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는 어떻게 사라지는가 –
AI 재판과 법의 본질에

정책과 사람 사이

by Lilla


나는 한국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이후 독일로 건너가 8년이라는 시간을 투자해서 법학 학위를 받았다.

나의 청춘의 시간을 독일이라는 그 낯선 땅에서 법전과 잘 이해되지 않는 강의내용과 싸우면서도 독일인들의 원칙이 좋아서 멈추지 않았던 것 같다. 왜? 나의 기본 성향이 복잡하게 생각하는 걸 못하기 때문이고 그런 연유로 수학공식처럼 '원칙'만 지키면 되는 사회가 편했기 때문이었다. 그 길은 결코 짧지 않았고, 정의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결코 끝까지 걸어갈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법을 통해 세상이 나아질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내 마음은 흔들리고 있다.


법을 믿었던 내가 본 현실의 충격


최근의 한국 사법 현실은 이성적인 눈으로는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장면들로 가득하다.

어떤 판결은 정의를 가장한 정치처럼 보이고, 어떤 검사의 언행은 법보다 권력을 우선하는 듯하다. 나는 특정 사건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말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그 순간, 이 글은 정치의 영역으로 오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정말로 말하고 싶은 건 오직 하나 – ‘정의는 왜 이렇게 어려워졌는가’라는 질문이다.


나에게 정의는 단순하다. 죄가 있으면 처벌받고, 죄가 없다면 어떤 이유로도 벌을 받아선 안 된다.

정치도, 여론도, 윤리도, 감정도 – 그 어떤 것도 이 간명한 원칙을 흔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법정에서 오가는 언어는 논리와 증거를 말하지만, 그 결과는 때로 전혀 다른 진실을 만들어 낸다.


넷플릭스 시리즈 ‘링컨차를 타는 변호사’ 시즌2의 마지막 에피소드를 보던 밤, 나는 그 혼란의 한복판에 다시 놓였다. 주인공 미키 할러는 살인 혐의를 받은 의뢰인을 무죄로 만들어낸다. 그러나 에피소드의 끝에서 밝혀지는 진실은, 그 의뢰인이 실제로는 또 다른 살인을 저질렀다는 점이다. 법정은 그 사실을 밝히지 못했고, 정의는 그 자리에 없었다. 나는 화면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건 드라마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 닮았다.”


AI 재판은 정의에 더 가까울 수 있을까?


그 순간,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만약 AI가 재판을 했다면 어땠을까?

감정도 정치적 의도도 없는 알고리즘이 모든 사실을 분석하고, 오직 규칙과 증거에 따라 판단을 내린다면, 지금보다는 더 정의에 가까울 수 있지 않을까? 물론 현실의 재판은 그렇게 단순화할 수 없다는 것쯤은 안다. 인간의 언어, 감정, 맥락은 단순한 수치로 환산되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처럼 노골적인 편향과 기묘한 논리, 그리고 불신으로 가득한 법정보다는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떨칠 수 없었다.

AI 재판은 인간이 가진 편향을 제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혹적이다.

선입견, 정치적 영향력, 감정적 동요 같은 요소는 기계에게 없다. 모든 증거는 동등하게 처리되고, 일관된 기준 아래 판단된다. 하지만 그 속에는 또 다른 위험이 숨어 있다. AI는 과거의 판례와 데이터를 학습하기 때문에, 이미 왜곡된 정의를 학습할 수 있다. 여성, 이주민, 사회적 약자에 대한 판결의 편향이 데이터에 담겨 있다면, AI는 그 편향을 무비판적으로 재현할 수 있다. 이는 '편향되지 않은 정의'가 아니라 '자동화된 불의'가 될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정의는 단순한 사실 판단이 아니다.

때로는 맥락을 읽고, 때로는 인간의 삶을 이해하는 결이 필요하다. 법은 사회를 구성하는 도구이며, 그 사회의 변화와 감정, 가치를 반영하지 못하는 정의는 공허하다. AI가 이 복합적 층위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정의가 아니라 계산일 뿐이다.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은 숫자로 환산된 정의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과 삶을 지켜주는 정의 아닐까.


정의는 하나가 아니다 – 시대, 철학, 그리고 나의 정의


여기서 다시 한 번, '정의'라는 단어의 의미를 되짚어 보게 된다.

정의는 단지 법률의 조문에 따른 결과를 의미하는가, 아니면 인간이 사회를 이루며 함께 살아가기 위해 정한 최소한의 도덕적 약속인가?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은 정의를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상태'로 보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동일한 것은 동일하게, 다른 것은 다르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형평의 정의'를 주장했다. 현대에 와서는 롤스가 말한 '무지의 베일 뒤에서의 공정한 선택'을 기반으로 한 '공정성으로서의 정의' 개념이 영향력을 끼쳤다.


그럼에도 나에게 있어 정의는 언제나 단순했다.

"죄 지은 자는 벌을, 죄 없는 자는 보호를." 그러나 이 명쾌한 원칙이 현실에서 제대로 실현되지 않는다는 점이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정의는 관념 속 이상이 아니라, 실천 속에서 완성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가 겪는 혼돈은 단순한 판단 착오가 아니라, 정의의 개념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도 뉴스 속 사법부의 결정 앞에서 마음이 복잡하다.

법을 공부하며 믿었던 ‘법의 정의’는, 점점 혼돈 속에 뒤섞여 버린 듯하다. 그래서 나는 다시 묻는다. 진실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법정이 아닌 곳에서 정의를 찾아야 한다면, 우리는 그 법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

정치도 감정도 아닌, 순수한 정의를 꿈꾸며 글을 쓴다. 그리고 조용히 이렇게 덧붙인다.


"진실이 사라진 법정에서, AI는 정의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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