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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혼자가 좋은데, 함께는 더 좋다

빈 둥지 준비하며, 힐튼 호텔 무료 숙박권은 함께

by 여행하듯 살고

마흔 넘은 아줌마가, 이십 대처럼 호스텔에 잔다고?

뭐.. 그럴 수도.

진짜 그 방법 밖에 없을까? 어...여행 취소할 거 아니면.

남편이 좋은 호텔 무료 숙박권 있으니 하루는 거기서

자라고 했잖아, 이런 기회 놓치지 말고 너도 한번

제대로 스스로를 제대로 대접해 봐.

400불이 넘는 방 이래, 아깝게 어떻게 혼자서 그래.


왼쪽의 나와 오른쪽의 나는, 둘 다 할 말이 많았다.

하지만, 빠르고 합리적인 판단으로 결론은 금방 났다.


뭘 더 고민해,
호텔에서는 잠만 자고 나올 건데, 됐어.


그냥, 호스텔로 정했다.

예약을 빨리 하지도 않아서 6인실 밖에 남지 않았다.

이거라도 있는 게 어디냐, 다행이다. 감사합니다.

월요일 체크인, 목요일 체크아웃.

하루에 $49.41, Taxes and Fee $50.85.

뉴욕에서 혼자 4일 여행하는데,

숙박비로 전부 총 $199.08 들었다.

그곳의 저렴한 호텔 하루치도 안 되는 가격이다.


이왕 가는 거 나를 한번 대접하자고,

제대로 누려보자는 속삭임에 넘어갈 뻔했다.

인스타와 유튜브가 셀럽의 삶이 보통의 삶인 듯 느끼게

만든 게 문제다. 사실 혼자 여행 갈 수 있는 것만 해도

과분하고 감사할 뿐이다.

이런 감사한 기회로 호스텔에 묵는 젊은이 인 척해보자(라는 생각이 드는 것만 봐도, 나 정말 늙어가나 보다).





네이버 블로그의 리뷰를 보고 이 호스텔로 결정했다.

2인실, 4인실도 있었지만 이미 예약이 꽉 차있었다.

하는 수 없이 6인실을 예약했다.


건물에서 본 아이들은 거의 십 대 이십 대처럼 보였다.

영어도 스페인어도 아닌 생소한 언어가 많이 들렸다.

유럽에서 여행 온 것 같은 젊은 친구들이 많았는데,

그들의 에너지가 부러웠다.


사물함 안에 충전기도 잘 마련되어 있고,

배낭 하나 가득 담아 온 짐을 넣기에는 충분했다.

침대마다 커튼이 모두 달려 있고

화장실, 샤워실도 깔끔했다.

단, 아침저녁으로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시간대에는 기다리는 시간이 길었다.


방을 배정받고 올라가 보니 아무도 없다.

첫날 저녁에는 나 혼자 잤다. 아싸.

둘째 날 저녁에도 혼자인가 했는데

새벽에 한 명이 들어왔다.


새벽 1시 넘어서 들어왔는데 공항에서

바로 막 온 건지, 큰 캐리어를 열어 정리한다.

한참을 부스럭 거리며 자지 않는다. 새벽인데

조용히 움직일 생각이 없는 듯했다. 쿵쿵거리며

짐을 꺼내고 밖에 왔다 갔다 하는 소리에

당연히 난 잠을 설쳤다.


셋째 날 저녁에는 침대 여섯 개가 꽉 찼다. 늦게 들어온

네 명은 모두 조용히 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아서

오히려 둘째 날, 배려 없는 한 명과 함께

둘만 있는 것보다 훨씬 나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푹 쉬기는 힘든 건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 나에게 800불 정도 주면서

편하게 좋은 호텔에서 자라고 했다면,

나는 그 돈을 호텔에 쓰는 것보다, 분명히

브로드웨이 공연 티켓을 업그레이드했을 테다.




뉴욕여행과 청소년부 수련회를 잘 마치고

목요일에 나와 아이들 모두 집으로 돌아왔다. 남편은

이번 여름에 출장이 많아 비행기를 몇 번 탔지만

제대로 쉬거나 휴가를 즐기지는 못했다.

그래서 아껴두었던 힐튼 호텔의 무료 숙박권을

드디어 함께 쓰기로 했다. 남편은 하루만 휴가를 내고,

원래 쉬는 날 포함, 2박 3일을 여행할 계획이다.


집에서 한 시간 떨어져 있는 비치인데

센 셋이 아주 아름다운 곳이다.

가끔 일몰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깜깜한 길 위에서

다음엔 저기서 하루 자면서 여유롭게 즐겨보자

다짐을 하게 했던 곳이다.


오후에 도착해서 체크인을 하니

아직 저녁 식사 시간이 멀었다.

아이들은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우리가 상상한 여행 모습은 이런 게 아닌데...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이렇게 호텔만 오면

아빠한테 재밌는 얘기 해달라고

둘이 경쟁하듯 달려들었다.

그럼 아빤 쪼끄만 인형을 모아다 이름을 붙이고,

그들이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를 즉석에서 지어댔었다.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었던 시리즈는

"꼈다"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이제, 우리의 "꼈다"에게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아빠 이야기보따리의 인기가 시들해진 뒤에는

보드게임을 한창 즐기기도 했었다.

머리를 조금 써야 하는 Quixx를 우리 넷다 좋아했지만,

뭐니 뭐니 해도 단순하고, 어쩌다 분위기를 타면

웃음을 멈출 수 없게 만드는 '우노‘가 최고였다.


난 그 시절에 대해 미련을 못 버리고

오늘도 Quixx 랑 우노를 챙겨 왔다.

호텔에 넷이 함께 올 때면 꼭 챙겨 온다.

벌써 그 게임들을 안 한지 일 년은 넘은 듯 하지만

난 앞으로도 몇 년 동안은 항상 챙겨 올 듯하다.

작고 가벼우니까, 어쩌다 생길지도 모르는 추억팔이

놀이에 대한 간단하지만 필수적인 준비일 뿐이다.



호텔 방에 들어오자마자 네 명 모두 다 침대에 누워

유튜브가 건네는 도파민에 빠져 허우적 댔다.

곧, 하루를 잘 살아낸 적당한 피곤함을 씻어버린

남편과 나는 "우리 이럴 거면 왜 여기까지 온 거야?

나가자!"라고 했지만 아이들이 선뜻 따라나서지

않는다. 그래, 아직 밖은 덥다.

비치에서 수영할 것도 아니고, 저녁시간이 멀었다.

그럼 "같이" 뭐라도 하자로 의견을 모으긴 했다.

보드게임도 별로고, 산책도 별로라 해서

영화를 보기로 했다.


딸 아들이라 영화 취향도 참 달랐지만, 다행히

이렇게 유명한 건 그래도 한번 봐야 하지 않겠어?

라고 암묵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영화를 찾았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

넷플릭스의 이 영화가 요즘 난리란다. 케이팝

걸그룹과 보이그룹이 악령을 쫓는 뭐 그런 영화라나,

영화 줄거리만 들으면 그걸 봐야 해? 꼭 봐야겠어?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요즘 지구촌이 그것 때문에

들썩인다니까 한 번쯤은 봐야 할 것 같았다.



와 잘 만들었다. 줄거리 들으면 별 볼 것 없는 듯했다.

하지만 웃음 포인트 많고, 남주 여주 매력적이고,

시각적으로 세련되며, 노래도 다 좋고,

군더더기 없이 진짜 잘 만들었다.

한국적인 전통이나 디자인, 생활상, 음식 등을

표현해 낸 디테일이 대단하다. 그리고 스토리라인.


깨진 나를, 내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는 주인공 이야기가 깊다.


딸 열네 살, 아들 열두 살. 재밌다고 했지만, 그게 다다.

케데헌 리액션 영상에서 흔히 보이는 어린이들처럼

호들갑 떨며 노래하고 춤출 나이는 지났다.

오 년 전에만 나왔어도 아이들이 방방 뛰며 몇 번을

더 보려고 했을 텐데, 너무 빨리 커버린 모습을 보는

나한테만 아쉬움이 쓸쓸하게 남는다.

그래도 넷이 함께 재밌게 본 걸로 만족한다.


호텔 옥상에 있는 풀에서 앞을 바라보면 클리어워터 비치가 펼쳐져있다



이제 어둑어둑해진다.

석양을 보면서 밥을 먹으려고

테라스에 있는 자리를 잡았다.

아직 가시지 않은 태양의 열기와,

바닷바람의 찝찝함이 남아있다.

평소에는 굳이 피해 다닐 이런 것들이

여행지에서는 다 괜찮다.

오히려 반갑기까지 하다.

이 여행의 촉감으로 기억될 테다.


바다가 곧 해를 삼키려고 하자 남편이랑 딸은 길 건너

비치로 달려간다. 핸드폰과 혼연일체가 된 아들은

주변의 것에는 관심이 없다. 나는 언제나처럼

그 자리에서 아름다운 풍경들을

사진과 비디오에 담느라 바쁘다.

이렇게 살듯이 여행은 계속된다.


넷이라 더 충만해진 여행이다.



밥 먹는 사이 완전히 어두워졌고, 우린 산책

하고 싶어졌다. 정확히 말하면 나랑 남편 말이다.

아이들은 "꼭 가야 해?"라는 질문을 연신 날린다.

밤산책을 원하는 건 나랑 남편 둘뿐.

그래, 같이 영화 보고 밥 먹으면 많이 해준 거지.

아이들은 호텔방으로 들어가서

친구들이랑 통화를 하고 싶어 한다.


보통 호텔 같은 경우에는 딸이 이럴 때

차에 가거나 로비에 가서 통화를 했다.

이번엔 공간이 넉넉한 고급 호텔 덕에, 둘 다

마음껏 통화를 해도 서로 방해를 안 받을 수 있다.

아이들을 호텔방으로 올려 보내고는

남편이랑 깜깜한 모래사장을 걷는다.


아이들이 같이 걷지 않아 못내 서운한 마음이 있지만,

감사하다. 저렇게 매일 신나게 통화할 친구들이 있고,

자기 세계를 잘 만들어 가고 있는 중이니까.


천천히 걸으며 남편이랑 다짐한다.

우리 건강하게 오래오래 둘이 여행 다니자!

저것들 곧 떠나고 나면 우리 둘밖에 없어.

이제 딸이 대학 가려면 4년, 아들은 6년이 남았다.

미국은 보통 대학 가면서는 떠나보내는

분위기니까 마음 준비 단단히 해야지.


아이들을 떠나보내고 Empty Nest 증후군을

앓는 부모가 많다고 한다. 이제 한 달도 안 되어

딸의 고등학교가 시작된다고 하니,

우리한테도 먼 이야기가 아니다.


애들이 좀 빨리 커서 나를 제발 좀

내버려 두면 좋겠다고 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 우리 둥지에서 날아가버릴 날이 멀지 않았다.


조만간 곧 날개를 펴고 날아갈 테지.

너무 허전해서 깊이 슬퍼지지 않게

우리 아기새들이 날아가는 걸 상상하면서

잘 보내주는 연습을 하자. 계속 비워내자.


그리고 쓸쓸하게 빈 둥지에는
또 어떤 걸 키워낼 지도 고민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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