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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kwell Jan 15. 2023

반짝반짝 타락하는

<더 글로리>(파트1)를 보고

정초부터 어떤 증오에 매료됐다. 그 증오란 "그리움과 닮아서 멈출 수 없는 것"이기에 방관자에서 피해자,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되려는 소녀의 유일한 꿈이기도 하다. 일생일대의 복수를 꿈꾸는 사람의 이야기는 이미 차고 넘치겠지만, 판을 짠 사람이 김은숙이고 그 판의 중심에 서서 칼춤을 추려는 사람이 송혜교라면? 의외성을 획득함으로써 호기심과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한 <더 글로리>는 획기적인 변화를 꾀한 듯한 스타 작가와 스타 배우가 머리를 맞대고 골똘히 고민하는 모습마저 상상케 했다. <비밀의 숲>의 연출자였던 안길호까지 합세한 그 고민의 결과는 다가올 3월에 공개될 파트2를 기다리게 만드는 빌드업에도 성공했다.

다만 파트2를 기다리면서 우려가 되는 것은 여정(이도현)과 도영(정성일)의 존재감이다. 그들이 동은(송혜교)의 본격적인 복수에 제동장치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작가로서 어떤 변화를 꾀할지라도 그동안 가장 잘 써왔던 것을 포기하는 건 어려웠을까. 연진(임지연)이 자신의 꿈이 된 이후부터 동은은 "우연은 단 한 줄도 없었다"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하지만 바둑 스승 여정과의 만남은 기존 로맨스 드라마의 우연 공식과 다르지 않았다. 물론 여정은 망나니를 자처하는 기구한 사연의 인물이라는 점에서 기존의 백마 탄 왕자들과는 다르다. 문제는 그 차별점이 그가 동은의 계획에만 헌신하는 망나니가 될지 헷갈리게 한다. 태어나자마자 모든 것이 정해져 탄탄대로의 인생을 사느라 남들에게 "나이스한 개새끼"라 불리는 도영은 전에 없이 동은에게만은 진짜 나이스한 사람이 되려는 것 같아 불안하다. 어쩌면 파트2의 성패, 나아가 시리즈 전체의 성패는 두 인물의 향후 플롯에 따라 갈리지 않을까 싶다. 기우이길 바란다.

사실 더 간절히 바라는 것은 파트1에서 형성된 "피해자들의 연대"가 파트2에서 망가지지 않고 더 화려해졌으면 한다는 것이다. 연대의 성격과 온도가 조금 다르긴 하지만 영화 <친절한 금자씨>가 곧바로 연상됐는데 <친절한 금자씨>가 보여준 연대가 차갑고 날카로운 것이었다면 <더 글로리>의 연대는 따뜻하고 둥글게 보인다. 그것은 파트1에서 동은을 가장 가까이에서 조력한 현남을 노련한 배우 염혜란이 연기했기 때문이다. 현남 역시 폭력적인 남편을 죽이기 위해 동은을 도우려는 사람일 뿐인데 배우가 능청스럽고 순박하게 연기함으로써 파트1의 유일한 숨구멍 역할까지 해냈다. 올해가 시작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가히 올해의 씬 스틸러로 치켜세우고 싶은 심정이다.

동은과 현남의 랠리가 잠시나마 숨통을 틔우게 했다면, 동은과 연진의 랠리는 이 드라마에서 가장 숨통을 조이는 순간이며 하이라이트다. 어린 연진을 연기한 신예은과 어른 연진을 연기한 임지연은 동은이 극 중에서 표현한 대로 "신나면 더 까매지던 눈동자"를 정확하게 구현한다. 이 대사를 토대로 캐스팅을 한 것이 아닐까 의구심이 들 정도로 높은 싱크로율을 보여주는데 두 배우의 연기가 어린 동은을 연기하는 정지소, 어른 동은을 연기하는 송혜교와 함께 완벽한 대조를 이뤄 눈을 뗄 수 없는 앙상블을 선사한다. 극 전반에 음악처럼 깔리는 동은의 내레이션은 언뜻 연진을 향한 구애처럼 들리기도 해 흥미로웠다. 연진으로 가득 찬 동은의 세상이 내레이션만으로도 충분히 그려졌다.

주목할 만한 장점들로 견고하게 지은 파트1이라는 집이 파트2를 통해 무너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파트2의 동력이 동은의 본격적인 칼춤으로 "가해자들의 연대"가 무너지는 데서 오는 아름다움뿐이었으면 좋겠다. <친절한 금자씨> 외에 연상된 작품이 있다면, 그전에는 본 적 없는 김하늘 배우의 텅 빈 얼굴이 인상적이었던 <여교사>와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의 영화들 중 가장 채도가 낮았던 <고백>이다. 두 작품의 주인공들처럼 멈춤 없이 <더 글로리>의 동은도 자신이 원하는 만큼 타락하길. 복수에 성공해 비로소 폐허가 된 "나의 체육관"에서나마 반짝반짝 빛나는 승기를 거머쥐길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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