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KC8yST8EzAE
새벽 4시.
한참 꿀잠을 자고 있던 나를 누군가 흔들어 깨웠다. “누구냐, 너?” 마치 치한을 대하듯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였다. 엄마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같은 질문을 했고 그때마다 눈을 뜨지 못하는 나를 세차게 흔들어댔다. 나는 건성으로 대꾸하며 어서 빨리 이 소란이 멈춰지기만을 바랐다.
얼마 후 엄마는 ‘아이고 우리 막내니? 바지 보니 맞네! 내가 진짜 미쳤나부다!’ 하며 나를 꼭 안아 주셨다. 그걸로 사건 종결. 우리는 평온을 되찾았다.
아침이 되자 나는 낄낄대며 언니에게 엄마의 만행을 고자질했다.
2018년 1월.
이른 아침 엄마는 옆방에서 자고 있는 내게 전화했다. “나 머리 아파.”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엄마는 이 시간에 웬만한 일로 막내의 잠을 깨울 사람이 아니었다.
엄마의 오래된 폴더폰
병명은 뇌출혈. 그중에서도 가장 예후가 좋지 않다는 지주막하 출혈이었다. 주치의의 말을 요약하자면 대충 이렇다. 멀리 있는 가족들에게 연락해라. 하루 두 차례 면회가 가능하니 돌아가면서 만나게 해라. 중환자실에서 나온다 해도 50%는 한 달안에 사망한다. 생존한다 해도 보통 거동이 어렵다. 그리고 덧붙였다. 앞으로 하루하루 드라마틱한 일이 일어날 거다. 그때는 주치의의 마지막 멘트가 그닥 와 닿지 않았었다.
드라마틱한 일은 일반 병실로 옮겨진 직후 시작되었다. “엄마, 나 누군지 알겠어?” 하는 언니의 말에 엄마는 퉁명스럽게 툭~ 내뱉었다. “내가 널 어떻게 아니?” 그리고 자꾸 엄마를 부르는 나를 대놓고 비웃었다. “내가 지 엄마래.”
엄마는 하루 종일 한쪽 손을 움직였다. 때론 박자를 맞췄고 때론 가상의 오케스트라를 향해 지휘를 했다. 이 기이한 행동은 수면 중에도 계속되었다.
심지어 그 손으로 자꾸만 자신의 대변을 만지려 하셨다. 엄마는 평소 결벽증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깔끔한 사람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손으로 무언가를 가리려 하셨던 듯하다.)
뇌출혈 환자의 대소변에서는 참으로 유니크한 냄새가 난다. 기저귀를 한 번 갈고 나면 거품이 잘 나는 비누로 진종일 손을 씻어도 그 여운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 냄새에 익숙해진 가족들이 TV로 올림픽 경기를 보고 있는 사이, 나는 슬쩍 침대로 기어올라가 엄마를 안아 보았다. 배설물 냄새 사이로 희미하게 그리운 향기가 났다. 엄마 냄새였다. 엄마의 뺨에 볼을 부비며 중얼거렸다. “엄마 냄새 나.”
내 말을 들었는지 가족들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엄마와의 일상이 그리웠다. 이제 다시는 엄마와 모닝커피를 마실 수 없을 것 같았다. 평생 아픈 곳이 많았던 엄마는 식탁에 머리를 박고 엎드려 있곤 했다. 통증에도 불구하고 딸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침대에서의 휴식을 한사코 마다하는 엄마에게 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질문을 했었다. “엄만 딸들이 그렇게 좋아?”
나는 매년 한 달 이상 배낭여행을 다녔다. 내가 돌아오는 날이면, 집 앞 공항버스 정류장에는 얼굴이 반쪽이 된 엄마가 서있었다. 아마 아침부터였으리라. 오랜 가사 노동과 관절염으로 고통받아왔던 엄마의 굵은 손가락은 집에 돌아오는 길 내내 내 손을 쥐고 놓지 않으셨다. 손이 아프다고 하면 옷자락이라도 움켜쥐셨다. 마치 여기서 놓치면 다신 보지 못할 것처럼.
엄마의 애정표현에 대한 나의 화답은 언제부터인가 더 이상 귀국일을 공지하지 않는 것이었다.
마디마디 굵어진 엄마의 손가락
나 때문에 병실 분위기가 숙연해진 것 같아, 이번엔 속으로 중얼거렸다. ‘엄마, 우리 다음 세상에는 친구로 만나자. 굳이 다시 가족으로 태어난다면 그땐 내가 엄마 하자. 엄마는 딸로 태어나서 배낭여행 가. 내가 엄마 기다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