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인형은 아무래도 나인 것 같다
아이돌 덕질을 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인형을 하나쯤 갖게 된다. 음식 먹기 전에 최애사진을 두고 사진 찍는 것을 포카(포토카드) 예절이라고 부르는데, 그런 유행이 있기 훨씬 전에 인형이 있었다. 인형은 최애를 닮은 모습이거나, 요즘엔 최애를 닮은 동물의 모양을 하고 있다. 내 최애는 강아지를 닮았는데 고래를 좋아해서 강아지가 고래 옷을 입고 있거나 고래 모습을 하고 있는 인형을 갖고 있다.
군산에서 오늘 하루치 여행을 시작하기에 앞서 작은 무인 소품샵을 들렀는데, 너무나도 취향 저격의 연보라색 토끼 인형을 발견했다. 마침 입고 있던 보라색 패딩과 색깔도 거의 똑같은, 이상한 귀 모양을 한 보라색 토끼였다. 원래도 소품샵에 들어가서 뭘 사고 나오지 않으면 안 되는 이상한 습관을 갖고 있긴 한데, 보라색 토끼 인형이라니... '이건 꼭 사야 해!' 하고 결제를 했다.
"군산 스탬프 투어"를 하면 초원사진관에서 기념품을 준다길래 하루종일 15,000보 넘게 걸으면서 스탬프를 찍으러 다녔는데, 보통 이렇게 최애 인형을 들고 인증샷 찍는데 오늘은 나의 보라색 토끼 인형도 함께 사진을 찍었다. 인형과 사진을 찍는 이유는 내 얼굴은 보여주고 싶지 않지만 내가 그곳에 다녀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고, 또 최애의 분신과 함께 왔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나만의 보라색 토끼 인형이 있으니 나의 인형이 최애인형과 나란히 인증샷을 찍었다! 최애 인형 혼자 있거나, 다른 멤버들 인형이 아닌 나의 분신과 최애가 나란히 있다니...!! 별 것 아닌 것 같겠지만 사실 나에게는 엄청난 의미로 다가온다.
얼마 전에 진행한 상담에서 나는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이유 중에 '존경'이 크게 작용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상담선생님이 좋아하는 사람을 '존경'하는 사람은 그렇게 흔하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연인이나 부부관계는 동등한 관계인데, 존경하는 사람과는 필연적인 상하 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나는 누군가를 좋아할 때 이미 '을'이 되기를 자처하면서 시작하는 사람인 것이다.
사실 최애도 마냥 좋아한다기보다는 좀 존경하고 있다. 그는 나보다 어리지만 또렷한 사상을 갖고 있고, 그것을 말로도 잘 표현하며, 그림도 잘 그리고, 잘생긴 데다가, 예의 바르고, 노래와 춤도 끝장나게 해낸다. 바쁘고 힘든 스케줄 가운데서도 여러모로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 존경할 만한 부분이 많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언제나 덕질을 할 때도 좀 낮은 자세로, 혹은 최애를 엄청 높여주며 좋아했는데, 저렇게 내 인형과 최애가 나란히 있는 모습을 보니 왠지 나도 나를 주장하는 것만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둘이 너무 잘 어울리는 비주얼이라 :) 그것도 기분이 좋았다.
최애를 좋아하면서 나는 많은 것들을 시도하고, 그런 시도들을 하면서 나의 색깔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실제로 좋아하는 색인 연보라를 더욱 또렷하게 좋아하게 된다든지,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기도 했다. 또 글을 적극적으로 쓰면서 독립출판도 해보고, 지금도 글로 많은 시도를 하고 있는 중이다.
최애를 존경하고 좋아하는 마음은 아직도 있지만, 그 속에 이제 나의 모습도 조금씩 드러나는 기분이랄까. 요즘에는 그래서 덕질에 대해서도 조금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최애가 싫어졌다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나에게 집중해 주는 것도 재밌어졌기 때문이다. 탐구하다 보니 나도 최애 못지않게 얘기할 것도 많고, 보여줄 것도 많은 사람인 것 같다. 그리고 또 함께 지내기에도 재미난 사람인 것 같고.
보라색 토끼 인형이 없어도 즐거운 여행이었겠지만, 오늘은 왠지 보라 인형과 함께여서 더욱 행복했다. 이 보라 토끼 인형이 나에게 주는 의미가 꽤나 큰 것 같아 좋은 여행 마무리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