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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의 한 달 살기 - 현실과 이상의 사이에서

한국에서의 한 달 살기 두 번째 이야기

by 리라로

한국에 도착한 며칠 동안은 시차 탓에 밤마다 잠을 쉽게 이루지 못했다. 평소라면 누구보다 깊이 잠드는 편이라, 새벽까지 뒤척이는 경험은 늘 낯설다. 모두가 잠든 시간, 홀로 잠을 기다리는 순간은 지루함을 넘어 괴롭기까지 하다. 어쩌면 시차라는 특수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불면의 고통을 이렇게 생생하게 체감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음 날, 부모님 댁 거실에서 커다란 텔레비전을 켰다. 유럽에서는 비교적 작은 화면을 쓰는 경우가 많아, 부모님의 텔레비전은 마치 작은 극장 스크린처럼 느껴졌다. 채널을 돌리니 유튜브로만 접하던 한국 드라마와 예능이 끝없이 쏟아졌다. 평소 텔레비전을 즐겨 보는 편이 아니어서인지, 수많은 채널 가운데도 특별히 눈길이 가는 프로그램은 없었다. 대신 유난히 시선을 붙잡은 것은 광고였다.


실손보험, 암보험, 장례 준비 같은 광고들은 현실을 거침없이 들이밀었다. 반복해서 흘러나오는 멘트를 듣고 있자니 ‘맞아, 건강도 챙겨야 하고, 보험도 들어야 하고, 결국 돈도 더 벌어야 하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다. 내가 사는 곳에서는 건강보험 덕분에 이런 고민을 세세히 하지 않고 살아왔는데, 한국의 광고들은 현실감을 날카롭게 끌어올리며 마음속 깊은 곳에 파문을 일으켰다. 돌이켜보면, 젊은 시절에는 취업이나 꿈같은 당장의 문제들이 더 절실했지만 이제 중년이 되니 서서히 노후에 대한 생각이 밀려온다. 그저 오래 건강하게 살면 충분하리라 여겼지만,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결국 경제력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그래야만 훗날 가족이나 자식에게 손을 벌리지 않고 당당하게 늙어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다 문득 오래 산다는 것의 의미를 새롭게 묻게 되었다.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져 채널을 돌려 프로그램을 보기로 했다.


그러나 프로그램의 내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각종 증상을 세세히 다루는 건강 정보, 불행한 결혼 생활, 지친 육아의 일상, 범죄 사건… 화면 속에는 삶의 그림자가 진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조금 더 밝은 무언가를 찾고 싶어 채널을 돌리다 보니 노래 경연 프로그램이 눈에 들어왔다.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놀라운 실력을 뽐냈지만, 결국 승자와 패자가 갈리는 순간에는 마음이 씁쓸해졌다. 다시 채널을 돌리니 잡티 하나 없는 중년 진행자가 피부 관리 기기와 화장품을 소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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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해외생활중이고 현재는 스위스에서 생활중 입니다. 교육, 여행, 해외생활에 대한 다양한 글을 나눕니다. 말랑 말랑한 감성에세이를 종종 끄적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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