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가 훔쳐간 건 기억만이 아니었다-‘치매머니’ 시대

정책과 사람 사이

by Lilla


치매가 훔쳐간 건 기억만이 아니었다 – ‘치매머니’ 시대, 우리 가족이 선택한 길.


누군가의 시간이 천천히 사라져갈 때, 우리는 무엇을 지켜야 할까.

치매는 흔히 기억을 잃는 병이라 말하지만, 그보다 더 깊고 조용히 침식하는 것은 바로 ‘사람의 권리’다. 재산을 관리할 권리, 선택할 권리, 남긴 뜻을 실행할 권리. 그래서 요즘은 ‘치매머니’라는 단어가 생겼다. 치매로 인해 수천조 원 규모의 자산이 묶이는 사회, 일본이 먼저 겪었고, 한국도 그 문 앞에 서 있다.


'치매머니'란, 치매를 앓고 있는 고령자가 보유한 금융자산이 본인의 판단 능력 상실로 인해 동결되거나 활용되지 못하는 현상을 말한다.

일본에서는 2030년까지 치매머니 규모가 약 215조 엔(약 2012조 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며, 이는 일본 GDP의 40%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고령자 10명 중 1명 이상이 치매를 겪는 시대에, 금융자산은 물론 부동산까지 자산 대부분이 묶이며 경제 전체의 순환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2023년 기준, 일본 가계 금융자산 중 현금 및 예금 비중은 55.2%에 달하며, 미국이나 한국보다도 현금 보유율이 월등히 높다. 장롱 속의 예금, 그리고 치매로 인해 묶인 돈들이 일본 경제의 '돈맥경화'를 일으키고 있다. 이에 일본 정부는 '가족 신탁', '성년후견인제' 같은 제도적 대응을 통해 자산 동결을 막으려 하고 있다.


한국도 결코 예외는 아니다.

2023년 기준, 60세 이상이 전체 주택 보유자의 40.4%를 차지하며 자산의 64%가 부동산 같은 비금융자산에 묶여 있다. 특히 자산 이전에 대한 제도나 문화적 준비가 부족한 가운데, 치매 진단 이후 자식이라도 부모의 재산을 임의로 관리하거나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이는 곧 ‘노노증여’, ‘노노상속’의 구조로 이어지며 세대 간 갈등과 사회적 부담을 초래할 수 있다.


4년 전, 아버지는 간암으로 돌아가셨다.

가족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치매 초기 진단을 받았다는 것을. 다행히도 당신의 판단은 끝까지 선명하셨고, 모든 일은 우리 여섯 형제가 자연스럽게 나누어 처리할 수 있었다. 누구도 다투지 않았고, 누구도 앞서지 않았다. 그저 ‘우리 아버지를 편안하게 보내드리는 것’ 하나만을 바라보며 조용히 협력했다. 돌아보면 그것이 우리가 처음으로 ‘조용한 성년후견인’ 역할을 한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떠난 후, 어머니는 당신 이름으로 된 고가의 아파트를 조용히 정리하셨다.

그리고 본인이 살아계실 때, 정신이 가장 맑을 때 우리 여섯 형제에게 분할 상속을 마치셨다. 그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갑작스럽고, 그래서 더 슬펐다. 마치 어머니가 먼 준비를 하시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결단 앞에 마음 깊은 존경이 생겼다. 누구보다도 이성적이고 단단하게 살아오신 분이라는 걸 다시 깨달았다.


어머니의 하루, 철학이 된 루틴


어머니는 올해 90세다.

아침에는 정해진 루틴처럼 집안을 깨끗이 정돈하시고, 정갈하게 씻은 뒤 아침 식사를 준비하신다. 모든 것이 끝나면 시계는 대략 10시를 가리킨다. 그때부터 어머니의 첫 번째 수업, '금강경 제1교시'가 시작된다. 약 한 시간 반 동안 금강경을 소리 내어 읽으시고, 부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곱씹으며 스스로 공부하신다. 이는 단순한 낭독이 아닌 마음의 수양이자 기도이며, 치열한 자기 관리의 시간이다.

1교시가 끝나면 어머니는 잠시 휴식을 취하시고, 점심은 간단하게 드신다. 채식 위주의 식단인데, 이는 고기를 못 드셔서 시작한 선택이었지만 지금은 그 단순한 식사가 더 좋다고 하신다. 이후 오후에는 제2교시 금강경 공부가 이어진다. 4시쯤 공부를 마치고 나면 잠깐의 휴식을 갖고, 5시경 ‘동물의 왕국’을 보시며 저녁 식사를 하신다. 그리고 매일 저녁 7시 30분쯤, 큰오빠가 어머니 댁에 들른다. 큰오빠는 친정아버지가 아프기 시작하던 무렵, 가족과 함께 어머니 아파트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이사해왔다. 아버지의 병간호 대부분을 큰오빠가 맡아주었고, 우리 다섯 형제는 그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늘 간직하고 있다.

저녁이면 어머니와 큰오빠는 두세 편의 드라마를 함께 시청한다.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이야기하고, 비판도 하며 공감하는 시간이다. 어머니는 큰오빠가 집어먹는 볶은 땅콩을 슬쩍슬쩍 바라보며 웃고, 우리는 그런 장면이 어머니의 행복이라는 걸 안다.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동물의 왕국'이다. 우리 모두가 어린 시절부터 함께 봐온 친숙한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아마도 그 정겨운 영상과 익숙한 내레이션이 어머니의 하루에 따뜻한 리듬을 더해주는 것일지 모른다. 큰오빠가 돌아간 뒤에는 취침까지 스님의 설법 방송을 들으시며 하루를 마무리하신다.


매일 반복되는 이 일상이야말로 어머니 건강의 비결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어머니 곁에서 시장을 보고, 병원 진찰을 함께하고, 사찰을 동행하는 방식으로 조용히 돌보고 있다. 어떤 날은 우리가 성년후견인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실은 그럴 필요조차 없다. 어머니는 여전히 스스로의 삶을 가장 정성스럽게 꾸려가고 계시기 때문이다.그리고 지금도 하루 두 번, 금강경을 공부하신다. 식사는 혼자서 준비하시고, 병원도 정기적으로 다니신다. 우리는 어머니 곁에서 시장을 보고, 병원 진찰을 함께하고, 사찰을 동행하는 방식으로 조용히 돌보고 있다. 어떤 날은 우리가 성년후견인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실은 그럴 필요조차 없다. 어머니는 여전히 스스로의 삶을 가장 정성스럽게 꾸려가고 계시기 때문이다.


제도는 보호가 될 수 있을까?


치매머니란, 치매를 앓게 되면서 본인이 보유한 자산을 더 이상 활용할 수 없는 상태를 뜻한다.

일본에서는 그 규모가 2000조 원을 넘는다. 금융자산이 동결되고, 부동산은 상속 이전에 거래가 막힌다. 한국도 이미 고령층이 다수의 부동산을 보유한 상태에서 이 유사한 위험에 직면해 있다. 부모가 치매 진단을 받으면 자식이라 해도 그 재산을 마음대로 쓸 수 없다. 그래서 필요한 제도가 성년후견제다.

법원의 심사를 거쳐 후견인을 지정하거나, 본인이 건강할 때 미리 ‘임의후견’ 계약을 체결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은 제도에 대한 인식 부족, 절차의 복잡함, 가족 간 신뢰 문제 등으로 실질적 활용이 적다. 아직은 ‘선제적 준비’라는 말이 어색한 사회다.


자산보다 더 중요한 것


우리 어머니는 제도를 통하지 않고도 자산 이전을 마치셨고, 누구보다도 당당하게 노년을 살아가고 계신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치매머니’를 단지 금융문제가 아닌 삶의 철학으로 바라봐야 한다. 판단력이 온전할 때, 내가 가진 것과 남길 것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그 고민은 결코 노인이 되어서야 시작할 일이 아니다.

우리 부모님의 세대가 몸소 보여준 결정들. 그것은 자산의 이전이 아니라 사랑과 신뢰의 전승이었다. 우리는 그 전승을 말로 남기기보다는, 서로를 대하는 방식으로 이어가고 있다. 조용히 곁에 있는 일, 묻지 않아도 챙기는 마음, 그것이 우리 가족이 배운 유산이었다.

언젠가는 치매가 와도 존엄을 지킬 수 있고, 자산이 막히지 않으며, 가족 간 분쟁 없이 마지막 삶이 흐를 수 있는 사회를 꿈꿔본다. 그것이 준비된 사회의 모습일 것이다.

치매는 기억을 앗아가지만, 어머니의 하루는 지금도 맑게 기억되고 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건, 그 기억이 아니라 그 분의 ‘의지’였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치매는 기억을 앗아가지만, 준비되지 않은 사회는 그 사람의 삶 전체를 지워버릴 수 있다.

준비란 거창한 제도보다, 소박한 일상과 따뜻한 말 한마디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오늘 부모님과 나누는 작은 대화 하나가, 누군가의 내일을 지켜주는 첫 걸음이 될 수 있다. 제도를 통하지 않고도 자산 이전을 마치셨고, 누구보다도 당당하게 노년을 살아가고 계신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치매머니’를 단지 금융문제가 아닌 삶의 철학으로 바라봐야 한다. 판단력이 온전할 때, 내가 가진 것과 남길 것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그 고민은 결코 노인이 되어서야 시작할 일이 아니다.


우리 부모님의 세대가 몸소 보여준 결정들. 그것은 자산의 이전이 아니라 사랑과 신뢰의 전승이었다.

치매는 기억을 앗아가지만, 준비되지 않은 사회는 그 사람의 삶 전체를 지워버릴 수 있다.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준비는, 어쩌면 작은 대화 한마디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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