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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보경 Dec 01. 2020

채소의 기분을 살피듯이

식물적 관점에서 자아성찰

식물을 키운다는 것은 매우 성가신 일이 아닐 수 없다. 손이 많이 가는 아이는 더 그렇지만 물을 자주 주지 않아도 되는, 그래서 아예 잊어버리고 살아줘도 덜 미안한 다육이들도, 사실은 성가시다. 


깜빡하고 있다가 생각나서 줄 때는 지금 주는 이 물이 득이 될 것인가 독이 될 것인가, 잠시 갈등한다. 관심을 주지 못했다는 것을 인지함으로써, 꾸준히 뭔가 챙기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자책을 하게 만든다. 식물육아도, 체질은 아니다. 


생긴 모양이 작은 나무 같아 반한 바질트리를 두 개나 샀었다. 손으로 쓰다듬으면 확, 퍼지는 허브향이 좋았다. 이 아이들을 업어 올 때 역시 뒤늦게 깨달았다. 아, 또, 잊었구나. 역시 우린 망각의 동물이야. 


아니나 다를까, 바질트리 역시 꽤나 성가신 녀석이었다. 물을 자주 줘도 안됐고 바람과 햇볕을 골고루 적당히. 그렇지 않을 때는 파리가 날렸고, 곰팡이가 금방 생겼다. 


물을 좀 줄였던 날은 괜찮겠지 싶었는데 다음 날 보면 잎이 검게 시들시들해져 있었다. 아, 참으로 예민한 녀석이구나.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두 개 중 화분 하나는 결국 저 세상으로 갔다. 이만하면, 그런 생각도 든다. 키우기만 하면 시들다니. 나에게 이런.... 재주가?! 


이런 나에게 누군가 새싹보리 씨앗을 반 봉지 줬다. 코로나 때문에 집에 있는 아이를 위해 함께 물을 주고 키워 보는 것도 육아에 좋다면서. 이때도 나는, 나의 능력에 반전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일까. 수경 재배하는 방법을 찾고 새싹보리를 심기 시작했다. 


하루 밤 만에 싹을 틔웠다. 굉장하다. 생물이란. 햇볕에 두니 반나절 만에 키가 컸다. 요 녀석 봐라, 싶어서 물을 주고 저녁에 보니 또 쑤욱, 키가 컸다. 그저 말없는 식물일 뿐인데 크는 것을 보니 기특하여 나도 모르게 작명이라도 하고 다정히 이름이라도 불러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꽤 엉뚱하면서도 재치 있게, 한편으로 싱거운 유머가 묘한 매력인 무라카미 하루키. 그의 산문집을 읽었다.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그는 채소에도 기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인디언이라는 영화에서 앤서니 홉킨스가 “꿈을 좇지 않는 인생이란 채소나 다름없다.”라고 한 말을 두고 그는 얘기했다. 


"꿈을 좇지 않는 인생이란 채소나 다름없다.라고 누군가 단호히 말하면 무심결에 그런가?" 하게 될 것 같지만, 생각해보면 채소에도 여러 종류가 있고 채소마다 마음이 있고 사정이 있다. 하나하나의 채소의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면, 지금까지 인간으로서의 내 인생이란 대체 무엇이었을까 하고 무심코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된다(그럴 때도 있다). 뭔가를 뭉뚱그려서 우지는 건 좋지 않군요. 


무라카미 하루키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중에서 


한동안 거실 창문을 열지 못하다가 쨍한 오전 날씨에 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햇빛을 많이 보라고 화분들을 창가에 뒀는데 기온이 꽤 차가웠는지 이파리가 축 늘어진다. 별 일 없는 일상, 채소의 기분을 살핀다. 한나절 사이에도 부지런히 성장하는 채소가, 자신의 본분을 다해 소명을 다해 어쩌면 죽을힘을 다해 키를 높이는 푸른 이파리를 보면서, 하루키 같은 생각을 한다. 지금까지 인간으로서의 내 인생이란 대체 무엇이었을까. 


반짝이는 생각 하나 해내지 못하고, 시간에 기대어 유영하며 물 흐르듯이 하루를 지나온 것은 아닌지. 안간힘을 다해 살아내고 있지 않은, 순간에 반성을 하게 만드는 대상. 그래서 식물은 성가시다. 풀 하나, 채소 하나 보다 못한 하루를 오늘도 보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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