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있어준 사람들, 그래서 나는 무너지지 않았다
10년만에 이직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이 과정을 혼자 해낸 줄 알았다. 고민도, 분노도, 정리도, 이직도. 내가 끝까지 생각했고, 나 스스로 판단했고, 하지만 돌아보면, 누군가가 옆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끝까지 가볼 수 있었다.
엄마와의 2박 3일
올해 들어 정말 너무 힘들고 지쳐 있었던 어느 날, 어버이날을 핑계 삼아 고속버스를 타고 엄마를 만나러 갔다. 가는 길에 꽃 한 다발을 샀고, 아주 오랜만에 고향에서 2박 3일을 보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놀랍게도, 불면증은 사라지고, 잠이 오고 또 오고, 자고 또 자고… 얼마나 잤는지 모를 만큼 푹 잤다. 엄마가 끓여준 된장찌개는 보글보글, 내 마음도 햄보글보글.
어릴 적 이야기들을 나누며 알게 된 건, 엄마가 나를 얼마나 자랑스러워 했는지 였다. 시골 동네에서 나는 “소문난 똑똑한 딸”이었다고. 그 말들이, 그 온기가, 지쳐 있던 나를 조용히 붙잡아주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구나’ 잊고 있던 자존감이 다시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엄마는 내 결정을 다그치지도, 의심하지도 않았다. 회사 그만두는 걸 걱정된다는 말보다 “애썼다. 네가 더는 힘들지 않다면 그게 맞는 거야”라고 해줬다. 그 말은 위로가 아니라, 승인 같았다. 내 선택을 지지받았다는 감각은 내 자존감을 다시 꺼내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어떤 날은 그저 “밥은 먹었니?”라고 묻고, 어떤 날은 내가 먼저 말하지 않으면 묻지 않았다. 그 침묵의 배려가 말보다 더 든든했다.
나는 이 결정을 혼자 한 것 같았지만, 사실 그 결심을 받쳐준 무언의 힘들이 있었다. 자존감의 근원은 결국 가족이구나. 무조건적인 사랑이 나를 다시 사람답게 만들었다. 그 뿌리를 다시 확인한 시간, 그래서 나는 무너지지 않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동생의 가슴찡한 응원 메시지
우리는 아주 다른 일을 하며 살고 있지만, 매일 그날 있었던 일, 웃긴 일, 속상했던 일을 나누며 살아왔다. 그래서 퇴사에 대한 고민도 가장 먼저, 가장 많이 나눈 사람이 동생이었다.
며칠 전, 퇴사를 결심했다고 전하자 동생은 이렇게 말했다. “완벽하고 멋진 퇴사일세.”
내가 투정부리듯 “언니 힘들었어 ㅜㅜ”라고 보내자, 쉴 틈도 없이 답장이 왔다. “잘나고 멋있어.” “잘났지 우리 언니. 어디 하나 빠지는 게 있나.” “늘 완벽해.” “열심히, 멋지게 살잖아.” “남들 못하는 거 다 해내고, 자랑스러워.”,
"그냥 언니가 나의 언니여서 너무 좋아."
그 말들을 읽으며 마음이 찢어질 듯했지만, 동시에 꿰매지는 느낌이었다. 세상이 몰라줘도, 조직이 무시해도, 내 사람 하나가 이렇게 말해주는구나. 그 말들 속에서 나는 다시 내가 누구였는지를 기억해낼 수 있었다.
“나는 완벽하지 않지만, 나를 완벽하게 봐주는 사람이 있기에 나는 다시 살아난다.”
그것이 사랑의 힘이고,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다.
이모부에게 난, 나에게 이모부는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땐, 명절마다 이모부와 술잔을 나누며 이런저런 대화를 하셨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뒤, 그 자리를 대신해 나와 대화를 나누시는 분도 이모부였다. 그 이후로, 이모부는 내가 우리집 장녀이기 때문인지 나를 마치 가족의 어른처럼 대하셨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하든 신뢰와 자부심으로 바라보셨고, 그 믿음은 때때로 부모님의 응원보다 더 깊게 와닿았다.
이모부는 공대를 졸업하고 자동차 관련 엔지니어로 오랜 시간을 일하신 분이다. 정년 후에도 계약직으로 몇 년을 더 일하셨고, 국민연금을 초과 납부해서 ‘그만 내라’는 얘기까지 들으실 만큼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한평생을 살아오신 분이다. 놀랍게도 그 후에는 공인중개사 시험에도 합격하셨고, 지금은 여전히 현장에서 일하고 계신다.
나는 그런 이모부를 진심으로 존경한다.
내 이직 소식을 들으시곤, 이모부는 특유의 유쾌함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축하 빵바라 빵빵~~~ 앞날에 축복을, 마음 많이 힘들었다.”, “우리 조카 힘내라, 내가 응원하고 있음.”, “워낙 잘하니까, 옆에서 질투도 많이 받았을 거야. 그건 능력 있는 사람의 숙명이야.”, “가기 전에 쇠주 한 잔 하러 와~”
그 한마디 한마디가 나를 위로했고, 내가 걸어온 길에 대한 인정처럼 느껴졌다.
이모부에게 나는, 이제 아버지의 빈자리를 대신할 수 있을 만큼의 어른 대접을 받는 존재가 되었고,
나에게 이모부는, 내가 아는 그 어떤 사람보다 성실하게 한 삶을 걸어온, 존경받을 만한 인생의 선배다.
그분이 언제나 나를 자랑스러워하고 응원해주는 일은 지금의 나에게 무엇보다 특별한 의미로 남는다.
워킹맘 출근버디, 민정이와의 출근길 수다
매일 아침, 같은 단지에 사는 후배 민정을 태우고 함께 출근했다. 그 시간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하루를 준비하는 정서적 예열과도 같았다. 회사에서의 고민, 사춘기 딸들과의 실랑이, 육아와 커리어 사이의 팽팽한 균형… 우리는 누구보다 서로의 현실을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사이였다.
민정이는 나처럼 금융권에서 오랜 시간 치열하게 일해온 워킹맘이었다. 우리는 실적 압박도, 육아 갈등도, 직장 내 미묘한 감정의 파도도 그냥 스쳐 넘기지 않고 함께 얘기했다.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순간들, "나도 그래." 그 한마디로 하루의 위로가 되는 사이였다.
어느 날 저녁, 함께 골프 연습을 가기로 했던 날. 민정이는 정성껏 준비한 보온 도시락을 내밀며 말했다. “언니, 이거 밥이야.” 그 안에는 따뜻한 집밥과 카레, 두부조림이 담겨 있었다. 혼자인 나를 생각하며 준비한 동생의 배려에 마음이 뭉클해졌다.
민정이는 나의 퇴사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았고, 처음엔 진심으로 말렸다. 그만큼 그녀는 나의 일과 위치, 마음까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농담처럼 “민정아, 언니 여의도로 가면 너 출근 어쩌냐~” 라고 말했을 때, 그녀는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ㅎㅎ 언니, 지금 그게 중허니?”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그런데 난 진심 그녀의 출근길이 마음에 걸린다.
우리의 출근길은 어느새 삶의 일부가 되었고, 그 루틴이 사라진다는 건 단순한 이동 동선의 변화가 아니었다.
매일 마주하던 동료이자 친구, 일상을 함께 살아낸 든든한 사람과의 이별이었다. 매일 함께한 출근길의 끝, 이제 각자의 방향으로 걸어가는 그 작은 단절이 의외로 큰 허전함으로 다가왔다.
민정이는 단순한 후배가 아니었다. 그녀는 나의 일상을 지탱해준 출근 파트너이자, 직장과 가정 사이에서 무너지지 않도록 함께 버텨준 워킹맘 동지였다. 그녀가 있었기에, 나는 매일 아침 책상 앞에 앉을 수 있었다. 그런 그녀와 다른 길을 걷게 된 지금, 우리는 여전히 서로의 길을 응원하는 존재로 남아 있다.
다만 이제는 매일 아침이 아닌 주말에 보는 사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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