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름간의 장기여행을 처음 떠난 건 결혼 이후였다. 20년 지기 친구 A와 함께 보름 동안 유럽 2개국을 돌아보기로 한 여행은 항공편을 예약하면서부터 설레기 시작했다. 여행까지는 5개월이나 남았지만 장기간 떠나는 여행이므로 직장에 미리 알렸다. 직장동료들은 너무 좋겠다며, 그렇게 시간을 맞춰 같이 떠날 수 있는 친구가 있는 것이 행운이라고 얘기했다. 하지만 몇몇의 직장동료는 친구(지인)와의 여행에서 결말이 그리 좋지 않았던 사례들을 얘기해주면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싸우지 말고 잘 다녀오라"는 얘기를 했었다. 하지만 나는 처음 떠나는 유럽여행의 설렘으로 그런 얘기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여행 계획을 짜는 것은 A가 담당했다. 영어에 능숙하고, 유럽 자유여행 경험이 몇 차례 있는 A가 본인은 여행 계획 짜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한다고 얘기하면서 나에게는 그냥 즐겨주면 된다고 했다. 그래도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시간이 날 때마다 열심히 맛집을 검색했다. 드디어 우리의 여행이 시작되는 날, 남편은 나를 배웅하면서 모르는 사람과 얘기하지 말고, A씨 꼭 붙들고 다니라며 신신당부를 했다.
A와 보름간의 여행 동안 우리에겐 많은 일이 있었다. 예약해 둔 기차를 놓치고도 태연하게 커피를 마시면서 상황 파악을 못했고, 뒤늦게 다른 여행객의 도움으로 표를 구해서 아슬아슬하게 다시 탄 기차에서는 목적지가 아닌 다른 곳에서 당당하게 하차했다가 캐리어를 들고 떠나는 기차에 허겁지겁 다시 올라타기도 했고, 예상보다 좋은 숙소와 관광지를 보고 환호하기도 했고 예상치 못한 비 소식에 슬퍼하기도 했다.하지만 우리는 어떤 순간에도 꼬여버린 상황에 대해 장난으로도 상대방을 탓하지 않았다. 우리가 여행 중 자주 한 말은 "무사히 집(숙소)에 도착하는 순간 이 모든 것은 추억이 된다"였다.
어떤 날은 기차에서 쉴 새 없이 얘기를 하기도 했고, 또 다른 날은 몇 시간째 A는 음악을 듣고 나는 창밖을 보기도 했다. 우리는 침묵이 어색하지 않은 사이라는 걸 다시 확인했다. 난 A가 듣는 음악이 뭔지 궁금하지 않았고, A는 창밖을 보며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리고 기차에서 나는 풍경을 보기 위해 창가 자리를 선호하고, A는 답답한 것이 싫어서 통로 자리를 선호하는 것도 우리의 마음을 한결 편안하게 해 주었다. 우리는 서로의 개인 시간을 인정하면서 또 함께 우리의 시간을 공유하면서 그렇게 2주를 보냈다.
A는 음식이 세팅된 사진을 찍는 걸 좋아했고, 난 풍경이나 인물사진을 찍는 걸 좋아했다. 나는 A가 음식 사진을 찍는 동안 '왜 이걸 찍을까?' 하는 생각을 간혹 했지만 음식 사진이 잘 나오도록 자리에서 일어나 비켜주면서 그 시간을 미소로 기다려주었고, A는 귀찮은 내색없이 나의 사진을 열심히 찍어주었다.
친구 A가 이 사진들을 찍을 때만 해도 내가 이 사진들을 이렇게나 자주 보게 될 줄 몰랐다.
본인의 독사진을 잘 찍지 않던 A가 여행의 중반부부터는 본인의 사진을 찍어달라는 얘기를 자주 했고, 난 열심히 A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여행 중 A는 "네가 찍어준 이 사진 너무 맘에 든다"는 얘기를 가끔 했고, 난 더 성의껏 A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그리고 여행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온 후에 나는 A가 찍은 음식 사진을 자주 들여다보게 되었다. 나는 A로 인해, A는 나로 인해 서로 그다지 관심 없던 영역에 대해 조금씩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고기와 맥주 1~2잔을 즐겨먹었던 우리, 여행 중에는 식성과 주량이 비슷한 것도 정말 중요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A는 내가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 커피를 마시면서 멍하니 보내는 아침시간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일찍 일어나 움직이는 통에 A는 본인의 기상시간보다 일찍 일어나기도 했을 것이다. 최대한 조용히 움직였지만 커피포트에서 물이 끓는 소리가 나면 A는 어김없이 몸을 뒤척이며 눈을 떴다. 우리는 이미 여러 차례의 국내여행을 함께 한 적이 있고, 동남아 여행도 다녀왔던 터라 여행 중 알게 되는 상대방의 모습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며칠간의 짧은 여행과 보름을 함께 하는 긴 여행은 달랐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의 습관이나 자신만의 힐링타임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도 않았고, 방해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서로 각자의 방식을 인정한 것이다. 그렇지만 간혹 웃으면서 농담조로 서로에게 "너 나 아니고 다른 사람이랑 여행 갈 때는 그러지 마라. 나니까 참는 거다"라고 얘기하기도 했고 상대방은 "너도 마찬가지"라고 웃으면서 응수했다.
보름간의 여행을 마치고 무사히 돌아왔고, 우리는 각자 집으로 가면서 자신의 핸드폰에 있는 몇백 장의 사진을 보내면서 어느새 추억이 되어버린 시간들을 함께 공유했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에 또 가자고 약속했고, 그 후 3박 4일 일정으로 제주여행을 함께 했고, 2박 3일 정도의 짧은 국내여행을 몇 차례 함께 했다.
오랜 시간을 함께 한 친구는 자매 사이와 많이 닮은 듯하다. 나와 다른 면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걔는 원래 그렇다'라고 그 자체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학창 시절 친구 혹은 직장에서 만나 친구 같은 사이가 된 사람들이 여행을 갔다가 감정이 상해서 따로 입국을 했다는 사례도 몇 번 들었고, 여행기간에는 서로 꾹 참고 무사히(?) 귀국했지만 그 이후에 사이가 멀어지거나 다시는 그 사람과는 여행을 가지 않는 경우도 많이 보았다.
연인 혹은 부부가 여행을 가도 사소한 갈등이 있고, 가족여행을 가도 불만이 생긴다. 핵심은 '내가 상대방을 얼마나 포용할 수 있는지'일 것이다. 동행자로 인해 다소 불편함을 겪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핵심은 그런 불편함을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저절로 생겨야 한다는 것이다. 억지로 참는 게 아니라 상대방을 위해서 그 정도는 괜찮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기냐 하는 것이다. 여행을 같이 가서 며칠을 함께 지내보면 내가 상대방에 대해 가지는 애정의 정도를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여행은 사랑이나 우정의 깊이를 확인해볼 수 있는 시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더불어 간혹 상대방으로 인한 불편함으로 마찰이 생기더라도 다시 화해할 수 있는 사이여야 함께 장기간 여행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스스럼없이 또는 조심스럽더라도 불만을 얘기할 수 있고 본인이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으로 인해 상대방이 불편했다고 하면 사과할 수 있는 사이,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마음이 저절로 생겨나는 사이, 우리가 지금은 갈등이 있지만 몇 시간 후면 다시 풀릴 거라는 믿음이 있는 사이여야 여행은 물론 기나긴 인생을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