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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달리기. 계속되는 홀로 여행 2

뛰면서, 마음치료 중

by 여행하듯 살고

매일 아침 달리기로 혼자서 여행을 떠난다.


그 여행에서는 내 몸을 알아가고, 마음을 치료한다.

생각을 삭이고, 글을 숙성시키는 여정이다.

별거 없다. 폐에 한가득 맑은 공기 넣어준 후

후후 내쉬며 다리를 리듬에 맞추어 움직이면 된다.


빨리 달리는 것과 오래 달리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들숨 날숨을 그대로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저 심장박동을 통해 내가 살아 있음을

진하게 느끼면 된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규칙적으로 굴러가는 발에 숨이 가빠지면

생각은 더 자유로워진다.


뉴욕 여행을 하면서 '체력을 더 키워야 하는구나' 새삼 깨달았다. 마흔이 훌쩍 넘은 나이라 이십 대의 체력을 기대하는 건 큰 욕심일테다. 하지만 운동과 식단 조절로 몸과 마음을 젊게 유지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나라고 안 될 것은 무엇인가.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노력해 볼 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다. 보다 건강해지면 여행 기회도 자꾸만 더 생기지 않을까.


러닝, 몸을 알아가는 시간


러닝을 잘하고 싶어서 많은 걸 찾아봤다. 대개 전문 러너나 러닝전도사 션의 유튜브 영상을 본다. 미드풋 레어풋, 케이던스, 족저근막염 등등 생소한 단어들을 접한다. 들어보고는 그냥 넘긴다. 대부분 잊어버린다. 그러다 어느 날 달리다 보면, 발 중간이 땅에 먼저 닿는 순간이 온다. 그러면 이게 그 말로만 듣던, 미드 풋 러닝인가 보다 알게 된다. 다 까먹지는 않았나 보다.


케이던스라는 생소한 단어는 1분당 발이 땅에 닿는 횟수를 측정한 것이다. 여러 코치들이 180 정도의 케이던스가 러닝에 적합하다고 한다. 러닝 첫날 기록을 보니 케이던스가 155였다. 이후 속도나 시간보다는 일초에 평균 3번쯤 닿게 발소리에 집중했다. 집중해 보니 금방 느껴진다. 케이던스가 높아지면 지면에 발바닥이 머무는 시간이 줄어든다. 따라서 무릎이나 발목에도 무리가 덜 간다고 한다.


케이던스를 높이면 확실히 가볍게 뛰게 된다.


케이던스를 180 정도로 맞추기 위해 자주 발소리에 집중한다. 그러다 보면 그날 내 컨디션을 보다 자세히 알게 된다. 몸이 유독 가벼운 날, 묵직한 날을 평소에 그냥은 느끼기 힘들다. 하지만 달릴 때 내 발소리와 몸이 말하는 소리를 들어보면 명확하게 느껴진다.


뛸 때 평소보다 몸이 찌뿌둥한 게 느껴지면 원인을 찾아본다. 맞다, 어젯밤에 잠을 설쳤다. 어젯밤에 야식을 먹었다. 바빠서 며칠 못 뛰고 오랜만에 뛰는 거다 등등의 답이 바로 나온다. 확실히 몸은 정직하다. 건강한 것 먹고, 꾸준히 운동하고, 잠 잘자면 몸이 가벼운 게 확실히 느껴질 수밖에 없다.


러닝을 하면 자연스럽게 내 숨소리에 집중하게 된다. 들이마시고, 내 쉬며 폐가 확장-수축되는 걸 느낀다. 숨을 "쉰다"가 휴식을 취하는 “쉰다”와 같은 단어를 쓴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그래, 난 달리기를 하면서 제대로 쉰다. 그래서 중독이 되는 듯하다. 쉬러, 제대로 숨 쉬러 달리기를 한다.


여태껏 어떤 운동을 해도 땀을 적게 흘리는 편인 나는 좀 억울했다. 힘을 들이고도 티가 안 나니 억울할 수밖에. 그러다 러닝을 하면 땀이 주룩주룩 난다는 걸 발견했다. 뛰기 시작하고 20분쯤 후면 땀이 제대로 나기 시작한다. 40분을 넘기면서는 상의가 다 젖는다. 쫄딱 비 맞은 행세인데, 그 물이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 내 몸에서 솟았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뛰면서는 아무것도 듣지 않는다. 귀에 스치는 바람 소리, 새소리, 내 숨소리가 너무 듣기 좋아서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마음의 소리를 듣기 시작해서이기도 하다. 뮤지컬 어쩌면 헤피엔딩의 헬퍼봇 클레어가 메모리 속의 장면을 뒤질 때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대듯이 나도 두 손가락을 대고 기억을 한 장 한 장 넘겨본다(고 상상하지만 두 주먹을 가볍게 쥐고 계속 달릴 뿐이다).


러닝, 마음을 치료하는 시간


그리고는 장면 하나에서 멈추고 확대해 본다. 그때 속이 상했던 이유를 자세히 들어본다. 먼저 오른쪽에 살고 있는 이가 나와서 설명을 시작한다. 그리고는 왼쪽에 숨어있던 자아도 질세라 변호를 시작한다. 양쪽의 입장을 모두 듣고 있는 난 판사가 아니다. 검사도 변호사도 아니다.


양쪽 모두를 잘 헤아려 보려는 나는 상담사이자 치료사이다. 그냥 들어준다. 그게 가장 좋은 상담사의 조건이라더라. 다 듣고는 그랬구나, 공감만 해 준다. 그때 참 속상했겠네. 그러면 양쪽의 다른 자아들 모두 차차 누그러진다. 절대로 들으려 하지 않던 태도를 버리고 상대방을 이해해 보려는 시도를 한다. 물론 서로에게 적대적이던 마음이 한 번에 다 녹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상대방을 향해 겨누던 화살 시위를 거두고, 들어보려고 한다.


숨 가쁘게 뛸 때 들이마시는 공기에는 무슨 치료제가 든 것일까. 마음에 응어리 진것들이 조금씩 녹아내린다. 힘들거나 억울한 일이 있을 때 언니나 친구에게 쏟아내곤 했다. 그렇게 토해내면 잠시 시원해졌다. 그러나 곧 빈속으로 곧 위액이 차올라 토악질이 나는 것처럼, 그냥 토할 때보다 큰 고통을 수반하는 후유증이 온다. 나를 이해해 줄 만한 이에게 그냥 말로 풀어내는 게 근본적인 해결이 될 리가 없다. 속에 담아 둘 수 없었던걸 급하게 토해내고 나서는 아픈 속을 제대로 다스려야 한다.



러닝을 제대로 시작한 지 5개월 정도 되었다. 그동안 거의 매일 뛰었다. 유행에 쫓아 러닝을 한 게 아니라 살기 위한 선택이었다. 작년 가을 무렵 나에게 큰 시련이 있었다. 아직 마음속으로 다 해결하지 못한 그 일은, 엄청난 충격이었고 삶은 왜 고통의 연속일까를 계속해서 되뇌게 만들었다. 밤에 정말 한숨도 못 자는 날이 생겼고, 그 고통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 일 이후로 운동에 미친 듯이 매달렸다.


살려고 수영을 하고 자전거를 탔다. 한 시간도 모자라 한 시간 반, 두 시간도 쉬지 않고 나를 몰아세워 운동을 했다. 그렇게 유산소 운동은 나의 숨통이 되었고, 수면제가 되었다. 그리고는 평생 싫어했지만, 어느 순간 꼭 해보고 싶어진 러닝에 도전했다. 사실 러닝이라기보다는 슬로우 러닝, 조깅이었다.


발을 계속 굴리며 규칙적으로 숨을 몰아 쉬다 보면 간간이 피어 올라오는 생각들을 만난다. 대개 그날 처리해야 할 것들, 아이들에 관한 것들이다. 피어오르는 대로 봐주고, 날려 보내기를 반복하다 보면 머릿속 생각들이 하나하나 정리된다.


가벼운 것들이 피어올라 공기 중을 떠돌다 사라지면 아무것도 없는, 무의 공간이 되어버린다. 내 숨소리, 가볍게 뛰는 발자국 소리, 바람에 나뭇잎 날리는 소리 등만 남았다가, 그 조차 사라지는 듯하다.


한참을 진공처럼 보내다 보면 그러면 이제 좀 무게가 있는 것들이 올라온다. 올해 4월 17일 러닝을 시작한 이후, ‘그 생각’을 한 번도 안 한 적이 없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 생각’을 하려고 한 적도 없었다. 사실 ’그 생각’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일은 내게 너무 깊은 상처를 남겼고, 많은 의문을 갖게 했고, 내 삶의 모습을 송두리째 바꾸어야 하나 고민을 하게 했다. 나에게 그렇게 상처를 남긴 사람에 대해 생각을 하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들의 잘못을 이제는 알고 있을까, 내가 잘못한 부분도 있을까, 있다면 내가 고쳐야 할 것은 뭘까, 그들을 예수님처럼 용서해야 할 텐데, 과연 나는 그걸 할 수 있을까.


두서없는 생각들이 아지랑이처럼 여기저기서 동시다발로 피어오른다. 나의 억울함을 떠올리며 그들의 비열함에 피식 조소를 날려준다. 용서해야 하는데 쉽지가 않다고 어찌해야 하냐고 하나님께 물을 뿐이다.


한참을 달리면서 무의식 중에 그 생각을 하나씩 펼쳐놓다가, 내가 그것들에 아직 자유하지 못하다는 것에 화들짝 놀란다. 나 이제 그 생각 그만 한고 싶은데. 언제쯤이면 그만하게 될까? 생각을 하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하면 더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의식을 붙잡지 않고 그냥 강물처럼 흘러가게 두었다. 그러면 언젠가 그 샘이 마르지 않을까 하고.


몇 개월 동안 거의 매일 달리면서 잡생각을 날린 후, 새롭게 피어오르는 고결한 생각들 끝에도 ‘그 생각‘이 침범하고야 말았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그 생각을 또 막지 못해서 좌절감이 들기도 했다. 그런 생각들 때문에 밤잠을 못 이뤘지만, 러닝 할 때는 조금 다르다.


신기했다. 피어오르는 생각에 아직 묻어있던 쓴맛이, 러닝을 하면서 조금씩은 옅어지는 듯했다. 그래서 무작정 뛰었다. 쉬지 않고 두 시간을 뛰어도 힘들지 않았다. 심리치료를 받는 느낌이었다.


그렇다. 러닝은 나의 치료 세션이었다. 내가 조금의 귀찮음을 물리치고 밖으로 나가, 공짜로 주어진 시간과 공간에서 그것을 누리기만 하면 되었다. 말끔하게 치료되는 느낌 같은 건 없었다. 그저 내가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고 그것들을 들여다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조용히 기도하듯 달리면서 내 마음을 들여다볼 때, 깊은 상처들이 조금씩 치료된다.



센트럴 파크에서 러닝을 하고 나서, 나중에 알았다. 그때 거기서 뛸 때 처음으로 ‘그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쉬지 않고 두 시간을 넘게 뛰어도, 아무리 힘들게 뛰어도, 어떻게든 내 머리로 계속 침범해 오던 ‘그 생각’이, 센트럴파크에서 뛰는 도중에는 나. 지. 않. 았. 다. 그걸 알고는 정말 깜짝 놀랐다. 홀로 여행이어서인지, 뉴욕이어서 인지, 한 방향으로 함께 뛰어가던 사람들 덕분이었는지. 아무튼 그 아지랑이들은 온 데 간데없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 한 달 반 정도 지난 지금 돌아보면, 집에 오고 나서는 그 생각이 얼마큼 났는지 데이터가 없다. 내 기억에 확실한 건, 4월에 처음 달리고부터 항상 뛸고 나면 ‘오늘도 그 생각했네 ‘라고 한 것이다. 러닝 할 때 생각이 안 난 적이 한전도 없네, 어떻게 하면 그 생각 좀 그만하게 될까'라는 푸념도 해보았다.


집착에서 벗어나는 게 나에게 좋다는 걸 알지만, 내 의지로는 생각을 끊어낼 수가 없었다. 그게 처음으로 끊어진 게 뉴욕에 가서 러닝을 할 때였다. 나의 그 뫼비우스 띠처럼 반복되는 유쾌하지 않은 생각의 고리가 드디어 끊어졌다. 돌아와서 러닝 할 때에 그 생각을 한 적도 있고 안 한 적도 있는 것 같다. 어쨌건 드디어 그 연결 고리가 끊어졌다. 그 연속성을 끊어냈다.


이번 여행의 성과는 기대 이상이다. 과거일에 대한 집착을 끊어낼 첫 발걸음, 혼자서 여행할 용기, 아직 나에게도 낭만이 남아있구나 라는 발견, 내가 꼭 먹어야 할 주먹밥 반쪽도 찾아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가성비 운운하며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었는데.


달리기, 생각을 삭이는 시간


달리다 보면 잡생각이 정리가 된다. 별다른 노력을 안 하고 발소리에만 집중한다. 그러다 보면 아까 하고 있던 걱정이 필요 없는 것이라는 걸 확실히 깨닫게 된다. 그래서 훌훌 날려 보낸다. 걱정거리를 다 날려 보내고 나면 앞으로 해야 할 것들이 차차 떠오른다. 몸의 규칙적인 움직임에 맞추어 스케줄도 알아서 착착 줄을 선다. 스케줄 정리도 끝나고 나면 진짜 고민해봐야 할 것들이 올라온다.


두 가지 중에서 선택해야 할 것을 미루어 둔 게 떠오른다. 며칠 동안 고민했지만 결론을 내기 쉽지 않았었다. 뛰는 동안 마음이 차분해져서 인지 둘의 장단점을 빨리 파악하게 되고, 깔끔하게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실질적인 생각들이 다 지나가고 나면 추상적인 생각으로 넘어간다. 믿음에 관한 것들, 인간관계에 관한 것들,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런 것들. 달릴수록 정신은 또렷해지고, 생각은 자연스레 익어간다.



달리기, 글을 숙성시키는 시간


생각이 정리되면 자연스럽게 글감이 남는다. 흙탕물이 고요한 시간을 지나며 물과 진흙으로 확실히 분리가 되듯이, 머릿속에 엉켜있던 여러 잡생각들이 가라앉고 정갈한 사유가 동동 떠오른다. 제일 위에 떠오른 것들을 조심스럽게 떠서, 종이에 글로 옮기기만 하면 된다.


이제 막 쓰기 시작한 글을 달리다가 잠시 떠올려보면 아까 막연히 생각하던 것과 연결점이 보인다. 전혀 상관없어 보이던 것들인데, 기가 막히게 이어진다. 떠다니던 점들을 이어주는 그 마법의 줄은, 뛰면서 발과 팔다리를 움직이자 어디에선가 생겨난다. 거미 몸의 방적돌기에서 실을 만들어 내듯이.


달리고 집에 들어오자 떠오른 것들을 바로 메모한다. 펜 위로 내 땀이 따라 흐른다. 노화되는 몸에 맞춰 뇌도 늙어가는지, 샤워만 하고 와도 까먹기 일쑤다. 자세하게 전부 다 쓸 필요는 없다. 머릿속에 떠다니던 단어들만 늘어놓아도, 나중에 글을 쓸 때는 사막에서 나침반처럼 유용하다. 아니다, 나침반 정도가 아니라 오아시스가 되어 나를 반겨준다. 샤워로 달리기를 마무리할 때에는 방금 적었던 메모를 떠올리며 살을 붙여간다.




노키즈 전도사는 진작에 사임했다.

( 노키즈전도사가 무엇인지 궁금하신 분들은 여기​)

그리고는 나 스스로 러닝 전도사로 임명했다.

혹시 달리고 싶은데, 달리기를 싫어해서

망설이고 있다면 내 말을 한번 들어보시라.



러닝을 제대로 시작한 지 이제 5개월 즈음된다. 그전에는 정말 러닝을 싫어했다. 안 좋아하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싫어했다. 비가 와도 차라리 머리에 비를 맞고 말지, 그걸 피하겠다고 뛰지 않았다. 아주 간단하다. 뛰는 게 비보다 더 싫으니까. 축구, 농구 등 공을 따라 우르르 뛰어본 적도 없고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든 적도 없었다. 게임 내내 뛰어야 하니까.


어쩌다 수영이랑 자전거에 흥미를 붙였는데, 중독되어 한번 수영하면 물 밖으로 나오지 않고 한 시간 반, 자전거는 땅에 다리 내리지 않고 두 시간 타는 일이 잦아졌다. 그럼 이제 달리기만 하면 철인 삼종 경기에 나가도 되겠단 마음이 가끔 들기도 했다. 그래도 사실, 난 달릴 마음이 전혀 없었다.


러닝이 유행해서 인지 유튜브에 자꾸 러닝 관련 콘텐츠가 떴다. 랩을 하던 지누션의 션이 아니라, 사회복지사로 요즘 야들에게 알려진 션의 행적이 참 매력적이다. 광복절에는 81.5Km를 뛰고, 여태껏 기부한 금액이 50억이 넘는다 하며, 전 세계 최초로 뤼게릭 병원을 짓는데 선한 영향력을 많이 끼쳤다고 한다.


건강에 관심이 많이 생겨 먹거리에 신경을 많이 썼다. 유튜브를 통해 여러 건강 정보를 접하다 보니, 그 인터뷰들 끝에는 항상 러닝이 딸려 나왔다. 다들 하나 같이 러닝을 찬양하고, 러닝을 권장하고 있었다. 저속노화의 정희원 교수, 뇌과학자 장동선, 운동 유튜버 심으뜸, 심지어 여행하는 기안 84까지 마라톤에 나가는 게 아니겠는가.


그리고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그의 달리기에 관한 에세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때문에 더 달리고 싶어졌다. 왠지 달리기를 꾸준히 하면 하루키 비슷한 글이라도 흉내 낼 수 있을까 하고. 머리로는 이제 뛰고 싶다는 생각이 넘쳐흘렀다. 하지만 몇 개월이 지나도 덜 흘러넘친듯하다. 아직 가슴까지는 내려가지 못한 것을 보니.


하지만 낙수가 바위를 뚫듯이, 조만간 나도 뛸 수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런 생각만 삼 개월 넘게 가지고 있다가 어느 날엔가 살짝 뛰어 보았다. 이분이상 계속 뛸 수가 없었다. 이분 걷다 일분 뛰다를 반복했다. 유튜브에서 코치들이 가르쳐 준 대로 걷다 뛰다 하니 할 수 있더라.


당신도 할 수 있다. 한 번만 해 보시라.
그리고 딱 한 번만 더.


세 번 정도하고 나면 당신도, 당신이 할 수 있다는 것에 크게 놀라게 될 것이다. 그리고 꾸준히 달리게 된다면, 이 좋은걸 왜 여태껏 하지 않았나 하고 분명 후회를 하게 될 것이다. 단순히 몸뿐만 아니라, 마음의 건강을 단단하게 다져갈 더 없는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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