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되지 않는 상실
각오는 하고 있었다. 3개월을 선고 받았으나 이미 10개월을 넘기고 계셨으니 언제 연락이 올까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열흘 전 쯤 시간이 되어서 가족 모두 함께 가서 마지막일 거라 생각되는 인사를 하고 왔는데 ‘오늘 하늘나라 가셨습니다’ 문자가 왔다. 손이 떨려 항공권 예매를 못 하고 있자 신랑이 대신 항공권을 끊어주었다. 육아휴직을 하고 있던 터라 장례식에 갈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2014년. 처음으로 학부모가 되는 첫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에 나는 엄청난 의미 부여를 했었다. 시골에서 맘껏 뛰어놀게 하고 싶어서 여기저기 시골 학교를 알아봤었는데 근처에 학원이나 문방구가 없으면서 시내가 왕복 1시간 이내인 곳, 한 학년 인원이 20명은 넘으면서 토박이 비율이 낮아 텃새가 적고 자연환경이 아름다운 곳. 일 년 여의 탐색 끝에 제주 애월에 있는 장전초등학교로 입학을 결정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제주에 간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 모두 (신랑마저) ‘또 엉뚱한 짓 하는 구나..’ 하는 우려를 했지만 결국 집을 구하고 입학을 시키자 부러워도 하고 놀러오기도 자주 했다. 금요일 밤에 와서 일요일 저녁에 다시 돌아갈 때 마다 헤어지기 싫어 눈물을 보이던 신랑도 세 달 쯤 지나자 주말의 제주생활을 만족해 했다. 오히려 자신있게 제주살이를 실행한 내가 2월 말 이사를 하고 입학식도 마친 3월 초가 되었을 때 오롯이 혼자 애 둘 만 데리고 온 나의 무모함을 실감하며 겁이 났었다.
둘째 아이를 입양하여 키우면서 입양가족 모임을 자주 했었으므로 입양가족 커뮤니티에 제주입양가족 있으면 만나고 싶다고 글을 썼더니 제주지역 입양가족 대표님이 연락하셨다. 그 분이 진수(가명)아빠다. 제주에 혼자 애들만 데리고 왔다고 하니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연락해 주시면서 말그대로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셨다. 토박이만 아는 숨은 명소들에 데리고 다니시면서 아이들 놀게 해 주시고, 밭에서 나는 각종 농산물도 집 앞에 푸짐하게 놓고 가기도 하셔서 우리동네 사람들과 나눠먹을 수 있게도 해 주셨다.
입양가족모임이라 여러 어른과 여러 아이들이 한꺼번에 만나 모두들 친하기는 했으나 특히 나는 진수아버님께 의지를 많이 했다. 나는 신랑도 있고 언니도 다섯이나 있는데도 진수아버님처럼 나를 살펴준다는 느낌을 준 사람은 처음이었다. 아이에 대한 조언을 해 주실 때에도 비난없이 이해받는다고 느끼게 해 주셨고 남편없이 애들만 데리고 와 있으니 여기저기 불편한 곳 없나 늘 세심하게 신경써주셨다. 육아 뿐 아니라 인생에 대한 대화도 자주 하면서 제주에 사는 2년간 나는 이제야 정말 제대로 된 어른을 만났다는 생각에 충만했다. 다시 인천으로 돌아와 일상을 열심히 살아내고 있었던 2017년. 진수아버님이 담낭암 진단을 받았다는 말을 들었다. 우리 둘째딸이랑 진수랑 결혼도 시키자고 농담삼아 약속도 했고 진수어머님과 친하게 지내던 다른 한 집과 더불어 세 집이서 땅을 사서 마당을 공유하는 집 세 채를 지어서 같이 살기로 하고 땅을 알아보던 중이었었다.
신랑은 출근을 하고 아이들 모두 학교와 어린이집에 보낸 후 서둘러 김포공항으로 갔다. 아무데나 주차를 하고 공항으로 들어섰는데 복잡하고 시끄러운 와중에 멀쩡하게 비행기를 잘 찾아가는 내가 너무 이성적인 것 같아 나 스스로에게 창피했다. 비행기 날개에 비치는 햇살과 멋지게 펼쳐진 두툼한 구름이불. 아무렇지도 않게 여전한 것이 야속했다. 여기저기 들뜬 사람들의 대화소리와 아이들의 칭얼거림이 뒤섞여 분명하지 않은 거대한 소음이 되었다. 기압차로 인해 귀가 먹먹해지지 않았으면 옆 좌석에서 알콩달콩하는 연인에게 화를 냈을 지도 몰랐다.
제주공항에 내려 5번 게이트 앞에서 800번 버스를 기다리는데 눈물을 닦다가 갑자기 서러워져 흐엉엉 소리가 나왔다. 순수하게 돌아가신 분에 대한 슬픔 때문인지, 내 노후의 삶에서 우리 부부과 함께 늙어갈거라 의심치 않았던 분의 부재가 아쉬워서인지 잘 모르겠는 내 마음이 이기적으로 느껴졌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도 진정되지 않아 애를 먹었다. 해안동에서 내려 270번 버스를 갈아타면서부터는 너무 부은 눈이 민망해지지 않게 마음을 가다듬었다.
하귀농협장례식장에 내렸다.
드문드문 컨테이너 식 농가 서너 개. 멀리 보이는 오름들. 군데군데 노랗고 붉은 꽃들이 섞인 풀밭에 살랑살랑 바람이 불었다. 4차선 도로에 덩그러니 장례식장만 있고 죄다 밭인지 뭔지 푸른빛 일색이었다. 도로 위에 지나가는 차도 거의 없는데 버스정류장에서 내리자마자 장례식장이 있어서 도망갈 곳도 없었다. 고즈넉한 분위기의 동네에 생뚱맞은 4층짜리 장례식장의 움직이는 전광판이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제주의 3월은 날씨가 지나치게 좋았다.
아직 한 낮이라 사람도 별로 없는데 울다 지친 진수 엄마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진수를 보니 참고 있던 눈물이 다시 쏟아졌다. 내가 이래도 되나 싶게 너무 눈물이 나서 언니(진수엄마)를 보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진수아버지께 인사를 하고 언니와 육개장을 놓고 앉았는데 “OO 엄마, 멀리서 와줘서 고마워. 진수아빠가 OO엄마는 자기 여동생이라고 늘 그러셨는데.. 좋아하겠다” 하셔서 다시 한번 목을 놓았다. 친정아버지 돌아가셨을 때보다 더 가슴이 미어지는 것이 죄스러워 더 울었다. 안 울려고 다른 생각을 해봐도 진정이 안되어 그날 집으로 가는 비행기는 타지 못했다.
다음날 집으로 어떻게 돌아왔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진수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정확히 5년이 지난 올해 3월. 진수엄마가 돌아가셨다는 부고가 들려와서 허둥지둥 다시 제주로 갔다. 그 때와 같은 하귀농협장례식장. 나는 아이가 어려 오래 살아야 하는데 자꾸 넋을 놓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