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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 Dec 25. 2023

아버님 이제 그만하세요

몹쓸 며느리는 아닙니다.



"이든아. 올해는 산타할아버지 할아버지 집으로 오라고 할까?"

"할아버지, 산타할아버지랑 알아?"

"알지~ 산타할아버지한테 연락해서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할아버지 집으로 오라고 할 테니까 할아버지집에서 잘래?"

"우와, 할아버지 산타할아버지랑 연락도 할 수 있어?"

"그럼, 산타할아버지한테 연락해서 우리 이든이 크리스마스에 뭐 받고 싶은지 할아버지가 다 이야기해 줄 수 있지."



우와. 같은 풍경 다른 생각



이든이의 우와 눈빛을 받은 아버님은 말릴 새도 없이 자꾸만 산타할아버지와의 친분을 자랑하셨다. 어머님은 아버님께 레이저눈빛을 쏘셨고 나 역시 이든이가 눈치채지 않도록 살피며 아버님께 더는 안된다고 그만하시라는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산타할아버지와 전화통화까지 가기 직전이었다. 더 많은 친분을 자랑해서 손자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은 할아버지와 산타할아버지 이야기를 더 듣고 싶은 다섯 살짜리 이든이와의 대화는 다행히 거기서 끝이 났다. 아버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이든이가 갖고 싶은 것을 물어 산타할아버지가 주신 것처럼 우리를 통해 주시다 보니 선물은 할아버지가 주는데 손주는 맨날 산타할아버지한테 고맙다고 하고 좋아하니 조금 질투가 나셨나 보다. 산타할아버지와 없는 친분(사실 이든이 크리스마스 선물을 매년 사주셨으니 산타할아버지라고 해야 하나)이라도 만들어내어 손주의 사랑과 관심을 더 받고 싶으시고 또 그렇게라도 조금 알리고 싶으셨는지도 모른다.



"이눔아, 사실은 할아비가 산타다!"



시드니에서 귀여우신 할아버지산타 중창단



아마도 대나무숲이 있었다면 아버님은 거기 가셔서 이렇게 소리치셨을 것 같기도 하다. 손주 셋 크리스마스 선물을 매년 챙기시면서 손주들의 사랑을 산타할아버지에게 모두 빼앗기다 보니 조금 질투가 나셨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꾸 이렇게 산밍아웃을 하려 하시면 곤란하다. 산타할아버지와의 친분을 과시하다 보면언젠가는 실수가 나오게 된다. 철저하고 완벽하게 산타할아버지의 존재를 숨기고 싶은 엄마아빠는 큰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이든이 마음속의 진짜 산타할아버지와 손주에게 선물을 주고 싶으신 할아버지산타의 마음 모두를 지키는 방법. 쉬운 일은 아니었다. 큰 결심이 필요했다. 아이가 한 명이라 다행이었다.



"그래, 결심했어."



하나부터 열까지 이든이의 손길이 담긴 크리스마스 테이블




할아버지산타에서 아빠엄마산타로 바뀌는 운명의 날은 그다음 해인 이든이의 7살 크리스마스였다.


"이든아. 할아버지집에 크리스마스 선물 받으러 언제 올래?"

"할아버지~ 나 이번주 토요일에 갈게요."(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할아버지 할머니 모든 이모, 삼촌들에게 존댓말로 바꾸는 중이었다.)

"그래, 그러면 토요일에 할아버지집에 와서 같이 크리스마스 선물 사러 가자."

"우와! 할아버지 좋아요. 우리 토요일에 만나요."


7살 크리스마스부터 아버님은 크리스마스 선물에 대해 마음껏 이야기하실 수 있었고 선물을 받고 행복해하는 손자의 얼굴을 바로 옆에서 흐뭇하게 바라보셨다.


어릴 때부터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트리 앞을 깨끗하게 정리하는 이든이었다. (그 옆으로는 레고나 장난감이 가득했지만) 크리스마스 아침이 되면 안방에 있는 자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거실로 뛰어간다. 우리는 잠을 깼지만 실눈을 뜨고 이든이를 살핀다. 벌떡 일어나서 뛰어가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지 못하는 걸 아쉬워하며.


“엄마!! 아빠!! 산타할아버지가 선물 놔두고 가셨어!!”





잔뜩 상기된 볼로 떨리는 목소리로 온몸 가득 신남과 행복이 가득한 모습으로 침대에 누워있는 우리에게 달려온다. 빨리 와보라며 재촉하면 우리는 잠이 덜 깬 척 이든이의 손에 이끌려 거실로 나가서 깜짝 놀란다. 이든이에게 어서 뜯어보라고 너무 궁금하다고 발을 구르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아빠는 마음속으로 엄지 척을 날린다. (훗, 뭐 이 정도 가지고. 장사 하루 이틀 하는 것도 아닌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선물을 뜯고 포장 안의 선물이 본인이 바라던 것임을 확인하고는 이거 맞다며 눈이 한껏 커진다. 기뻐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는 것은 정말이지 큰 기쁨이다. 이든이가 받고 싶은 선물을 힘겹게 알아내고 주문을 하고 택배가 오면 007 작전급으로 남편과 숨기고 포장을 하고(크리스마스포장지와 리본도 잘 숨겨놓아야 한다.) 또 꼭 꼭 숨겨둔다. 크리스마스 새벽이 되면 트리 앞에 몰래 두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아니 힘들다면 힘든 작업이다. 하지만 선물을 받고 이렇게 좋아하는 아이를 보고 나면 내년에도 또 그다음 해에도 기쁘고 설레는 마음으로 준비를 하게 된다.



시드니에서 미리 크리스마스



작년에는 크리스마스이브에 친한 남편친구의 집에서 파티를 하게 되었다.


“엄마, 삼촌집에서 크리스마스파티해도 잠은 꼭!! 집에 와서 자야 돼 “

“이든아, 삼촌집은 멀어서 그리고 엄마도 맥주 한 잔 하려면 자고 내일 와야 돼.”

“안돼. 아무리 늦어도 우리 집에 와서 자야 돼. “

“내일 일찍 오면 되잖아. 오랜만에 삼촌집에 가는데 우리 편하게 천천히 놀다가 오자. 너도 삼촌집 가는 거 좋아하잖아. “

“엄마, 산타할아버지가 우리 집 트리 앞에 선물 놓고 가시잖아. 그래서 내가 늦어도 집에 가서 자고 싶은 거야. “

“아~ (잠시 멈칫했지만 곧 안정을 되찾고는) 이든아, 산타할아버지는 네가 어디에 있는지 다 알고 계시지 않을까? 오늘 삼촌집에서 자는지도 다 알고 여기로 갖다 주실 테니까 걱정 안 해도 돼. “  


이든이를 안심시키고 몰래 선물을 차에 숨겨 둔다. 삼촌집에서 늦게까지 놀고 아이가 깊은 잠에 빠질 때를 기다린다. 남편친구와 그의 아내는 모두 2층으로 자러 올라갔다. 모든 것은 내 손에 달려있다.

미션 1. 소리 내지 않고 나가기 (현관문 열리는 소리에 혹시나 잠이 깰 수 있으니 베란다 창문으로 나간다. - 우리 방은 주택 1층이라 건물벽에 매달리지 않아도 된다. 정말 다행이다.)

미션 2. 불 켜지 않고 나가기 (아이들이 자는 방에 불빛이 새어 들어가서는 안된다. 모든 감각기관을 동원하자. 나는 한 마리 고양이다.)

미션 3. 두 대의 차에서 차례차례 선물을 꺼내기 (친구의 차와 남편차 안에 숨겨진 선물을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찾는다.)

미션 4. 조심히 그리고 조용히 선물을 집 안으로 갖고 들어온다. (미션 1,2를 되새기며 선물들을 무사히 집안으로 갖고 들어온다.)

미션 5. 혹시 모르니 마지막까지 긴장을 놓지 말자.(주스를 많이 마신 이든이가 거실로 나올지 모르니 트리 앞의 선물을 가려둔다.) 정말로 혹시나 해서 선물들을 담요로 가려두었는데 깜깜한 거실로 이든이가 나와서 정말 깜짝 놀랐다. 식탁에 앉아 있는 엄마를 한 번 보고는 화장실에 갔다가 방으로 들어갔다. 20분이나 더 기다렸다가 담요를 치우고 방으로 들어갔다. 큰일 날 뻔했다.

엄마는 그제야 편안하게 잠이 든다.



미션 성공




언제까지 이든이가 산타할아버지를 믿을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최대한 오래 그 마음을 지켜주고 싶다.


올해엔 새벽 5시에 알람을 맞춰두고 트리 앞에 선물을 놔두었다.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이른 아침, 식탁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엄마는 오늘은 갈 곳이 없어 안방 욕실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트리 앞의 선물을 아이보다 먼저 볼 수는 없었기에. 다리는 저리지만 올해도 성공이다.


메리크리스마스



이제 몇 년 안 남았다. 힘을 내요. 산타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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