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어느 깊은 가을밤, 잠에서 깨어나 제자가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기이하게 여긴 스승이 제자에게 물었다.
"무서운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슬픈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달콤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 슬피 우느냐?"
제자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 꿈을 이뤄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영화, 달콤한 인생 Epilogue
나도 꿈을 꾸었다. 너무나 달콤해서 절대로 깨기 싫은 꿈을. 하지만 그 꿈을 내가 자는 사이 꾼 것도 아닌, 아니면 내가 애써 오랫동안 그려왔던 것도 아닌, 누군가가 나에게 화려하게 치장하고, 채워 넣은 꿈이었다.
꿈은 너무나 달콤했다. 그 꿈을 꾸기 위해서, 이루고 싶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어쩌면 결코 잡을 수 없는 꿈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꿈은 더 달콤하고 아릿했으며, 그것을 생각할 때면 눈물조차 고이기 일쑤였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나는 달콤한 꿈을 꾸지 못했다. 그 누구도 치유해주지 못하는 아프고 슬픈 꿈으로 인해서 매일 바닥에 눌러붙어야 있어야만 했다. 아프고 슬픈 나의 꿈들은 너무도 잔인해서 상상도 할 수 없는 무게로 나를 위에서 짓눌렀다. 한 번이라도 몸을 움직이려고 하면, 오히려 더 무거운 무게로 나를 내리눌렀다. 내 몸이 산산조각이 나는 것을 어쩔 수 없이 바라보야만 했던 그때, 나는 눈물조차 흘리지 못한 채, 여러가지로 세상과 멀어질 생각만을 궁리했다.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날에는, 태양이 내 방으로 스며들어오는 것이 부끄러워, 해가 뜬 내내 어두운 그늘을 찾아다녔다. 잠이 들면 아프고 무거운 꿈이 다 내 몸을 짓누를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늘만을 찾아야 했다. 당장 내 앞으로 내리쬐는 빛을 바라보기에 내 얼굴을 타고 흐른 눈물자국이 초라하고 창피해서 나는 그렇게 해가 질 때까지 계속해서 그늘만을 찾아다녔다.
그늘 속에서 나는 웅크려 앉아 내가 살아온 삶을 뒤돌아 보았다. 누군가는 쓸데없이, 가치 없이 길다고 했을,
또 다른 어떤가는 아직도 늦지 않았다고 애써 가장한 위로를 하는 나의 지난 과거를 수없이 돌이켰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내 삶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어쩌면 그토록 누군가의 희망이자, 나에게도 주입되었던 그 아름다운 꿈을 꾸었던 것이 그토록 잘못이었을까,
매일 낮이면 그렇게 깊은 굴 속의 어둠을 빌려 몸을 움츠리고 나의 시간을 또다시 버리고 있었다.
어느 날, 문득 '기억이 없어.'라는 말을 중얼거렸다. 나는 나의 기억이 없었다. 나의 삶에 대한 그 어떤 기록도, 그래서 그로 인해 채워지는 "기억"이라는 퍼즐도 그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내가 꿈을 꾸던 사이, 꿈에 미쳐서 정신 나간 듯이 미친 사람처럼 이리저리 흔들려 다니던 그 사이, 나는 "기억"이라는 나의 흔적을 한 조각도 채 남기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극도로 피폐해졌던 어느 날 겨울 오후, 주위에서 그토록 말렸던,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또다시 죽음과 가까워지려 노력할 나 자신이 두려워졌다. 그리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시늉으로 오래전부터 봐왔던 병원의 문을 살며시 밀었다.
의사는 허공만을 쳐다보는 나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는 내 눈이 당신의 눈을 보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이곳에만 오면 무엇인가 조금 해결될 수 있을 것이던 나의 작은 바람이 조각조각 무너지며 흩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곳에도 나를 위한 어떤 작은 것도 없었다. 나는 그냥 꿈을 쫓던 철없던 아이였고, 그대로 성인이 되었으며, 마침내 그 꿈을 좇다가 하늘에서 떨어진 불쌍한 한 마리의 새일 뿐이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났던 어느 날, 상담을 하던 나는 오열을 터뜨렸다. 그 누구도 막을 수도 없고, 나조차도 생각할 수 없었던 정말이지 너무나도 처연하고 서글픈 소리였다. 그렇게 30여분을 우는 동안 의사는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고대윤 님, 당신에게는 당신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아요. 그 어디를 봐도 당신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살아온 당신의 과거나 기록도 없는 것이겠지요. 어쩌면 지금부터라도 당신을 스스로 가둬두었던 문을 열고, 당신의 한가운데 숨어있던 보이지 않던 당신과 소통을 시작하세요. 그리고 조금 그 문이 열려서, 서로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면, 지금부터 당신의 "기억"들을 만들어가 봅시다."
내 마음속의 문을 살며시 밀어 여는 것은 생각보다 힘이 들었다. 내가 애써 거부해야 했던 또 다른 나 자신과의 만남은 고통을 수반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는 계속 밤새도록 울었다. 아직 햇빛과 익숙하지 않은 어떤 날에는 또다시 그늘에 숨어서 숨을 삼키며 울음을 삼켰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딱히 얼마라는 시간이 지난지도 애써 기억을 하지 않았다. 그냥 몇 달이 흐르지 않았다 싶었을 때, 나는 또 다른 나와 만나기 위해 그와 연결된 문을 살며시 밀었다. 마치 생면부지의 누군가를 만나는 것처럼 고통스럽고 낯설었다. 나는 그렇게 또 다른 나와 소통을 시작했다.
그리고 또 한 동안의 세월이 흐르고, 나는 지난날이 아닌, 오늘을 살아가는 나를 기억하기로 마음을 잡았다. 누군가가 띄워주고 예쁜 색으로 채색해 준 꿈이 아닌, 무채색이어도 혹은 그 꿈이 나를 괴롭혀서 다시 내가 주저앉아 울지라도 나는 이제는 나 스스로 꿈을 만들기로 했다.
기억의 조각들을 주어 모아서, 내 삶의 기록들을 맞추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었던 오직 한 가지 방법은 싸구려 토이 카메라 하나와 단 한 톨의 필름을 손에 쥐는 것이었다. 펜을 들어 손에 힘을 쥐고 노트 위에 글을 적기도 힘들었고, 그 글자들을 다시금 돌이켜 보는 것도 힘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가장 작고 저렴한 카메라에, 가장 싼 필름을 넣고 내가 살아왔던 시간의 조각들과 가장 비슷한 대상들을 찾아서 퍼즐을 맞춰가며, 나만의 "꿈"을 다시 채색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십여 년이 지났다. 그동안 꽤 많은 사진들을 찍으며, 내 카메라를 비웃는 사람들도 만났고, 내 사진들을 욕하는 사람들도 만났으며, 애써 외면하는 사람들도 만났다. 이제부터 써 내려갈 나의 기록들은 아픈 곳의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 부산히 뛰어다닌 나의 발걸음이며, 기억이자, 치료이다. 나의 사진과 글을 보지 않아도 상관없고, 그 어떤 느낌을 받지 않아도 상관없다. 하지만, 마지막 숨까지 몰아쉬던 내가 다시 살기 위해서 발버둥 치던 모습을 생각하면, 되도록 더 큰 아픔의 말은 조금 덜어주시기를 바란다.
사진/글 고대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