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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처럼 Mar 03. 2020

회사원을 꿈꾸는 어린이는 없다

직장생활 14년차의 끈질긴 출근 적응기

우리 딸은 커서 뭐가 될까



지난 토요일, 친구가족이 집에 놀러왔다. 똑같은 나이의 딸아이를 키우고 있는 친구 역시 일하는 엄마다. 사는 게 바빠서, 일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가족들 챙기느라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이런저런 이유들로 이제야 아이들이 처음 만났다. 아직 미숙하지만 의사소통이 가능해서인지 두 아이는 금세 친해졌다. 깔깔거리며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보니(우리 집은 2층 필로티다! 얼마나 다행인지) 내 기분도 좋다. 덕분에 공동육아의 신세계를 맛본 친구와 나는 오랜만에 수다타임을 가졌다. 


“지아 나중에 크면 뭐 됐으면 좋겠어?”

친구의 눈매에 지아의 눈이 그대로 담겨 있다. 닮아도 어쩜 이리 닮았을까. 예쁘다. 


“작곡가.”

의외의 대답. 


“작곡가? 클래식 작곡가 같은 거 말이야?”   

“아니, 흐흐흐. 왜 아이돌 음악 만드는 작곡가 있잖아.”

친구의 대답에 친구 남편도 표정으로 거든다. 이미 부부가 한 마음이군.


“아이유같이 싱어송라이터?”

음악에 조예가 없는 나는 최대한 아는 이름을 끌어 모아 보았다.  


“아니, 아니. 연예인은 별로고 작곡만! 저작권료가 짱이잖아.”


빵 터졌다. 열심히 블록을 쌓고 있는 지아의 얼굴을 바라봤다. 깜찍한 엄마아빠의 꿈을 지아도 알고 있을까? 지아가 커서 다른 꿈을 꾸게 되더라도 한번쯤은 엄마아빠의 의견을 고려해주었으면 좋겠다. 저작권료야 웃자고 한 이야기지만 한 분야의 전문가로써 성장하고,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고 비교적 자유로운 직업을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꿈꾸지 않는가. 그런 의미에서 우리 딸은 배구선수가 되었으면 좋겠다. 김연경 선수처럼. 배구여제 오모찌!






답은 정해져 있다



나는 14년차 직장인이다. 단 한 번도 ‘회사원’이라는 단어를 가슴에 품은 적은 없지만, 어쨌든 회사원이 되었다. 부모님, 그러니까 아빠는 내가 치과의사가 되기를 학수고대했다. 그림과 서예에 소질이 있었지만, 화가는 가난하다는 타박에 기꺼이 아빠의 꿈에 동참했다. 하지만 치대에 입학하려면 얼마나 공부를 잘해야 하는지. 또 우리나라에는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어쩜 그리 많은지. 공부를 하면 할수록 꿈과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나도, 부모님도 12년에 걸쳐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 능력치 부족으로 첫 번째 꿈은 포기. 


다음으로 붙잡은 것은 담임 선생님의 한마디였다. 


“OO이 너는 아나운서를 하면 아주 잘 할 것 같은데?”

“아나운서가 뭐에요?”


부모님은 왜 다양한 직업에 대해 알려주시지 않은 걸까. 세상에 직업은 공무원(아빠의 직업)과 교사, 치과의사가 전부라고 생각했는데. 선생님께 새로운 직업에 대한 설명을 들은 저녁, 9시 뉴스가 달리 보였다. 그리고 나는 아나운서가 되기로 결심했다. 


수능이 끝나고 무조건 ‘신문방송학과’만 지원했다. 그 과를 나와야만 아나운서가 될 수 있는 줄 알았다. 전공에 제한이 없다는 사실을 왜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는지. 아니지, 내가 아무에게도 물어보지 않았구나. 당시에 인터넷으로 검색 한번만 해볼 수 있었다면, 내 인생은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아는 게 하나 밖에 없는 단순함 덕분에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아나운서가 되었는가? 처음 밝혔다시피, 아니다. 학창시절과 마찬가지로 나는 다른 사람들의 조언에 쉽게 흔들렸고, 그때마다 좋아 보이거나 혹은 내 능력의 한계 안에 들어오는 일들만 선택했다. 위험한 도전은 애당초 피했고 내가 처한 환경을 핑계 삼았다. 


아나운서는 그 경계를 벗어난 것이었다. 같은 여자가 봐도 너무 예쁜 동기가 아나운서에 도전한다는 사실에 기가 죽었고, 수천대일의 경쟁률을 보며 지원해볼 용기조차 내지 못했다. 대학교 입학과 동시에 꿈도 접었다. 그나마 전공과목 중에 그럴싸해 보이는 광고홍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것이 마치 내 꿈인 것 마냥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광고기획사에서 인턴으로 일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었지만 많은 선배들이 광고주, 즉 기업으로의 이직을 꿈꾼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결국 대기업에 입사하는 것이 꿈이 되어 버렸다. 


참, 써놓고 보니 어이가 없다. 피카소부터 치과의사, 아나운서, 광고기획자를 거쳐 선택한 것이 회사원이라니. 왜 그토록 많은 기업들이 입사면접에서 나를 떨어뜨렸는지 납득이 된다. 그들이 원하는 인재상과 안 맞아도 너무 안 맞아. 이건 안 될 것 같아서, 저건 어려울 것 같아서 회사에 다니려구요- 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누가 피 같은 월급을 줄까. 


물론 입사지원서는 마치 대기업에 다니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나를 포장해서 적었다. 덕분에 회사원이라도 되었고, 이렇게 밥벌이를 하며 살 수 있는 것이다.  






꼭 나쁘지만은 않아 회사원


친구 가족과 따뜻한 오후를 보내고, 딸아이는 저녁 5시부터 잠이 들었다. 얼마나 열심히 뛰어 놀았는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다. 덕분에 나도 아이 옆에 누워 잠시 멍하게 시간을 보냈다. 조금 전에 친구와 나눈 대화가 새롭게 다가온다.


“우리가 제일 애매하잖어.”

직장생활의 괴로움에 대해 이야기 하던 중이었다. 


“그렇지, 애매하지.”

“공부를 할꺼면 아예 확 잘하던가, 우리처럼 애매하게 잘하면 뭐해, 회사원 밖에 더돼?”


친구의 말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정말 그 표현이 딱 맞다. 회사원이라는 직업이 나빠서가 아니라, 꿈꾼 적 없지만 적당히 현실과 타협해서 살아가는 삶이 애매해서다. 적어도 회사에 입사할 때만해도 조직 내에서의 꿈을 그렸던 것 같은데, 그것마저 희미해진지 오래. 크고 작은 실패와 성공을 경험하고 목격하면서 자연스럽게 회사라는 조직에 타협한 것 같다. 


어떤 날은 내가 너무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조직에서 언제든 버려질 수 있는 모래알 같은 존재라는 사실이 기가 막혀서 슬펐다. 모든 것이 내 선택과 노력의 조합이 빚어낸 결과라 할 말은 없지만, 노력에 비해 보상이 너무 적게 돌아오는 것이 아닌 가, 왜 내 이름으로 남는 것은 없는 가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린 적도 많다. 학창시절 눈에 띄지 않았던 친구가 포털의 검색어에 상위권을 차지하고, CEO로 이름을 날리고, 저명한 연구자가 되는 소식을 접할 때 마다 내 작은 책상이 초라해보였다.   


그런데 시간이 쌓이다 보니 그저 그런 직장생활도 할 만 하다. 쓸데없는 부러움도 처음 충격을 받았을 때 보다는 덜하다. 동기 중에 대통령이 나온다면 그때는 좀 놀랄 것 같기는 하지만. 아무튼 육두문자를 쏟아낼 만큼 화가 나는 일도 있고, 당장이라도 사표를 던지고 나오고 싶은 날도 있지만, 소소한 재미가 있는 보통의 하루가 더 많다. 그리고 그런 날들이 내 삶과 가족의 삶의 지탱해주고 있다. 심지어 출근이 기다려지는 날도 있으니 정말 직장인 다됐다. 신입사원 때 이십년 넘도록 회사에 다니는 분들을 보며, 저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낙으로 살까 싶었는데 다녀보니 이해가 간다. 


알아 가고 있다. 직장인으로서의 삶에 대해. 내 것이 아닌 것 같아서 늘 놓을까 말까 고민하지만 쉽게 놓지 못하는 그 매력에 대해서 말이다. 특별하지는 않지만 보통의 존재로 살아가는 인생과 많은 사람들이 꿈꾼 적 없지만 선택하게 되는 이 직업군에 대해 말이다. 


회사원이 꿈인 어린이는 흔치 않겠지만, 내 딸이 굳이 회사원이 되고 싶다면 이런저런 노하우를 전해줘야겠다. 한 분야에서 십년을 넘게 일하면 전문가가 된다는데, 나도 회사생활 ‘버티기’ 부문에서는 준전문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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