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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신애 Jul 25. 2021

개소리에 대하여 On Bullshit

책임지지 않는 말이 난무하는 시대, 개소리에 대한 묵상

어느 점심자리에서 권위 있는 한 언론인이 책을 한 권 소개했다. 제목이 '개소리에 대하여'이다.


손바닥만 한 문고판 사이즈, 하드커버로 고급스럽게 포장된 책 표지엔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라는 은장 마크가 찍혀 있어 장난이라 보기엔 진지한 느낌이 가득했다. 90쪽도 채 안돼 보여 가볍게 쓱 훑고 지나갈 것 같아 당장 주문해서 읽기 시작했다.


얇다고 해서 농도가 옅거나 재미가 없는 책은 결코 아니다. 책의 저자는 도덕철학자로 유명한 프린스턴대학교 철학과의 해리 G. 프랭크퍼트(Harry G. Frankfurt) 교수. 그가 쓴 책들이 <진리에 대하여>, <불평등에 대하여>, <사랑의 이유> 등등 진지한 사유를 담은 것들이고 학계의 인정을 받는 저명한 철학자라는 것을 감안하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난이도이다.


저명한 학자가 '개소리(Bullshit)'라니.

마치 어린애들이 '똥' 이야기를 하면 마냥 좋아하듯이, 어른들은 적당힌 '욕'과 비속어가 섞이면 좋아한다. 묵혀 둔 속앓이에 대한 배설일 수도 있겠다. 그러고 보니 주변에서 별 의미 없는 욕을 일상 용어로 시원시원하게 하는 사람을 보면서 매우 재미있다고 느낀 것이 대리만족인가 싶다. 욕쟁이 할머니가 인기 있는 것처럼. 이 철학자가 '개소리'논문을 씀으로써 사람들의 '배설욕'을 만족시켜주려나 싶기도 했다.


처음 10쪽은 졸음 쏟아지는 눈문 투의 어조였다. 개소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옥스퍼드 영어사전의 단어 뜻과 유의어들을 나열해 가며, '무엇은 개소리이고 무엇은 개소리가 아닌지, 개소리와 헛소리는 무슨 차이이고, 개소리와 거짓은 어떻게 다른지..' 같은 지루한 말장난에 1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 보통 힘이 많이 드는 것이 아니어서 '이 책이 개소리네'라고 생각됐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필(feel)이 꽂히면서 언어유희의 맛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거짓말을 하려면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미묘한 차이를 알아야 하고 그것을 구사하려면 일종의 장인정신이 필요하다는 말에 깊이 공감하면서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들은 지능이 좋을 수밖에 없겠다 싶었고, 개소리, 즉 허튼소리는 참이나 거짓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서 그 자체를 진실처럼 들리게 하는 데에 예술성이 필요하다는 부분을 읽으면서는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가벼운 말의 무게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저자의 의도는, 이 시대의 무책임한 언어들이 만들어 낸 혼란에 대한 경고인 듯하다. 인기에 영합하고, 나에게 유리한 말들을 지어내고, 효과적으로 보이기만 하면 되는 그런 말들, 개소리들이다. 그것이 언론이든, 정치이든, 마케팅이든 현대사회는 '있어 보이고 그럴 듯 해 보이는' 진실성에 별 관심이 없는 말이 대량 생산되고 있고, 나하고 가깝고 친한 사람이 말하면 '진정성'이 있다고 옹호하는 사회이다.   


저자는 진정성이라는 미명으로 진실성이 묻히는 것에 대해 바로 그게 '개소리'라고 점잖게 야단치고 있다. 차라리 거짓말이 개소리보다 낫다고 말한다. 차라리 거짓말은 어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와 목적이 있어서 해야 하는 것이기라도 하니까. 참과 거짓에 대한 무관심, 진실 따위는 아예 안중에도 없고 내 입에서 내뱉은 말에 대해 '거짓말이 아니라 진정성 있게 한 말'이라며 교묘하게 책임을 피해 가는 것이 너무 당연해진 세태에 대해 그것이 제일 나쁘다고 지적한다.


나이가 들면서 나 혼자 속으로 하던 고민의 맥락과 이 책의 내용이 일맥상통했다. 잘 모르면 입 다물고 조용히 있어야 한다. 모르고 함부로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나서서 일하고 싶으면 먼저 충분히 배우고 알고 해야하고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는 법을 알아야 한다. 젊을 때는 모르고 해도 그 여파가 크지 않고, 자잘한 실수를 통해 얻는 교훈들이 있고, 누군가 내 잘못을 뒷감당해줄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다르다. 모르면 리더를 하면 안 되고 잘하고 잘 아는 사람들에게 맡겨야 한다. 잘 모르면서 양보하기는 싫고 앞에 나서서 큰 결정들을 진정성만으로 하니 나라살림이 망가진다. 나랏일을 모르면 정치를 하지 말아야 하고 부동산을 모르면 부동산 정책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된다. 몰라서 그랬다고 변명하는 것이 제일 무책임하다.


책을 덮으면서, 일을 더 하려면 한 자라도 더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말을 아끼고 많이 배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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