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세월, 전을 부치며 깨달은 것
초등학생이던 어린 시절부터,
나는 매해 명절과 제사 때마다 큰집에 가서
음식 준비를 도왔다.
오전에는 우리 집 음식을 하고,
오후가 되면 큰집으로 건너가 큰집 음식을 준비했다.
큰집에도 딸이 있긴 했지만,
사촌언니는 뭐가 그리 바쁘신지
한 번도 음식을 준비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사촌오빠도 둘이나 있었지만,
음식 준비는 늘 큰어머니와 내 몫이었다.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그렇게 살아왔다.
왜 그렇게 해야 했는지는 몰랐다.
아마도 딸로서, 엄마를 돕고, 어른을 돕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어린 마음으로 감당해야 했던 일들이
너무 많았고, 너무 일찍 어른의 책임을
떠맡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릴 적부터, 나는 집안에서
'여자가 해야 하는 일'을 모두 해왔던 것이다.
시간은 흘러 이십 대 후반이 되었다.
큰집에도 사촌오빠가 결혼을 하고,
며느리가 들어왔다.
드디어, 나도 해방되는 걸까?
이제는 우리 엄마만 도우면 되는 걸까?
그 해 첫 명절, 나는 큰집에 전을 구우러 가지 않았다.
명절 당일,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큰어머니께서 한마디 하셨다.
"어제 왜 음식하러 안 왔어?"
당황스러웠다.
"언니가 있잖아요~"
"언니는 임신했잖아!"
말이 막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표정이 굳어졌고,
속이 끓는 듯했다.
화가 잔뜩 난 채 집으로 돌아와 엄마에게 털어놓았다.
"엄마! 큰엄마가 어쩌고저쩌고...."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내 마음을 더 찌르는 말이었다.
"엄마가 못하니, 네가 해야지."
아니, 엄마.
엄마가 못하니 내가 해야 한다고요?
가뜩이나 화가 나서 위로를 바라는 마음이었는데,
그 말은 나를 더 서럽게 만들었다.
눈물이 터져 나왔고,
가슴속에서 분노와 억울함이 뒤섞였다.
'그걸 말이라고 해!'
도대체 이 집에서 내 존재는 무엇일까?
사람들은 내가 아들 두 명 있는 집의 막내딸로 태어나
사랑만 받고 자란 줄 알겠지만,
현실은 달랐다.
본인 딸 귀한 줄 모르는 엄마 밑에서,
여자로서의 고귀함은 잊고,
시골 옛 어머니들의 팔자를 따라 살아왔다.
엄마는 나를 고생시키지 않고,
고귀하게 살길 바라는 마음이셨을 것이다.
하지만 행동은 그 바람과 달리,
그들의 팔자를 그대로 대물림하고 있었다.
거진 20년 동안,
큰집에 가서 전을 부치며 지나온 세월이
한 순간 덧없게 느껴졌다.
보람도, 인정도, 감사도 받지 못한 시간.
그 무게가 마음 한쪽을 누르고 있었다.
그 뒤로 나는 한동안 큰집에 가지 않았다.
나는 그날, 비로소 깨달았다.
누군가의 기대와 '당연함'속에 갇혀
자신을 잃어가는 삶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그리고 이제는,
스스로를 지킬 권리가 있다는 사실도.
세월 속에서 잊었던 나의 목소리를,
나는 조금씩 되찾아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