굴리고 굴린 마음이 글자라는 엄연한 실체로 현현될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눈앞에 띄우고 싶다. 그러면 나는 이것을 내 마음이라고 한 다음 밑줄을 쳐가며 끝까지 읽겠지. 아마 독서 도중에 벌떡 일어나 화장실에 다녀온대도 흐름 끊길 걱정은 필요 없을 것이다. 고체인지 액체인지 기체인지, 상변화 중인건지, 알 수도 없는 편린이 무수하게 떠올라서 각각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을 것이다. 본래 가루처럼 둥둥 떠다녔던 건지, 원래는 그럴싸했는데 어쩌다가 처참해진건지 몰라서 구경만 하고 말테다.


차가운 이성과 뜨거운 감성에 공감하지 않는다. 난 시리도록 차가운 감성을 여러 번 느낀다. 도무지 설명할 수 없게 마음껏 행동하는 경우의 마음도 겪은 적 있다. 적어도 무슨 말인지는 알고 싶은데 나름 웅장한 저의를 갖고 갈겨쓰는 글도 있는 것이다. 지금이 그렇고 마음도 그렇다. 위로나 안온과는 거리가 먼 저온의 마음. 굼뜨고 어지러운 달팽이 껍질. 그럼 나는 젊은 작가의 파격적인 시집을 펼친 것 마냥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파격적이라면 얼마나 파격적이겠어 했다가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한데 긁어 모은 다음에


이게 제 마음입니다


하고 이곳저곳 던져 버릴 것 같다. 마음에 든 건 없는데 무섭게 뿌듯해져서는 입을 예쁘게 살짝 벌리고 부드럽게


제가 틀을 깼습니다


얼버무리고 그럴 것이다. 그 모든 풍광을 고전적으로도 현대적으로도 묘사할 수 없으므로 나는 나를 잘 설명하지 못하게 된다. 또 잊어버리고 책장을 넘긴다. 잊고 잊고 잊고 잊고 잊다가 겨울이 아니게 된다. 내가 한 자도 허투루 놓지 않고 이렇게 열심히 썼는데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마음이 그렇고 계획이 그렇고 삶이 그렇잖아요. 다들 그러고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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