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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율 May 21. 2024

나는 오늘부터 무급 휴직자입니다.

돈도 공간도 없지만 책은 사고 싶어 《돈의 속성》 독후반성기

나의 하루는 끓이고 씻는 것으로 시작해 닦고 줍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아이가 내 아침을 깨우면 차분히 인사를 나누고 기저귀를 갈고 포트에 물을 끓이고 못다 한 설거지를 하며 아이의 아침으로 먹을 채소찜을 준비합니다. 나는 천천히 의식을 수행하듯 아이를 씻기고 의자에 앉혀 음식을 하나씩 내어놓습니다. 한꺼번에 내어놓으면 집중하지 못하고 던져서 한 종류의 음식을 조금씩만 줍니다. 아이의 보챔에 조바심 내지 않도록 클래식 음악을 켭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오늘도 나와 아이의 먹고 자고 싸는 일에만 관심을 둡니다. 가장 작고 중한 일들입니다. 그래서 소중한 일들인가 봅니다.

'돈의 속성'이라는 책을 이벤트 당첨으로 받았습니다. 같은 월령 엄마와
단둘이 오붓한 책모임을 만들어 함께 이 책을 읽고 있습니다. 혼자서는 읽을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랜 두려움과는 별개로 꽤나 쉽고 재밌게 읽힙니다. 챕터와 문장의 길이가 짧고 간결하여 핵심을 잘 전달합니다. 쉽고 재밌고 유익하며 신선합니다. 돈맹, 경제바보인 제게도 이렇게 읽히니 명불허전 베스트셀러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끄덕이게 됩니다.

"정규적인 돈과 비정규적인 돈이 싸우면 언제든 정규적인 돈이 이기기 마련이다. 규칙적인 수입의 가장 큰 장점은 미래예측이 가능해진다는 점이다. 금융자산의 가장 큰 적인 리스크를 제어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장점이다."

- <일정하게 들어오는 돈의 힘>, 《돈의 속성》 중에서


이번 달부터 나는 무급 휴직자입니다. 신용카드 대신 체크카드로 규모 있게 살아보고자 남편과 친구에게 공언해 놓고는 정작 '혹시나'하는 마음에 카드를 여태 자르지 못했습니다. 이제 한 사람의 벌이로 살아야 하니 무급 육아 휴직 기간 동안에는 저축을 꿈도 못 꿉니다. 그런데 신용카드와 계속 함께한다면 지출을 줄일 수 없습니다. 알고 보니 자르고 해지하는 것보다 6개월 그냥 두면 자연스레 정지되는 쪽이 신용등급 변동도 없이 더 좋다고 합니다. 대출이 많고 변동 없는 신용등급이 중요한 시점인 우리는 그리해야 합니다. 글을 쓰다 말고 신용카드를 삼성페이에서 모두 지웠습니다. 요즘은 실물카드를 잘 쓰지 않으니 자르는 대신 삭제하면 되는 것이군요.

"왜 그렇게 책에 집착해?"

왜 온라인 책모임을 3개씩이나 하고 아이와 도서관에 가는 게 그리도 설레는지, 왜 당근에 나눔 나온 책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정된 공간 안에 책과 먼지가 늘어감에 따라 사라지는 공간과 건강, 재정에 대한 그의 걱정도 충분히 이해하려 애씁니다. 만. 마음 한구석 내가 사랑하는 대상, 나의 꿈이 인정받고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는 서러움과 외로움이 자꾸만 복받칩니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더 책에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책은 오래도록 사랑과 열망의 대상이었을 뿐 갈등의 씨앗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책으로 연결된 내 벗이 남편과 책카페에 가서 말없이 책을 오래 함께 읽고, 책을 선물해 준다는 얘기를 들으면 그 친구는 아, 있는 그대로 참 사랑받고 있구나, 행복하겠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거였어요. 내가 부정당하는 기분. 왜 나는 책이 곧 나라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요? 내가 들인 책에는 내 꿈, 열망, 욕망, 상처, 기억 내 과거와 미래가 모두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건 허상이죠. 관계와 공간을 해친다면 버리는 게 맞습니다. 나는 집에 있는 책을 처분할 생각입니다.

여러 방법을 생각해 봤어요. 그냥 분리수거날에 다 갖다 버리면 가장 쉽고 빠르죠. 그런데 아까워요. 소중했잖아요, 우리. 중고서점에 내다 팔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엄격하죠. 못 버리고 가져오는 물건이 더 많고, 이고 지고 캐리어에 들고 가는 수고도 만만치 않습니다. 택배로 매입하는 서비스도 일일이 상태를 체크해 입력하는 게 꽤나 귀찮습니다. 몸담고 있는 책모임에 나눔을 해보았습니다만 택배비를 받기 부끄러워 자부담을 하다 보니 오히려 시간과 노력, 비용 지출이 더 큽니다. 개인적인 만족감과는 별개로 경제적인 득실을 따지자면 그렇습니다. 당근에 권당 천 원에 내놓으니 자기가 다 사겠다는 사람이 있습디다. 그런데 왠지 업자 같아서 또 팔기가 싫어집디다. 저도 참 질척대고 꼬롬하죠.

우리는 글에, 책에 가치를 담는 작업을 합니다. 많은 의미를 심습니다. 그것이 나와 지구의 환경에 부담되지 않도록 할 방법이 늘 고민입니다. 기부하면 되겠죠. 계속 지금처럼 빌려보며 더 늘리지만 않으면 이사 갈 때 어떻게든 버리겠죠. 그런 진전 없는 고민만 하다 귀인을 만났습니다.

"세 번 빌리고도 계속 읽고 싶으면 저는 그때 사요."

무릎을 탁 쳤습니다. 대출 연장을 세 번 하고도 계속 읽고 싶은 책이면 그때 구입을 한다는 이야기. 물론 빌려보는 일은 내 고향말로 참 '상그럽다.' 빚쟁이도 아닌데 내내 대출 기한에 쫓기며 읽는 일은 속독에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상당한 스트레스예요. 스트레스받으려고 독서하는 게 아니라 쉬려고 독서하는데 지치죠. 대출 검색부터 오가는 차비며 시간까지 품도 많이 들어요. 그래도 집이라는 공간은 정갈하게 유지할 수 있겠죠. 종일 집에서 아이와 걱실걱실한 하루를 아름답게 엮어가고픈 욕구가 가장 큰 지금은 그게 가장 중합니다.

왠지 이 공간에서 금지된, 아무도 반기지 않을 것 같은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 '돈'과 '책'이 주는 곤란함에 대하여 '책모임'에서 얘기하다니요. 눈치가 없거나 무례한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도저히 글을 마무리짓지 못하게 되어버렸어요.

"너 되게 남얘기처럼 듣는다?"

다시는 복직하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며 살고 있어요. 학교에 처음 자녀를 보낸 친구가 제게 서운함을 가득 담아 그렇게 말했습니다. 친구의 자녀 학폭 상담을 휴직기간에는 정말이지 하고 싶지 않았던 건 사실입니다. 아이를 먹이며 건성으로 듣는 내 태도에서 내가 다시는 일 안 할 사람처럼 보였나 봐요. 정말 그러고 싶었어요. 아, 정말이지, 다시 일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가야죠. 덜컥 되어버린 청약, 어마어마한 대출. 투자 없는 안정지향주의 외벌이 육아. 돈을 위해 일하는 때가 이 일을 떠나야 할 때라고 생각하며 시작한 지 겨우 11년 만에, 아니 이제야 일하는 마음을 배웁니다.

'자연주의 출산, 2년 모유수유, 2년 무염식, 3년 가정 보육...'

엄마로서 좋다는 건 다 해주고 싶었나 봅니다. 3년 가정보육만은 경제적인 이유로 어렵게 되었네요. 치열하게 얘기를 나누어 2년은 가정 보육을 하기로 했는데도 자꾸만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아이에 대한 결정 중 책을 제외한 다른 건 다 지지해 주는 그인데도 우리의 경제적인 상황상 3년 휴직은 불가능하다고 선을 긋습니다. 그래서 읽었습니다. '돈의 속성'. 아껴 써보자고. 살아남아보자고.

3년간 아이 곁에 못 있어줘서 속상합니다. 큰 책장 하나 못 들여서 책이 정리 안되어 속상합니다. 반려인이 함께 책을 읽고 얘기 나누는 대신 핸드폰만 보고 있어서 속상합니다. 책을 사랑하는 마음을, 성장하고픈 욕구를, 더 나은 '우리의' 내일을 만들고자 하는 내 열망을 반려인도, 부모님도 더 이상 아름답게 여겨주지 않는 것 같아 서운합니다.

나는 화가 나면 글을 씁니다. 우울하면 방을 닦습니다. 답답하면 정리를 합니다. 오늘은 속상해서 책이나 읽고 필사하렵니다. 절대로 읽고 싶지 않았던 이 책 '돈의 속성'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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