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전 기억을 소환하며
때는 2008년 금융위기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을 때였다.
이미 선배들이 취업시장에서 얼마나 고군분투 했는지 눈앞에서 목격했기 때문에, 나름의 각오를 다지고 취업준비를 해나갔다.
내가 가진 큰 페널티라면 다니는 학교가 서울로부터 멀리 떨어진 어느 지방의 시골 산구석에 위치한 곳이라는 것이었다. 그때 이미 많은 대학생들이 방학기간 동안 큰 기업들의 인턴십이나 각종 서포터즈 활동들로 사회로 첫발을 내딛기도 전에 소위 말하는 '스펙'을 쌓는데 열중하고 있을 때였다.
결론적으로 나는 그런 스펙은 아무것도 쌓지 못했다.
그래도 학교에서는 취업준비에 도움이 되는 외부 강사들을 초빙하고, 캠퍼스 리쿠르팅을 열심히 유치해 주었기에, 그 자원을 최대한 활용했다.
아래의 강의들을 들었던 게 기억이 난다.
- 이미지메이킹 : 어떤 자세, 표정, 말투, 심지어 헤어스타일&메이크업, 의상을 입어야 면접관들에게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는지를 배움
- 이력서첨삭 : (비록 가진 재료는 없으나) 정돈된, 있어 보이는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작성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움
- 면접캠프 : 1박 2일간 여러 모의면접을 통해 개선할 점을 피드백받고, 어떤 부분을 더 보완해야 할지를 도움 받음.
학교를 졸업한 선배들이 리쿠르팅을 하러 학교를 방문했을 때 열심히 명함도 수집하고, 이력서도 제출하곤 했더랬다. 리쿠르팅을 통해 바로 면접 기회가 온 적은 없었다. 하지만 리쿠르팅으로 온 기업들 중 하나에 결국 취업을 하긴 했다
가장 큰 도움을 받은 건 대학교 3학년때부터 시작한 '취업스터디'였다. 5~6명으로 팀을 꾸렸고 그중 2명은 외국계 기업에 올인을 하고 나머지는 대기업 중심의 취업 준비를 했다. 서로 모의 면접을 보고, 자소서 첨삭도 하고, 면접 후기도 공유하는 등 준비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었다.
내가 가진 여러 장점 중에 하나는, '목표지향적'인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목표 지향적이지만 목표와 연결된 결정을 하는 데 있어서 유연한 점이다.
중학생 때부터 고등학생까지 줄곧 원했던 장래희망은 '외교관'이었다. 뉴스나 신문기사에서 서로 얽히고설킨 국제관계와 국제정치가 늘 흥미진진하고 재밌었기 때문이다.
바람대로 1학년 1학기 때, 여러 전공과목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국제정치경제'와 관련된 과목을 수강했는데 웬걸, 수강하는 과목마다, 시험을 칠 때마다 '이 길은 내 길이 아니오'라는 게 너무 분명했다.
현실에서 당장 일어나고 일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과거의 히스토리와 특히 '이론'은 너무 지루했다. 심지어 그 이론을 어떤 사건, 현재에 접목시켜서 A4 한 장에 생각을 가득 채워야 하는 시험은 나에겐 정말 끔찍했다.
1학년 땐 전공선택의 자유가 있었기에, 문과생이라면 안전하게 선택한다는 경영과목을 수강했을 때는 다행히 너무 재미있어 그 길로 쭉 직진했다. 경영 안에서도 본인의 적성, 관심사에 따라 길이 갈리는데(HR, 재무회계, MIS, 전략, 마케팅 중) 나는 2년간 마케팅의 매력에 완전 푹 빠지게 되었다. 그때 당시 학교에서 배우던 마케팅은 지금의 회사들이 마케팅부서에서 기대하는 일과는 달랐다. 좀더 전사적이고, 통합적이고, 전략적인 방향에 베이스를 둔 마케팅이었다.
그러다가 3학년에 돼서 국제경영, 경영전략 수업을 들으면서 컨설팅에도 관심이 생겼다. 경영전략 수업에서 MBA에서도 쓴다는 Markstrat이라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팀 간 경쟁으로 가상으로 기업을 운영하면서, 시장 경쟁 상황에 맞게 소싱, 생산, 마켓 물동량, 가격, 마케팅 mix에 대한 시뮬레이션 할 값을 넣고 모든 팀의 세팅이 클로징이 되면, 전략이 먹혀들어갔으면 주가가 상승하고, 그렇지 않으면 떨어지는 결과를 볼 수 있었다. 상대방이 시장을 어떻게 해석해서 어떤 전략으로 세팅을 했는지는 결과를 보기 전까지 알 수 없어서 상대 기업의 전략방향도 예측해서 우리 기업의 방향을 셋업 하는 방식이었는데 우리 팀이 아주 승승장구를 해서 결국 최종 승자가 되었었다. 우리가 잘해서 관심이 생겼다기보다, 팀에서 CEO, CFO, CMO, COO, CSO 등의 역할을 세우고, 서로 토론을 하면서 방향을 조율하고, 결정해 나가는 과정이 너무 흥미로웠다.
그래도 여전히 1순위는 마케팅이었고, 컨설팅에 관심을 둔 채로 3학년 2학기가 되었는데 IBM이라는 외국계 기업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IBM사이트를 구경하다가 우연히 접한 IBM의 광고를 보고 되었다.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외국의 어느 낙후된 지역에 통신 인프라가 없어 어부가 그날 수확한 생선을 판매하지 못하고 허탕을 쳐서 가난을 벗어나기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는데 IT기술이 인프라를 제공한 결과, 배 위에서도 통신을 통해 거래를 할 수 있게 변화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그 외에 다른 광고들도 'IT가 세상을 변화시킨다'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그때 머릿속에 든 생각은 'IT는 모든 산업에 연결되어 있겠구나'라는 것이었고, 'IT는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겠구나'라는 것이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취업의 방향을 틀었다. IT기업에 들어가는 것으로. 나중에서야 깨달았지만 그때 순수한 마음으로 그렸던 IT전문가가 되는 길은 IT기업에 들어가는 것과는 괴리가 있긴 했다. 하지만 아주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마케팅만 줄곧 파던 사람이, 4학년 1학기때부터는 IT직무, IT회사만 두드렸다. 취업이 걱정되었기에 간혹 마케팅 직무도 지원하긴 했지만 만약 둘 다 합격한다면 1순위는 무조건 IT 쪽이었다. 많은 회사들이 자격요건에 '컴퓨터공학', '전산전자' 전공자라고 명시해 두었지만 가끔 '전공무관'으로 채용공고가 올라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때 합격한 대기업 IT계열사도 S/W엔지니어 직군을 '전공무관'으로 올렸기에, 거기 지원을 했고, 인적성 통과, 1차, 2차, 3차 면접(3차는 무려 2박 3일 합숙훈련)을 통과를 거쳐 최종합격을 얻게 되었다.
(같이 면접을 봤던 입사 동기들은 모두 전공이 IT 쪽이다)
내가 IT회사에 합격했다고 하자 엄마는 적잖이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한창 마케팅에 빠져있을 때는 어느 날 엄마한테 마케팅이 너무 재밌다며 평생 이걸 직업으로 삼아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다는 말을 하며 내 눈이 반짝이는 게 기억이 난다고 했다.
그런데 IT가 네가 잘할 수 있는 직무가 맞는 거냐고. 경영학 전공하던 애가 생뚱맞게 갑자기 IT로 가냐며 조금은 탐탁지 않아 하셨다. (지금 생각에는 불안하셨던 것 같다)
나중에 사람들이 전공이 경영인데 어떻게 IT회사와 직무를 지원할 생각을 했냐고 물었다.
나는 회사가 지원자격에 '전공무관'이라고 표시한 것은 신입사원이 해당 직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전공보다 다른 자질을 더 중요하게 보는 것이고, IT적인 역량이 필요하면 회사가 뽑아서 키워서 시킬 수 있는 직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답했다. 입사 후에는 이 생각이 맞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중에 더 이어질 글을 보면 나는 계속 가던 길을 가지 않는 선택을 한다. 그렇지만 내 기준에서는 완전 다른 길, 이전 경험을 버려야 하는 길로는 가지 않는다.
어떤 윗사람들은 나에게 '왜 잘하던걸 계속하지 않냐' 또는 '파랑새를 찾으려는 거냐'라고도 하신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목표지향적이지만 결정하는 데 있어서 유연한 사람이다.
직무를 전환하는 데 있어서 항상 '연결고리'를 생각하고, 그 연결을 통해 이전의 역량이 어떻게 쓰일지, 새롭게 무엇을 더 해볼 수 있을지를 생각하기 때문에 그 결정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불안하고, 두렵지만 또 막상 해내고 나면, 앞으로 나아갈 용기와 기회가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