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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귀와 백발 – 병원에서 내가 마주한 것들

알면 약, 모르면 나만 손해

by Lilla

진료실의 빈자리를 채운 건 청년도, 시스템도 아닌 은퇴한 의사였다.

내 오른손, 검지와 중지 사이. 작고 거친 사마귀가 네 군데나 피어 있었다. 작년엔 동네 피부과에서 세 차례 냉각치료를 받았지만, 녀석들은 끈질기게 남아 있었다. 결국 치료를 멈췄고, 시간은 흘렀다.

올해 3월, 다시 마음을 다잡고 대학병원에 예약을 넣었다. 캘린더에 표시된 날짜는 한 달 반 뒤였다.

겨우 찾아간 진료실. 의사는 인사도 없이 차갑게 냉각기를 들었다. 순식간에 얼음 같은 고통이 손가락을 찔렀고 그날 이후 한 달 넘게 손을 쓰지 못했다. 다시는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건 최소 10회는 해야 합니다.”


다음 진료 날, 분위기는 바뀌어 있었다.
“거의 다 나았습니다. 그런데 이젠 더 이상 치료 못 해요. 사마귀는 개인병원에서 하세요.”
의사의 손에 들린 건 연고 한 통뿐이었다. 어이없고, 허탈하고, 화가 났다.

하지만 가장 묘한 감정은, 그 의사가 백발이 성성한 노의사였다는 점에서 밀려왔다.
은퇴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얼굴. 그 얼굴이, 내 손을 들여다보며 연고를 건넨다.


누가 진료실에 남게 되는가


우리는 지금 이상한 의료 현실 속에 있다.
의사 수를 늘리겠다는 정부, 거리로 나선 젊은 전공의들, 그리고 그 갈등의 그림자 속에서 조용히 다시 청진기를 든 은퇴한 의사들.

‘시니어의사 지원사업’은 이런 배경 속에서 등장했다.
보건복지부와 국립중앙의료원이 운영하는 이 사업은 60세 이상 고령 의사 중 일정 경력을 갖춘 이들이 지역 의료기관이나 보건소에서 다시 진료에 참여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제도다. 월 1,100만 원(전일제) 혹은 400만 원(시간제)의 채용지원금을 제공하고, 현장 복귀를 위한 맞춤형 리트레이닝 교육도 제공한다.

공식 신청은 '닥터링크' 홈페이지에서 가능하며, 전국 149개 지역의료기관에서 시범적으로 운영된다.


다시 진료실로 돌아온 사람들


어떤 이들은 “은퇴 후에도 사회에 기여할 수 있어 멋지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고령자의 경험이 지역의료 공백을 메우고, 노인의 전문성이 ‘사회 자산’이 되는 것은 분명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 청년의 눈빛이 어두워지고 있다는 것, 그걸 우리는 놓치고 있다.

의사 정원을 늘리는 데 반대하며 거리로 나선 전공의들, 그들은 지금 병원을 떠나 있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은퇴한 의사들이 들어가 있다.

이건 단순히 ‘의사 부족’이라는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세대가 교체되지 않고 교차되는 구조, 그것이 지금 우리의 의료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시니어에게는 ‘기회’, 청년에게는 ‘압박’


60세 의사에게는 의미 있는 두 번째 삶의 기회일 수 있다.
하지만 30세 의사에게는 자신의 자리가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럼 국가의 입장은 어떨까. 지금 당장 병원 문을 열기 위해, 은퇴한 의사를 다시 부르는 것이 ‘현실적 대안’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바로 그 “현실”이 왜 이런 선택을 강요하는 구조가 되었는가”다.


숫자보다 중요한 것


시니어의사 지원사업은 필요하다.
지역 보건소, 공공병원, 의료취약지에는 당장 의사가 없다. 그 공백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한 자원이, 지금은 은퇴한 의사뿐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당장의 해법’으로 남는다면 괜찮지만, ‘장기적 구조’가 되어선 안 된다. 그건 청년 세대에게는 절망이고, 시니어에게도 부담이다.


우리는 함께 일할 수 있는가


세대 간의 협력이 아닌 세대 간의 자리다툼이 벌어지는 구조 속에서, 누구도 편하지 않다. 시니어도, 청년도, 환자도. 의료는 사람을 다루는 일이다. 의사 수는 늘어도, 사람을 지키는 시스템이 없다면, 우리는 같은 진료실 안에서 서로에게 등을 돌릴 수밖에 없다.


사마귀보다 더 아팠던 말


그 백발의 의사는 내 손을 보며 말했다.
“이제 다 나았어요. 더는 여기서 치료 못 합니다.”
말은 공손했지만, 나는 환자로서 너무 쉽게 내쳐졌다고 느꼈다. 그게 지금 병원의 현실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한 명의 사마귀 환자가 치료받는 과정에서도 이 사회의 갈등, 구조, 외면을 다 느낄 수 있다면,
그건 단지 개인의 불편함이 아니라, 시스템이 보내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은퇴한 의사가 돌아오는 건 아름다운 일이다. 하지만 청년 의사가 떠나는 건 비극이다.

그 둘이 같은 공간에서 함께 일할 수 있는 길, 그게 지금 우리가 정말로 찾아야 하는 의료 시스템의 재설계이자, 세대 공존의 시작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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