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이 어느새 사라질 즈음 알게 되는 것들
'당신이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일이 무엇인지
당신이 살아야 할 단 한 가지 삶이 무엇인지
늘 곁에서 서서히 일깨워준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당신의 것이었음을.'
- <여정(The Journey)>, 메리 올리버(Mary Oliver)
월트 휘트먼과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영향을 받아 자연 속의 경이로움을 통해 삶의 정수를 아름다운 시의 언어로 남겼던 메리 올리버의 시집 <기러기>에 실린 ‘여정(The Journey)이라는 시를 읽다 보면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내 안에서 울려 나오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된다.
나는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오랜 시간을 주저하며, 서성이고, 미루어왔던 글쓰기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나의 처음 글쓰기 과정이 쉽지 않더라도 담대하게 계속 쓸 수 있으려면, 첫 주제와 내용은 쓰는 동안 나를 지탱할 용기와 위안을 줄 수 있어야 했다. 살아오는 동안 나에게는 책이 그러했고, 그중에서도 인문학 책이 나의 버팀목이 되곤 했다.
자신이 진정 원하는 일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일상 속에 파묻히고 때로는 일상조차 흔들리는 경우에 직면한다면, 틀에 박혀 관성적으로 반복하는 일만 남고 그 안에서 정작 나는 없는 것 같은 느낌에 허탈해질 때가 있다. 마음속에서 변화를 생각하고 전진하는 여정을 꿈꾸어도 현실의 나는 아무것도 변화되지 않은 채로 어제와 똑같은 오늘, 오늘과 똑같은 내일을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요즈음 되도록 새벽 일찍 일어나려고 노력 중이다. 맑은 아침의 힘이 내 일상을 바로 세우고 좀 더 나에게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느낌이다. 나의 낮과 저녁 시간 동안에 주로 정해진 일상의 길을 따라간다면, 나의 새벽 시간 동안 나는 최대한 길을 잃는다.
’ 사물을 잃는 것은 낯익은 것들이 차츰 사라지는 일이지만, 길을 잃는 것은 낯선 것들이 새로 나타나는 일이다. 물체나 사물은 우리 시야에서, 혹은 지식에서, 혹은 소유에서 사라진다. 길을 잃을 때는 다르다. 그때는 세상이 우리가 알던 것보다 더 커진 셈이다.' - <길 잃기 안내서>, 리베카 솔릿
흥미진진한 여행 가운데의 길 잃기가 아니라, 아쉽게도 나는 새벽 시간에 좋아하는 책을 읽으며 생각을 펼쳐나가다가 생각 속에서 길을 잃고, 이리저리 떠오르는 아이디어들을 노란 육각형 연필을 들고 노트 위에 적어 나가다가 그 안에서 또 길을 잃는다. 생각들은 뻗어나가 길을 잃다가 다시 모여 큰 생각의 길을 열기도 하고, 자연스럽게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이 구분되는 혜안을 주기도 한다. 나로서 매일 할 수 있는 소극적 길 잃기가 하루를 더 적극적이고 생명력 있게 바꾸어준다. 길을 잃으면서 더 큰 세상을 만나고, 길을 잃으면서 오히려 자기만의 길을 찾게 된다.
고등학생 때 동네의 레코드 가게 주인아저씨는 나에게 두 장의 LP를 추천해 주셨다. 하나가 핑크 플로이드의 앨범이었고, 다른 하나는 미국의 전설적인 재즈 트럼펫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마일즈 데이비스의 <마일스톤즈(Milestones)> 앨범이었다. 마일스톤(milestone)은 도로에서 각 방향이 어느 쪽을 가리키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이정표, 혹은 중요하거나 획기적인 단계를 뜻한다. 핑크 플로이드와 마일즈 데이비스의 두 앨범이 대중음악 역사에서 얼마나 대단한 명반들이었는지 그때는 자세히 잘 몰랐지만, 아무튼 그 음악들을 들으며 위안을 얻고 막막하던 고등학교 시절을 잘 보낼 수 있었다. 당시의 나에게 일종의 이정표가 되어준 셈이다.
새벽에 소극적으로 길을 잃는다 하지만, 내 인생의 여정에서도 나는 꽤 많이 길을 잃었을 것이다. 그래도 다행히 지금 여기까지 잘 지내오고 있다. 지칠 때도 있었고, 땀과 눈물범벅인 채로 달리던 시간도 있었지만, 그 또한 언젠가 지나가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도 어느새 사라지게 마련이다. 바로 그즈음 알게 되었다. 내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동안에도 앞으로 계속 나아가고 있었고, 더 성장하고 있었음을.
길은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바위 위로 나무 아래로
햇빛 한 번 비치지 않는 동굴 옆으로
바다 한 번 만나지 못하는 강 옆으로
겨우내 내린 눈 위로
유월의 유쾌한 꽃들 사이로
풀 넘고 돌 너머
그리고 달나라 산 아래로
- <끊이지 않는 길(Roads Go Ever Ever On>, J.R.R. 톨킨(J.R.R. Tolkien)
월요일인 오늘은 오후에 비가 오다가 저녁인 지금 비가 그쳤지만, 날씨는 여전히 흐리다. 지루한 장마가 이번 주에도 계속되나 보다. 흐린 날씨에 마음마저 흐려져 의기소침해 있다면, 기억하자. 장마도 어느새 지나간다는 것을. 눈부시게 뜨겁고 찬란한 날들이 곧 올 것이다.
<마일스톤즈> 앨범 중에서도 경쾌하게 스타카토 합주로 시작하는 ‘마일스톤즈’ 곡이 특히 인상적이다. 고등학생 시절부터의 추억이 있어서인지, 듣다 보면 잘해오고 있다고, 앞으로도 잘할 거라는 응원의 음악처럼 들리기도 한다. 앞으로 얼마나 길을 잃든, 내면의 목소리를 믿고 계속 나아가도 좋겠다는 안도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