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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고양이 Nov 18. 2021

나 인턴, 불고기 먹고싶다

이것은 필사적으로 잠에서 깨기 위한 새끼 인턴의 과몰입12

배가 고픕니다.

오늘은 불고기가 먹고싶습니다.











오늘은 수능입니다. 학생들과 공무원은 보통 1시간 늦게 출근하고 등교합니다. 우리 집 애기도 늦게 등교하고, 아빠도 늦게 출근하기에 저도 기대했으나 우리 회사는 그대로 정시출근이더군요. 공무원만 해당되나 봅니다. 하하하. 노예주의 자본은 오늘도 출근을 했습니다. 지하철은 아주 미세하게 사람이 조금 빠졌고, 길거리에 차는 확실히 적어보였습니다. 그리고 날은 시리도록 춥고요. 지지난주만해도 오락가락하던 날씨가 단번에 얼어붙은 것을 보면 역시 '수능'은 우리나라 절기에 새로 속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수능하면 먹는 것 중 다들 뭐가 떠오르시나요? 달달한 초콜릿? 엿? 수능 끝나고 먹는 치킨? 저는 수능도시락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수시 면접을 치르고 수능이 한달 남은 시점, 대형마트에 가서 보온 도시락을 구매했습니다. 그리고 엄마와 머리를 맞대고 고심하여 도시락을 쌌죠. 자잘한 반찬들은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만, 도시락의 메인은 바로 '불고기'였습니다.




 고기를 먹어야 근기가 생긴다

이 말은 우리 집 스물 몇 번째 가훈 혹은 유행어와도 같은 말입니다. 채소는 포만감이 있지만 속이 금방 꺼지는 반면 고기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걸 두고 '역시 근기가 있다'고 말합니다. 가끔씩은 동물성단백질을 먹어줘야한다는 거죠. 너무 많은 고기는 몸이 부대끼지만 적당량의 고기를 먹어야 힘을 내어 공부도 하고 일을 한다, 가 우리 집이 가지고 있는 생각인데 이 생각으로 하여금 수능 도시락 메인은 '불고기'가 되었습니다.


희안하게 저는 장에 탈이 난 적이 별로 없습니다. 딱 한번 햄버거를 먹고 화장실에서 난리가 난 적과 어릴 적 자반증이 있었을 때 제외하고는 멀쩡합니다. 긴장하면 속이 메슥거리긴 해도 토하거나, 설사를 한 적은 없었죠. 우리 집에서 아빠를 제외하고 대체로 건강한 위장을 가지고 있는 편입니다. 물론 장건강은 아빠가 저보다 건강합니다. 자극적인 걸 많이 안 먹어 그런가봅니다.


그래서 남들이 다들 체할까봐 죽 두그릇씩 싸고, 유부초밥, 나물반찬으로 도시락을 쌀 때 저는 제가 먹고 싶은 것으로 도시락을 쌌죠. 국 하나, 나물 반찬 두어개(혹시나 탈이 날까 염려한 마지막 양심이자 마지노선이었습니다), 그리고 밥과 불고기. 앞 뒤로 깨작깨작 먹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저는 열심히, 싹싹 긁어먹었습니다. 수학 마지막 문제 풀 때보다 더 열심히, 국어 비문학 지문 볼때보다 열심히 먹었습니다. 당연하죠, 저는 지진때문에 수능이 한번 미뤄져서 어지간한 일 아니면 콧방귀도 안뀌게 되었거든요. 비문학과 수학 16번을 풀며 1등급은 글렀으니 문제나 똑바로 보고가자 라는 마음으로 풀었고, 밥이나 잘 먹고 가야지 하는 마음으로 도시락을 비웠습니다. 다행히 대학에 붙었죠.


그렇게 점심을 먹었고, 워낙 든든해서인지 제2외국어가 끝나고 난 뒤에도 그렇게 허기지지 않았습니다. 죽을 먹은 친구들은 앞의 사람을 잡아먹을 뻔 했다더군요.



 청양고추와 당면

우리집 불고기의 포인트는 청양고추와 당면입니다. 사실 수능 도시락은 고기를 싸갔으나 그래도 혹시 탈이 날지도 모른다는 염려 하에 청양고추가 빠졌죠. 당면도 불어서 맛이 없을까봐 빠졌습니다. 물론 불고기는 맛있었습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집이었으면 여기에 밥 비비고 김가루 굴려서 맛있게 먹었을텐데...' 따위의 생각이 가득했죠.


당면은 물에 미리 불려둡니다. 우리 집 앞 새로 생긴 정육점은 고기도 좋고, 양념 간도 세지 않고 맛있습니다. 거기서 불고기거리를 삽니다. 기름기가 없지만 그래도 살코기쪽으로 달라고 요청하면 '아이 참 무슨 기름이 있다고~' 하면서도 살코기를 골라 담아줍니다. 파채와 소스를 꼬박꼬박 넣어주고 포인트도 많이 쌓이는 것이, 참 좋은 집입니다. 나가기 전 '많이 파세요'라고 꼭 말하고 갑니다.


불고기거리와 양파를 달궈진 팬에 들들 볶습니다. 거의 익었을 때 불린 당면을 투하합니다. 양념을 잡아먹고 당면이 투명한 간장색을 띠며 익어갑니다. 위에 대파를 올리고(푸른 야채라면 다 좋습니다. 푸른 한 것이 섞여있어야 입맛이 돌지요.) 청양 두어개를 썰어 넣어줍니다. 청양은 처음부터 넣으면 안됩니다. 청양 특유의 매콤하고 알싸한 맛이 날아가버리거든요. 요리가 완성되기 10분 전 청양을 넣어 풍미를 끌어냅니다.


불고기가 완성되면 접시에 담고 위에 깨를 솔솔 뿌려줍니다. 그럼 밥이 따로 없어도 술술 넘어가는 불고기가 완성됩니다. 상추에 고기를 열심히 싸 먹습니다. 부들부들한 상추는 외갓집에서 가져왔거나 마트에서 싸게 주고 산 조선상추입니다. 참고로 상추는 오전에 따야합니다. 낮이 되어 해가 뜨면 수분이 줄어들어 조금 뻣뻣하고(간혹 억세고) 쓴 맛도 나거든요. 이왕이면 아침이 제일 좋습니다. 맛있게 먹으려면 참 부지런해야겠죠?


쌈으로 배를 채우면 남은 자투리 고기와 국물에다 밥을 비벼먹습니다. 그럼 섬유질과 단백질, 탄수화물의 완벽한 조화가 이뤄진 식사를 마치게 됩니다. 속이 든든합니다.



 근기가 넘쳤던 다음 날

수능날은 '멍'그 자체였습니다. 양말 신는 것도 까먹어서 집에서 신었던 덧신을 그대로 신고 고사장으로 향했죠. 문제가 어려우면 울 것 같았는데 울지는 않았습니다. 헛웃음만 났어요. 수시 면접까지 다 보고나니 이판사판이다, 이런 마음가짐이었던 것 같습니다. 서울로 갈 거라고 큰소리 뻥뻥 쳤는데 못 가면 어쩌지, 한편으로는 '그래서 어쩌라고'를 속으로 중얼거리며 수능을 치고 나왔습니다. 고사장 분위기가 조용한 걸 선호해서 제2외국어보는 고사장에서 쳤고, 수능 전날 기도도 했지만 사실 그런 것은 다 소용없습니다. 수능 당일 멘탈이 나가지만 않으면 됩니다. 저는 이미 일주일 전 수능이 연기되어 이미 멘탈이 털린 적이 있어서 초연한 상태였죠.


수능이 끝나고 계단에서 '느아악!' 친구와 소리쳤습니다. 욕을 했던 것 같기도 했습니다. 교문 나와서 조금 걸으니까 가족이 보였습니다. 눈물은 나지 않았고, 갑자기 배고파졌습니다. 그길로 바로 소고기를 구워먹고 집에서 맥주 한 모금을 부모의 감독 하에 홀짝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9시에 눈 떴습니다. 


네 맞습니다. 지각을 한 거죠! 수능이 목요일인 이유는 애들이 수능 끝나고 자살했는지 안했는지를 다음 날 등교 여부로 알기 위해서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눈을 뜨자마자 햇살이 찬란했고 새소리가 들려왔으며 몸은 가뿐했습니다. 핸드폰에는 '학교 안 오니'라는 담임선생님의 문자가 있었습니다. 긴장의 끈이 풀려서일까요, 저는 허겁지겁 교복을 입으며 엄마를 원망했죠. 그런데 엄마 왈,



니가 오늘 학교 안가도 된다고 했잖아!


엄마에게 멀쩡한 목소리로 '오늘 학교 가지 않아도 된다. 괜찮다'라고 또박또박 말했다는 겁니다. 이게 저의 주사였을까요. 현재까지 술을 마신 경험으로는 주사는 딱히 없는 것 같지만, 어쨌든 학교로 달려갔습니다. 제 고3담임선생님은 고지식하고 빡빡하기로 유명하신 분이라서 더 빨리 뛰었죠.


학교에 도착하자 선생님은 저를 불러놓고 씩- 웃으며 왜 늦었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예비 문창과 답게 '어제 수능끝나서 과식했더니 탈이 났나봐요'하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시시각각 벌게지는 얼굴을 보고 선생님은 아마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냥 늦잠 퍼질러 잤다는 걸요. 수능이 끝나서인지 지각하지 말아라, 하고 선생님은 저를 놓아줬습니다. 아직도 그때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합니다. 










 수능 망치면 인생도 끝날 거라 믿었던 심약한 정신상태는 몇 년 뒤 '아 어쩌라고 인생 책임져줄거 아니면 조용히 하쇼' 라고 중얼거리는 나름 굳세어진 정신상태가 되었습니다. 물론 작은 일에도 덜덜 떨지만 고3 때보다는 나은 것 같습니다. 그때 상상했던 것보다 더 멋진 삶을 살고 있고요. 


수험생분들도 수고했고, 고생많았고 그동안 못했던 거 실컷 하세요. 오늘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더 나은 미래가 기다릴테니까요.





낯간지러운 말을 했더니 배가 고픕니다.

불고기 먹고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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